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가 사랑한 수식
오가와 요코 지음, 김난주 옮김 / 이레 / 200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기억할 수 있는 시간이 달랑 80분이라면?
80분이 지나면 사라지는 지금 이 시간은 사라지고, 다시 처음처럼 기억을 새로 쌓아야 한다면?
이 책의 주인공처럼.
그 두려움과 막막함과 외로움을 잠시 접어두고,
그 상황에서 얻을 수 있는 좋은 일을 한 가지 찾아보라면..
비 오는 날 버스에서 넘어져 모든 사람의 시선을 받았던 일을 잊을 수 있을테고,
친구와 잔뜩 싸워서 퉁퉁 부은 기분이 저절로 가라앉을 테고,
내 앞에서 잔뜩 뻐겨대는 심술궃은 얼굴도 80분 후엔 작별일 테고,
엉엉 울지도 못할 만큼 답답한 일이 밀려 있어도 한 숨 자고 일어나면 안녕일텐데..
음..하지만, 누군가는 분명히 말하겠지?
추운 눈길에서 비틀거리던 내 손을 잡아주던 엄마의 따뜻한 온기도 기억하지 못하고,
밤새도록 얘기를 나누며 속내를 터놓던 친구들과의 시간도 사라질거라고.

...그래, 그렇지. 기억이라는 건 좋든 싫든 우리의 삶을 연결하는 접착제같은거지.
그럼, 그런 접착제가 없는 사람은 어떨까?

여기 그 접착제가 굳어버린 사람이 있다. 1987년(...기억이..)까지 잘 붙여나가다 갑자기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접착제때문에 그 이후의 기억이 하나도 붙어 있질 못하는 늙은 수학자.
수학 퀴즈를 풀며 똑같은 질문을 하며 똑같은 사람을 새로 사귀며, 아직도 같은 해에 멈춰있는 그는
단 하나의 메모만은 잃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내 기억은 80분밖에 지속되지 않는다.'
그리고 만난, 미혼모 파출부와 그녀의 아들..루트(제곱근을 의미하는 수학 연산표시)

생일에서 의미있는 숫자를 발견해내고, 야구 좌석 번호에서 기쁨을 찾아내며,
방정식을 풀며 소통하는 이 세 사람의 이야기는 잔잔하고 조용하다.
이미 야구 생활을 그만 둔 야구 선수만을 기다리는 박사를 위해, 거짓말을 하는 두 사람과
두 사람을 기억하기 위해 그들을 그린 메모지를 옷에 붙이고 다니는 박사의 모습은
...유치하지만, 감동으로 남는다.
흘러넘치는 감정을 엿보이지 않는 것이 일본 소설의 하나의 특징이지만,
이 소설에서 유지하는 평정심은 큰 울림보다 더 깊게 요동친다.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이유는,
시간이 많아서도 글을 쓰고 싶어서도 이 책을 소개해주고 싶어서도 아니다.
나는 단지, 오로지, 나 한 사람을 위해 이 글을 쓴다.
지금 나를 위로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
박사가 사랑했던 수학과 연결됐던 모든 기억들 속에서, 잊혀질 기억들 속에서 늘 진심이었던 그들 속에서
갑자기 잃어버린 기억에 먹먹해진 박사의 멈춰버린 발걸음 속에서,
그렇게 만들어낸 그들의 인생을 통해서 내가 위로받았던 그 순간을 기억하기 위해서 말이다.
이 책은 그런 책이다.
한 순간 시계바늘이 만들어 내는 숫자에 웃음이 지어지고,
내 뒷통수를 한 번 더듬어보게 되며,
80분 동안의 내 기억들이 한 없이 소중해져 버리는 마법을 가능하게 만드는..
그래서, 지금 쓸쓸한 내가 잠시 힘을 얻게 되는 그런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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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2-21 15: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기다림으로 2006-03-02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잘 지냅니다. 이렇게 가끔씩 저를 기억해주시는 분들을 뵐때마다 저도 숙연해집니다. 마음 한 구석이 짠..하기도 하고..^^ ..님의 글에서 제가 얻어가는 기쁨도 얼마나 많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