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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을 다했다" "최선을 다하고 있다" "노력했다" "노력하고 있다"
내가 입에 달고 사는 말인 것 같다.
근데 누군가 그런다. '최선' 과 '노력'은 아주 손쉬운 자신에 대한 하나의 변명거리와 핑계거리 밖에 안된다는 말이다.
자기 방어 기제가 발동해서 하는 아주 손쉬운 자기 합리화의 한 단면이라는 것이다.
아주 직설적으로 그리고 잔인하게 자문자답 해보고 있다
"너는 최선과 노력의 <<임계점>> 까지 가 보았느냐고? "
"한계를 설정하거나 설정하지 않고 한계를 경험하고 그걸 깨부술려고 노력다운 노력은 해보았는지?"
"너는 크리티컬 매스를 경험해보지 않았잖아? 그것이 바로 너가 아직 제자리 걸음만 하고 있다는 방증이요 증거잖아."
"높은 산을 오르고 오르고 있어. 정상이 보인다고 착각하는 거 아니지? 그리고 너는 미친듯이 미친듯이 달려든 적이 있어? 아직 없잖아? 그건 너가 노력을 안 하고 있고 최선을 다했다고 절대 말해서는 안 되는 아주 이유 중의 이유야."
조정래 선생님이 하신 유명한 명언(조언) "최선을 다했다는 말과 노력했다는 말은 진정으로 자신을 감동시킬 만큼의 노력을 경주했을 때(들였을 때) 하는 거라고."
가끔 스포츠 스타들이 올림픽에서 제일 높은 시상대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 때 그리고 대회에서 우승을 했을 때 자연스럽게 감동의 눈물이 흘러내릴 때, 우리는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맛보는 동시에 짜리한 백만볼트짜리 전기(전율)를 맛보는 것일 터이다.
아리고 아픈 과정과 고통과 좌절의 시간은 길고 길다. 반면에 성공과 환희와 감동의 순간은 너무다 짧고 또 짧다. (그것이 삶의 방정식이 아닐까.)
아주 흔한 예로 우리가 산의 정상을 오르기 위해서 몇 시간의 시간을 견디고 견디고 오른 과정을 묵묵히 견디고 견디며 산에 정상이 보이기 시작하고 결국에 산에 정상에 오르게 되면 그 환희와 기쁨은 아주 찰나의 순간에 지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가 아닐까. 한다.
아무튼, 여러모로 마음이 급하다.
나에게 진지하게 충고한다. 함부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 이미 <최선>을 다했다." "<노력>했다. 지금도 <노력>히고 있다."라는 자기 합리화 / 변명이나 핑계거리를 내뱉지 말지어다.
누군가가 너에게 "너, 요즘 뭐해?" "너 그래 갖고 어떻게 성공할 수 있겠어?라고" (악의없는) 질문으르 들어도 그때는 차라리 침묵을 (선택)해라. 내면으로도 <최선> 과 <노력>이라는 단어를 함부로 떠올리거나 사용하지 마라.
<최선> 과 <노력> 이라는 단어는 너가 정상에 마침내 올랐을 때,
너 자신을 포함해서 너의 주변인 모두들이 인정하고 평가해 줄 때 하는 것이라고.
한계의 끝까지 가려고 몸의 자세를 최대한으로 낮추고
<<임계점>>까지 자신의 몸을 던진다는 자세로
모든 걸 남김없이 한 줌이 에너지도 남기지 않고 쏟아붓는다는 자세로 자신을 밀어부치라고 조언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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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Dream) 수첩을 샀다.
꿈이 적으면 어떡하지.
꿈이 생생하지 못하면 어떡하지.
꿈이 모자라면 어떡하지.
꿈을 넘어서 비전이 아직 설정되어 있지 않다면 어떡하지. 라는 의문 부호들이 생성되고 있다.
꿈에 진지하게 접근하고 있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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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지하다고 놀림을 받은 적이 있다. 진지하다고 손가락 질을 받은 경험이 있다.
근데 살아보니 그 진지함(사유한다라고 칭하고 싶다)이라는 덕목은
참으로 고귀하고 어쩌면 모든 것들의 시작점이자 출발점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20~30 대는 거의 고통으로 몸부림을 쳤던 기억밖에 없다.
근데
그 고통들이 나를 생각하는 사람.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
나아가 사유하고 사색하는 사람으로 탈바꿈 (변모)시킨 것이었다.
이제는 습관으로 굳어져버려서 생각하지 않고 고민하지 않고 무슨 업무으 처리하면 불안감 부터 엄습한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예민한 촉수 와 촉이라는 것도 길렀다고 자부하고 있다.
그렇다고 내가 잘났다고 성공만 했다는 소리가 아니다.
한마디로 실패에 대한 맷집이 좋아졌다고 해야 하나?
한마디로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액면 그대로 두려움으로 바라보지 않고 두러움의 뒷면(=기회=)을 직시하게 만들었다.
모든 것이 돈으로 계랑하고 측정해서 <성공>으로 매도하는 통념도 지양해야 한다. 그리고 평균적인 삶이나 일상이 성공의 바로미터가 되는 것도 잘라내야 하는 통념인 것이다. 진짜배기 진짜라고 칭할 수 있는 <성공>은 아마도 상위 0.01%의 범위에 들었을 때 바로 <성공>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근데 이 대목에서 <성공>을 돈으로 측량할 수 없다고 전제하고 바로 상위 0.01%라고 못 박는 건 모순이지 않느냐고 항변할 것이다. 분명 오해의 소지가 있다. 이건 나의 기준이나 수준이 아니라 우리들 대부분이 품고 있고 생각하는 바에게 살아가고 어쩔 수 없이 우리들이 지금껏 건설하고 이룩해놓은 사회를 부정하고 무시하고 살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나름대로의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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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원격 근무>는 시작됐다.
이미 <원격 근무>는 시작됐다.
이미 <원격 근무>는 시작됐다.
이미 <원격 근무>는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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