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라임 오렌지나무 - MBC 느낌표 선정도서, 보급판
J.M 바스콘셀로스 지음, 박동원 옮김 / 동녘 / 2003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내가 착하다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기심을 탓할 때, 난 내 이타주의에 스스로 감탄했을 만큼
내 자신의 '선함'에 대해서 의심했던 적이 없다.
하지만 이러한 자신감은 반대로 주변의 다른 사람들을 악하게 만들어 버리는
부작용을 동반했다.
친구와의 다툼속에서도 늘 내가 참아주고 있다고 믿었고,
가족들과의 시간과 안락함을 위해 내가 포기하는 부분이 많다고 생각했고,
다른 사람들의 귀찮은 일을 내가 떠맡아서 해주는 건
내가 배려심이 많은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문득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날 느꼈을 때,
이미 나는 착하지 않은 사람이 되어 있다는 걸 알아 버렸다.
어쩌면, 이런 내 말들조차 가식적으로 들릴 수 있을지 모르지만,
조금 더 많은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 최근의 나의 욕심은
...간절하다.

그리고 이런 나와 반대되는 한 소년을 기억해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늘 말썽쟁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골칫덩이라고 핀잔을 듣지만
실은 사랑이 많고 나눌줄 아는 그 아이를 만났던 날은 아주 더웠다.
그 여름 하루 종일 걸어다니며 여행의 피로함에 지쳤을 때,
기차를 기다리며 딱딱한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나는 제제를 만났다.
가슴 속에 새를 키우고 라임 오렌지 나무와 세상을 공유하는 이 아이는,
가난하고 힘겨운 일상들 속에서 살고 있었다.

많은 에피소드들을 다 기억할 수도 다 풀어낼 수도 없지만,
제제가 보여준 일상의 이야기들을 떠올리며 나는 험악해진 나와 마주해버린다.
선생님의 빈 화병에 꽃을 꽂아 놓는 제제에게 꽃을 꺾어선 안된다는 선생님 말에,
제제는 꽃은 하나님의 것이라며 깜찍하게 말한다. 그리고는 자신의 가난에 대한 불평보다는
자신보다 더 가난한 다른 친구때문에 선생님이 주는 간식비를 받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 말에 선생님은 눈물을 보이고 만다.
'이제 난 저 빈 화병을 보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이 피어있는 것을 볼 수 있단다.'
...나는, 누군가에게 가장 아름다운 꽃을 보여준 적이 있던가?
누군가를 돕는 일은
여유롭고, 모든 것이 만족스러운 가운데 내가 가진 많은 것 중에 일부를 나누는 것 뿐이라고
여겼던 나는 어린 제제의 이 따뜻한 사랑에 시큰해지는 가슴이 느꼈다.
내가 누군가에게 이렇게 선한 사람이 되어서 그 사람의 가슴을 울려 본 적이 있던가?
왜, 나는 그런 것을 욕심내지 않을까?

우리는 가끔 '감동'이라는 것을 우습게 여긴다.
작위적이고 인위적이고 때론 감정의 낭비로까지 여기며 가슴이 떨리고 코끝이 찡해지는
이 순간의 값진 가치를 아무렇지도 않게 버려버리기 일쑤다.
그것은 어쩌면 순수성을 잃어버린 '감동인척하기'때문에 질려버려서 일지도 모르지만,
우리 스스로가 그런 감동을 나누는 것에 익숙하지 않아서 일지도 모른다.
제제는, 그런 감동이 익숙한 아이이다.
물론 나처럼 '착한 행동'을 위해서가 아니라
때로는 어린 동생의 운동화를 위해서,
때로는 상처입은 뽀르뚜까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서,
때로는 가난한 아버지를 위해서,
때로는 가엾은 타인을 위해서,
그렇게 누군가를 향한 작은 선함을 일상에서 베푸는 그런 아이다.

나는 선함이 강함을 이길 수 있다고 믿고 싶다.
나는 선함이 모여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고 싶다.
나는 아름다운 것이 선한 것이 아니라, 선한 것이 아름다움으로 받아들여지는
그런 세상을 살고 싶다.
그리고 나처럼 그런 믿음을 가진다면 이 책을 읽어 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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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가 사랑한 수식
오가와 요코 지음, 김난주 옮김 / 이레 / 200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기억할 수 있는 시간이 달랑 80분이라면?
80분이 지나면 사라지는 지금 이 시간은 사라지고, 다시 처음처럼 기억을 새로 쌓아야 한다면?
이 책의 주인공처럼.
그 두려움과 막막함과 외로움을 잠시 접어두고,
그 상황에서 얻을 수 있는 좋은 일을 한 가지 찾아보라면..
비 오는 날 버스에서 넘어져 모든 사람의 시선을 받았던 일을 잊을 수 있을테고,
친구와 잔뜩 싸워서 퉁퉁 부은 기분이 저절로 가라앉을 테고,
내 앞에서 잔뜩 뻐겨대는 심술궃은 얼굴도 80분 후엔 작별일 테고,
엉엉 울지도 못할 만큼 답답한 일이 밀려 있어도 한 숨 자고 일어나면 안녕일텐데..
음..하지만, 누군가는 분명히 말하겠지?
추운 눈길에서 비틀거리던 내 손을 잡아주던 엄마의 따뜻한 온기도 기억하지 못하고,
밤새도록 얘기를 나누며 속내를 터놓던 친구들과의 시간도 사라질거라고.

...그래, 그렇지. 기억이라는 건 좋든 싫든 우리의 삶을 연결하는 접착제같은거지.
그럼, 그런 접착제가 없는 사람은 어떨까?

여기 그 접착제가 굳어버린 사람이 있다. 1987년(...기억이..)까지 잘 붙여나가다 갑자기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접착제때문에 그 이후의 기억이 하나도 붙어 있질 못하는 늙은 수학자.
수학 퀴즈를 풀며 똑같은 질문을 하며 똑같은 사람을 새로 사귀며, 아직도 같은 해에 멈춰있는 그는
단 하나의 메모만은 잃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내 기억은 80분밖에 지속되지 않는다.'
그리고 만난, 미혼모 파출부와 그녀의 아들..루트(제곱근을 의미하는 수학 연산표시)

생일에서 의미있는 숫자를 발견해내고, 야구 좌석 번호에서 기쁨을 찾아내며,
방정식을 풀며 소통하는 이 세 사람의 이야기는 잔잔하고 조용하다.
이미 야구 생활을 그만 둔 야구 선수만을 기다리는 박사를 위해, 거짓말을 하는 두 사람과
두 사람을 기억하기 위해 그들을 그린 메모지를 옷에 붙이고 다니는 박사의 모습은
...유치하지만, 감동으로 남는다.
흘러넘치는 감정을 엿보이지 않는 것이 일본 소설의 하나의 특징이지만,
이 소설에서 유지하는 평정심은 큰 울림보다 더 깊게 요동친다.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이유는,
시간이 많아서도 글을 쓰고 싶어서도 이 책을 소개해주고 싶어서도 아니다.
나는 단지, 오로지, 나 한 사람을 위해 이 글을 쓴다.
지금 나를 위로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
박사가 사랑했던 수학과 연결됐던 모든 기억들 속에서, 잊혀질 기억들 속에서 늘 진심이었던 그들 속에서
갑자기 잃어버린 기억에 먹먹해진 박사의 멈춰버린 발걸음 속에서,
그렇게 만들어낸 그들의 인생을 통해서 내가 위로받았던 그 순간을 기억하기 위해서 말이다.
이 책은 그런 책이다.
한 순간 시계바늘이 만들어 내는 숫자에 웃음이 지어지고,
내 뒷통수를 한 번 더듬어보게 되며,
80분 동안의 내 기억들이 한 없이 소중해져 버리는 마법을 가능하게 만드는..
그래서, 지금 쓸쓸한 내가 잠시 힘을 얻게 되는 그런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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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2-21 15: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기다림으로 2006-03-02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잘 지냅니다. 이렇게 가끔씩 저를 기억해주시는 분들을 뵐때마다 저도 숙연해집니다. 마음 한 구석이 짠..하기도 하고..^^ ..님의 글에서 제가 얻어가는 기쁨도 얼마나 많은데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5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세상엔 당연한 게 있다. 아니, 당연한 게 있는 법이라고 믿고 있었다.
엄마의 잔소리가, 아빠의 심부름이, 언니와의 투닥거림과, 친구들과의 수다가,
그리고, 내일 아침 눈을 뜬다는 것이..
나에게는 당연한 일상이었다.
밤새 데워놓은 이불 속에서 꼼지락거리며 게으름을 피우면서도, 새벽 공기에 간지러운 코끝이 누구에게나 주어진 몫이라고, 나는 믿었다.
그런데, 어느 누군가는 그 아침이 두렵단다.
내일 아침 또 다시 눈을 떠서 다가올 삶의 끝을 무작정 기다려야 하는 그 시간들이, 그 시간 속에서 떠오르는 삶의 시간들이 두려운 사람이 있다는 걸 부끄럽게도 나는 몰랐다. 알았다면 내 아침이 더 소중했을텐데, 알았다면 내 일상이 감사했을 텐데.. 나는, 몰랐다.

그는 사.형.수.
묵직하게 가슴에 걸린 이 말이 책을 덮고 난 후에도 쉽사리 내려가지 않아 한참을 고생했더랬다.
나는  사형반대를 외치며 눈물 흘리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과격하게 '사형은 필요해!'라고 외칠 수 있는 주관도 없었지만 그들을 무작정 감싸 안을 포용력도 없는 사람이다, 나는. 내가 피해자가 되거나, 내 주변이 피해자가 되어도 그들을 '죽이지 말아 달라며' 빌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평화로운 삶 속에서 사형 반대를 위해 애쓰는 분들을 위선자로 여기기도 했다고 '진짜 이야기'를 나도 해본다.
그런데 이 책을 덮고 나면, 나와는 상관없다고 여긴 그 사.형.수.라는 시퍼런 말이
멍처럼 맺혀버린다.

이야기의 구조는 아주 단순하다. 어린 시절이 불행했던, 하지만 겉으로 보이기에는 아주 달라보이는, 속은 조금도 다르지 않은 상처 투성이의 두 남녀의 이야기. 가장 흔하지만 그래서 늘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그들의 '사랑'속에서 상처 받고, 상처 주고, 결국에는 그렇게 멍만 들어 버린 아프기만 한 사람들을 보게 된다는 이야기. 그리고 온 몸으로, 삶으로, 그들을 안아 주느라 이를 악물고 버티는 사람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읽게 된다. 분명 가슴으로 먼저 읽히는 이 이야기는 머릿속까지도 헤집어 놓아 버린다.

아..어떤 말을 해야할까?
그 이야기를 해볼까?
예전에 한 목사님 부부가 그분들의 아들을 살해한 남자를 위해 구명운동을 벌이셨다. 굉장히 이슈가 됐던 그 때, 인터뷰 중에 죽은 아들을 생각하며 갑자기 울음을 터트린 사모님 얼굴이 생각난다. 참다 참다 터져 버린 그 울음속에 나는 차마 알지 못하는 슬픔이 있다는 건 볼 수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말씀하셨다. 내 아들이 죽었다고 다른 생명까지 죽일 수는 없지 않느냐고, 용서했다라는 말이 아니라 사랑한다는 말이 아니라..
용서하고 싶다고.
용서하고 싶어서 살려주고 싶다고,,,그 목소리가 나는 아직 생생하다.

나도 그렇다. 어떠한 이유에서도 사형을 반대한다고 말 할 자신이 나는 없다. 하지만, 사람이 사람을 죽인다는 것인 그것이 지독한 잔인한 목적이건, 아니면 인위적인 차가운 목적이건 우리는 두려워해야 한다.
그 두려움을 기억하고 살아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말해 본다.
그래서 이해하지는 못해도, 사랑하지는 못해도, 슬퍼하지는 못해도,
그렇게 하고 싶다고, 이해하고 싶다고, 사랑하고 싶다고, 슬퍼하고 싶다고. 그렇게 말해야 한다고.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어쩌면 나처럼 울지도 모르고, 분개할지도 모르고, 세상을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조금 더 넓은 시선을 다시 한 번 가지게 될지도 모르지만, 무엇보다도 이 질문을 한 번 해보는 건 어떨까 하고 부탁을 해본다.
누군가, 이 글을 읽고 이 책을 읽게 된다면 말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을 주시며,
신이 우리를 이 아름답고 때론 지독히 악한 이 곳으로 보내며,
어느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허락한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냐고.
삶? 죽음?
뻔하지만 나는,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허락받은 사랑을 마음껏 쓰지 못하고 세상을 끝낸다면,
쓰지 못한 은행 잔고처럼 얼마나 아까울까..
그 사랑을 세상에 보내는 방법을 이 책을 배워보는 건 어떨까? 이 가을이 다 가기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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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0-22 09: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기다림으로 2005-10-23 1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잘 지내시죠? ^^ 감사합니다.
 
흥한민국 - 변화된 미래를 위한 오래된 전통
심광현 지음 / 현실문화 / 2005년 5월
평점 :
절판


요즘처럼 아주 덥지도 않고, 춥지도 않은 때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무어냐고 묻는 다면..
나같은 게으름뱅이도 '여행'이라고 답할게다.
길을 걷고, 밥을 먹고, 책을 읽고, 이야기를 하고, 음악을 듣고..일상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이런 일들이 '여행'속에서 더 그리워지는 까닭은 맘껏 여유로운 마음 때문일지도 모르고, 힘겨운 현실을 잊고 싶어서 일지도 모른다.
부끄럽게도 본인은 그런 여행에 대한 환상을 늘 내 나라 밖에서만 키워왔다. 화려하고 고풍스러운 이탈리아 거리라든가 밤을 밝히는 에펠탑의 불빛이라든가, 어마어마한 미술품들과 아름다운 성들.. 아니면 더 이국적이고 낯선 곳에 대한 동경과 애착은 여행 책자를 뒤지게 하고, 배낭여행 경비를 모으게 만들었다.
그런 내가, 단 한 번 한국의 빛깔에 취한 적이 있는데,
친구들과 찾아간 하동, 그 곳에서 접한 자연은...가슴이 뛰었다.
솔향이 그대로 풍겨나는 구불구불한 산 길과 그 산 길을 흐르는 발목이 얼것같던 계곡 물과, 진한 녹색빛이 너무 싱그럽던 차 밭.
...아, 아름답구나...
그렇게 처음 추상적인 '아름다운 이 강산'에 대한 이미지가 구체적인 경험이 되어서 다가왔다.

음..내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비록 큰 실천이 없다해도, 그저 분별없는 감정이라 해도 이 작은 내 나라에 대한 이유없는 애정은 순간순간 놀랍게 크게 일어나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누군가에게 내 애정을 설명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말문이 막혀버릴거다.
이 책은, 솔직하게 이야기하자면 나를 진하게 끌어당기는 매력을 가지지는 않았다.
전통문화와 현재까지의 한국의 여러 문화적인 측면이나 삶의 모습들을 '흥'과 '프랙탈'이라는 하나의 담론에 끌어내려는 저자의 노력과 시도는 신선했지만.. 그 주제에 맞게끔 내용을 짜맞추느라 어색해진 부분과 납득하기 힘든 정리에 의아했던 것도 사실이다.  너무 많은 이야기들을 풀어 내려고, 그러면서도 하나의 주제안에서 해결하려는 흔적은 '흥에 대한 애정' 혹은 집착으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한국의 전통과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이해해보기 위한 꼼꼼한 관찰만은 엿보인다.

앞에서 이야기한것처럼, 내가 반한 자연에 대해서 저자 심광현님은 프랙탈이라는 독특한 요소로 설명한다. 사실, 프랙탈이라하면 끊임없이 이어져있는 정사각형 상자라든가 눈송이의 무늬라든가 나뭇잎의 모양새외에는 잘 떠오르지 않지만.. 불규칙하면서도 안정적이고, 유연하면서도 일정한 그런 현상으로 '한국'을 이해해본다는 것이 생소하긴하지만, 새로운 한국으로 변모하려는 지금 이 시기를 따라잡으려는 작가의 의지로 생각되어 진다. 그 의지가 나처럼 생소할 수도 있고, 아니면 공감으로 다가갈 수도 있겠지만.
한옥의 한지 바른 문이나 붉은 악마들이 가득했던 6월의 한국의 모습을 기억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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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모든 것의 역사
빌 브라이슨 지음, 이덕환 옮김 / 까치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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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시작을 이야기하며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공간을 머릿속에 심어놓더니,
원자의 크기를 예를 들어 설명해 헉소리나는 아찔함을 던져주고는,
지구 속을 파고들며, 망망대해를 떠돌며, 산자락을 오르내리며 숨 한 번 쉴 수 없게 만들고는,
생명의 시작과 끝에 대해서 담담히 이야기 해버리는 이 책은...
과연 제목처럼 '거의 모든 것은 역사'를 담아낸다.

과학책을 읽는다 하면 '에? 그 어려운걸? 전공도 아니잖아?'라고는 진저리 치기 쉽상이다.
그도그럴것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기억에 남는 것이라곤 '등가속도 운동' '질량보존의 법칙' ...정도랄까?
이를테면 '중요하지만 어려운 것' '필요하지만 피해버리는 것'이 되어버려, 몰라도 무식해보이지 않는 상식의 영역을 벗어나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 과학책이라고 다 그런법은 아니다.
일명 '과학 인문 교양서'는 일반인을 위해 쓰여진 아주 친절한 책들이다.
나 역시 몇 권 읽지 않은 분야의 책들이지만, 권할만한 책이고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책이라는 찬사를 미리 보내고 싶다. 500페이지의 책과 가끔은 난해해지는 개념들에 브레이크가 걸리는 것만 빼고 본다면 '술술'읽힌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나는 이 책에 소개된 수 많은 과학자들처럼 우주의 광활함이나 생명의 기원에 대한 천재적인 직감과 열정적인 탐구는 없는 사람이다. 일생을 바치고, 젊음을 바치고 때론 죽음을 담보로 얻어낸 그들의 업적과 노력에 그저 경의를 표하고는 뒤돌아서는 내 일상을 다시 찾아내는 평범한 사람일 뿐이다. 허나,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수많은 '그들'의 일생을 함께 따라간다.
신비로운,
그래, 이 말보다 더 어울리는 말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목소리들을 잡아내서, 감춰진 비밀들이 드러나는 순간은 기쁘고 들뜨기까지 하다.
내가 사는 지구는, 내가 속한 태양계는, 우리 은하는, 이 우주는..
도무지 짜맞춰넣을 수 없는 그 질서정연함과 그리고 헤아릴수 없는 무질서의 다양함으로 가득한가.
그 안에서 '한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나는 얼마나 보잘것 없으며 또 얼마나 귀중한가. 이런 귀중함들을 초신성의 폭발이라든가 대류권의 존재라든가 마그마와 지진을 통해서 깨닫게 된다는 것은 꽤나 멋진 경험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두려운,
아무렇지도 않게 내쉬던 내 주변 공기와 자외선을 걱정하긴 해도 여전히 반가운 태양광선과 멋진 볼거리로 가득한 밤하늘 유성우와 태초의 자연을 간직한 저 바다과 내 발 밑.
모든 것을 다 알지도 못하는 나는, 이 평범한 내 주변을 둘러보며 살아있음을 감사하게 됐다.
정말 말그대로 '우연히' 죽을 수도 있었으며, 눈 깜짝할 새에 모든 걸 잃을 수 있는 환경속에서 용케도 살아있구나..라며 평화롭고 고요하기만한 자연의 온기에 차가움을 느끼기도 해본다.

이렇게 신비롭고 두려운, 이 곳에서 우리는 살고 있고 전부터 살아왔고 앞으로도 살아갈 것이다.
많은 실수들과 무지로 잃어버린 것들은 얼마나 많은가? 얇지만 생명의 든든한 보호자였던 오존을 편리함에 열광하며 잃어버렸고, 인간의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살아남은 물고기를 단지 맛이 좋다고 잡아 먹어 놓쳐버렸다. 무책임하게 덮어버린 흔적들은 또 어떤가?
과학자들의 이름으로, 혹은 영향력있는 이들의 모습으로 그려진 이 역사속에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모습도 함께 찾아볼 수 있다.
그래서 이 책을 덮을 때쯤이면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생기지 않을까?
와..이 두꺼운 책을 내가 다 읽었어?라며 뿌듯해하고
뭐, 궁금한거 있으면 물어보지?라고 조금은 뻐겨보고
그리고, 결국에는
"지금 이 시간, 이 공간을 그저 감사할 뿐이라고" 고개를 숙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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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04-13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센스가 부족한지 읽다가 지쳐버렸지요..^^;; 리뷰 보고 나니.. 재도전의 욕구가 생기는데요!!!*--*

기다림으로 2005-04-13 1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숍님의 센스는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____^ 요즘처럼, 봄햇살이 너무 이쁜 날 봄꽃 아래에서 쉬어 읽기에는 조금 과한 감이 있지만요..^^;; 자외선을 피해 잠시 이 두꺼운 책 밑으로 피해보시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습니다.

날개 2005-04-26 2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주의 마이리뷰에 당선되신거 축하드려요..^^

기다림으로 2005-04-27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날개님의 경사에도 제가 달려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