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치핀 -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존재
세스 고딘 지음, 윤영삼 옮김 / 라이스메이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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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글은 조영미의 브런치에 올린 글입니다.

 

https://brunch.co.kr/@youngmicholaf5/74

사람은 누구나 적어도 한 번은 천재였던 적이 있다. 누구나 한 번은 어려운 상황을 헤쳐 나올 수 있는 날개를 찾고 발명하고 창조했다.

예술은, 적어도 내가 정의한 예술은, 자신의 인간성을 활용하여 다른 사람의 변화를 이끌어내고자 하는 의도적인 행동이다.

-      세스 고딘의 린치핀 中

내가 천재였던 적은 없었다. 나에게 천재성은 앞으로도 오지 않을 거라 해도 상관없다. 왜냐하면,

나는 적어도 어려운 상황을 헤쳐 나올 수 있는 날개가 있으니.

그 날개는 나를 멀리멀리 좋은 데로 데려가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 날개는 나를 더 멀리 가지 않고 내 자리를 지키게 해 주었다.

그 날개는 바로 글쓰기였다.

한 때 글쓰기를 거창하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글쓰기에는 뭔가 특별함이 있어야 하고, 사람들의 주목을 끌어야 하고,

그런데

글쓰기는 나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주지 않았다.

그래서 포기했다.

너무 지루했다. 한참 뒤, 내가 쓴 글들을 보았다. 이상하고 웃기는 글을 보면서 내가 진짜 이상하고 웃긴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웃겼다. 내 글이, 글을 쓰는 내가, 진짜 웃겼다.

그래서 또 다시 썼다.

이상한 사람이었고 지금도 이상한 사람인데 그래도 뭔가를 쓰려고 애썼던 내가 애틋하고 기특하고 그랬다. 무엇보다도 에너지가 느껴졌다.

글쓰기는 그저,

나를 나로 살게 해 주었다.

나를 나로 사는 데에도 힘이 쓰인다. 가만히 있는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

나를 나로 살게 하려면, 나를 인간답게 만들어야 하는데,

인간답다는 건 어제보다 조금 나은 오늘을 보내려고 애쓰는 일이다.

그래서 글쓰기를 했다.

평범함이란, 좋은 물건이 되려고 했으나 실패한 것을 가리킬 뿐이다. – 46

가만히 있으면 평범해진다. 그것은 인간답지 못하다. 그래서 나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는 예술은 미완성 작품일 뿐이고 온전한 예술이 되지는 못한다. – 148

일기가 아닌 보이는 글쓰기로 이 공간을 오가는 님들과 소통을 하게 되었다. 이 길을 오가는 님들 모두 예술을 추구하는 이들이라고 믿는다. 그분들에게 배우는 게 참 많다. 덕분에 나도 예술의 일부분을 엿보게 되었다.

보랏빛 소가 가치 있는 제품에 대한 은유였다면, ‘린치핀은 가치 있는 사람에 대한 은유다. 누구나 찾아서 곁에 두고 싶어하는 꼭 필요한 사람이다.  – 22

삼십 대에 막 들어섰을 때였다. 노력만 하면, 내가 뭔가가 될 줄 알 때였다. 내가 정한 뭔가는 내 자리에서 짱 먹는 일이었다. 사회생활은 발끝으로 축구공 오래 차기 같은 것도 아니라서 다리가 길다고, 연습을 많이 했다고 해서 짱을 먹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때 내가 읽은 책은 보랏빛 소가 온다였다. 그 신선함은 이루 말할 데가 없었다. 새로운 일을 꾸준히 찾아가는 힘을 보라소로부터 받았다. 지금 그 힘을 린치핀으로 다져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잠시 넷플릭스를 꺼두고 오랜만에 종이책을 넘겨보며, 조심스럽게 날개를 펼쳐본다. 그래, 오늘도 잘 살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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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어 수업 - 지적이고 아름다운 삶을 위한
한동일 지음 / 흐름출판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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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국민학교) 고학년때였다. 교과서에 공사현장에서 노동을 하는 인부들의 사진이 실렸다. 담임선생님께서는 그 사진을 가리켜 이렇게 말씀하셨다.

니들도 공부 안 하면, 나중에 이렇게 된다
이 사람들도 얼마나 공부를 못했으면, 쯧쯧

 

그 단원의 주제는 분명,는 아니었다. 담임 선생님은 학습 주제와 전혀 상관이 없는, 허나 우리의 인생과 직결된다고 믿는 주제로 열변을 토하셨다. 그것은 바로, “삽질하지 않는 삶”이란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간 뒤에 돈을 많이 벌고 떵떵거리며 사는 삶이었다

 

 

집안 모임에서의 일이었다

버스로 고속터미널에 가려고 하는데, 몇 번을 타야 하느냐는 한 어른의 질문에 나는 몇 개의 버스노선을 알려 드렸다. 그런데 그 어른은 내게 물었다.

“좌석버스는 없어?

1980년대에는 비교적 편안한 좌석이 촘촘히 배치된 좌석버스와 지금과 같은 일반 버스가 있었다. 좌석버스의 요금이 훨씬 비쌌기에 같은 거리를 가는 버스라면 당연히 요금이 저렴한 일반 버스를 타고 다니는 것이 상식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오히려 더 비싼 버스를 타겠다는 어른의 의중을 이해하기 어려워 물었다. 왜 일반 버스를 타지 않느냐고 말이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노동자냐?

 

일반 버스 승객과 노동자와의 상관관계를 따지기 어려웠으나, 그는 아마도 조금이라도 ‘고급진’ 교통수단을 타야 ‘일반인’과는 달라 보인다고 느꼈을 것이다.

 


 

나의 성장과정에서는 학교와 가정에서 ‘노동’과 ‘노동하는 자’를 폄하하는 태도를 적지 않게 접해 왔다. 나는 그때마다 의아하게 생각했다. 노동은 일을 하는 것이고, 노동자는 일을 하는 사람인데, 도대체 왜 노동과 노동자는 우리에게 부정적인 이미지로 전달되어야 했을까. 그러니까 왜, 노동은 우리가 “하면 안 되는 행위”가 되었고, 노동자는 “우리가 되어서는 안 되는 인물”이 되어 버렸던 것일까. 안타깝게도 나의 성장 과정에서는 이러한 궁금증조차 불손한 대상이 되어야 했다.

나는 그렇게 컸다

 

선생님과 부모님 말씀을 잘 듣고 공부를 많이 해 ‘떵떵거리며’ 사는 윗사람들 중에는 노동을 폄하하는 족속들이 적지 않으며자신이 하는 일은 노동이 아닌 명령이라 믿는 이들이 많다. 노룩패스와 경비원 해고를 비롯한 어이 없는 갑질은 최근에서야 언론에 공개되었을 뿐, 우리의 성장 과정에서는 적지 않게 접했던 일이 아니었을까. 너무 당연한 나머지 “원래 그들은 그렇게 살아야 하고, 나는 이렇게 해야 하는 거라며” 주문을 걸었을 것이며, 또 너무 자연스러운 나머지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는 일이 되었을지도

 

 

한동일의 <라틴어 수업>은 내게 노동에 대해 한참 생각해 보게 했다. 자신을 공부하는 노동자라 명명하는 지식인들이 많은 사회라면, 오늘날 어처구니 없이 일어나는 노동 문제가 조금은 줄어들지 않았을까, 또한 아이들이 자라면서 노동에 대해 올바르게 알아갈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공부해서 남 주냐?

공부해서 잘해서 나중에 큰소리 치고 살아야지

공부 잘하면 나중에 편하게 산다

 

어른들로부터 수시로 들었던 말들이 머릿속을 스친다

그래서 정말 공부를 잘 해버린 아이들은 

제가 공부해 놓은 걸 죄다 자기만 갖을 뿐만 아니라 남의 것도 자기 걸로 만들어 버렸다는,

그러고서도 잘 했다고 떵떵거리며 사는 유치한 인물이 돼 버렸다는

때로는 혼자만 유치해진 게 아니라 전지구적으로 민폐를 끼치는 끔찍한 괴물이 되기도 했다는,

때로는 타인을 해친 죄인이 되기도 했다는,

그러한 이야기를 우리는 오늘자 신문에서도 찾아낼 수 있다

 

동시에, 자신을 공부하는 노동자라 명명한 한동일 스승님과 같은 분이 계셔서 학생들은 제대로 된 교과서로 제대로 된 교육을 받고, 나 같은 외국인 노동자는 나의 노동에 조금씩 의미를 부여하며 하루를 살아갈 수 있었다고 믿는다.

 

내가 잘못 받은 교육에는 아직까지도 A/S가 많이 필요하다

책을 읽는 이유를 굳이 꼽으라면 이 이유를 대야 할 것 같다

*
(82)

 

 

에고 숨 오페라리우스 스투덴스 Ego sum operarius studens 나는 공부하는 노동자입니다.

 

(83)

 그런데 겸손한 사람이 공부를 잘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요? 겸손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정확히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실패의 경험에 대해 지나치게 좌절하고 비관하기 쉽습니다. 이것은 ‘실패한 나’가‘나’의 전부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건 자기 자신을 잘못 알고 있는 겁니다. 일종의 자만이라고도할 수 있어요. 한 번의 실패는 나의 수많은 부분들 중 하나일 뿐입니다. 그것 때문에 쉽게 좌절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 잘못 이해한 겁니다. 우리는 실패했을 때 또 다른 ‘나’의 여집합들의 가능성을 볼 수 있어야 해요.

 

(84)

그러나 ‘열심히’ 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그 순간이 나의 ‘최선’일 수도 있습니다.

 

(87)

 인간이라는존재는 어떻게 보면 처음부터 갈등과 긴장과 불안의 연속 가운데서 일상을 추구하게 되어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과정 속에서 끊임없이 평안과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삶이기도 하고요. 결국 고통이 있다는 것은 내가 살아 있음의 표시입니다. 산 사람, 살아있는 사람만이 고통을 느끼는데 이 고통이 없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모순이 있는 소망이겠지요존재하기에 피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우리는 공부하고 일하며 살아갑니다.

 

(90-91)

저는 공부하는 노동자입니다. 공부라는 노동을 통해 지식을 머릿속에 우겨 넣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을 통해 나를 바라보는 노동자입니다. 그리고 그 사실이 싫지 않습니다. 이 책을 읽고 있는 여러분은 과연 어떤 노동자입니까?

 

(181)

 공부는 무엇을 외우고 머릿속에 지식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나만의 걸음걸이와 몸짓을 배우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177)

 사실 우리의 아픔은 위로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사회구조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한 문제일 겁니다. 그런데기득권을 누리는 사회 일각에서는 자꾸 개인의 문제로 돌려 청년들의 삶을 더 피폐하게 만들어요. 개신교의신학자 라인홀드 니부어(Reinhold Niebuhr, 1892-1971)가 말한 ‘윤리적 인간, 비윤리적 사회’라는말이 시시때때로 간절히 생각납니다. 우리 사회는 어떤 한 개인이 윤리적으로 잘 살고 싶어도 살기 힘든그런 사회가 되어버렸습니다. 불법을 부추기고 합법엔 인내를 발휘해야 합니다. 정직하고 바르게 살면 무능한 것이고 약삭빠르고 초법적으로 살면 능력 있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지금 고통이 턱밑까지 차오는 이들에게 해봐야 전혀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중략) 이들의 울분과 아픔을 근본적으로 해소해주기 위해서 어른들은 위로한 일이 아니라 팔을 걷어붙여야 합니다. 그들이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도와주고 지원사격을 해줘야 해요.

* 본 글은 <조영미의 브런치>에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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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코의 미소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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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글은 <조영미의 브런치>에 올린 내용과 동일함을 밝힙니다. 주소는 다음과 같습니다.

 

https://brunch.co.kr/@youngmicholaf5/63

 

 

 

 

<쇼코의 미소>를 몇 달 전에야 접했다.

일곱 편의 중단편 중에서 네 편이 짧고 긴 외국 생활을 주무대로 했다.

주인공과 그밖의 등장인물들도 외국인이었다.

외국에서 외국인과 생활하는 입장에서

외국인과 외국어로 소통하는 상황,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어색함, 오해, 혹은 이해를 한국어로 풀어낸 작가의 재주에 놀라워했다. 하지만 이 작가의 글을 읽으면 읽을수록 알게 되었다. 내가 이 작가의 글에 끌리는 이유는 <외국 생활> 혹은 <외국인>이라는 키워드뿐만 아니라, 낯선 곳에서 또 다른 나를 만나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려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거울에 보이는 내가 전부가 아니라고,

네가 아는 나도 전부는 아니라고,

그동안 살아온 나는 극히 작은 일부가 될 수도 있다고,

낯선 곳에서 만난 나는,

오늘도 그렇게 말하고 있다.


쇼코의 미소 

(처음

 나는 차가운 모래 속에 두 손을 넣고 검게 빛나는 바다를 바라본다

 우주의 가장자리 같다

 쇼코는 해변에 서 있으면 이 세상의 변두리에 선 느낌이 든다고 말했었다. 중심에서 밀려나고 사람들에게서도 밀려나서, 역시나 대양에서 밀려난 바다의 가장자리를 만나는 기분이라고. 외톨이들끼리 만나서 발가락이나 적시는 그 기분이 그렇게 좋지는 않다고 했다.

(24)

 “쇼코, 쇼코.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그러더니 소유가 왔다고, 한국에서 소유가 왔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방안에서는 작은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노인은 문고리를 돌려 보더니, 안에서 문이 잠겼다고 몸짓으로 말했다. 덥고 습한 날씨였지만 서늘했다. 쇼코는 더 이상 나를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 나는 그냥 쇼코의 가상 친구나 일기장 정도였는데, 쇼코는 그냥 그 일기장에 일기 쓰기를 그만둔 것뿐인데, 일기장 주제에 쇼코의 삶에 개입하려고 했다니.

(중략)

“네가 그리웠어. 

 나는 쇼코가 조금 미워져서 나도 네가 보고 싶었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내가 그리웠었다는 그 말에 눈물이 났다

 어떤 연애는 우정 같고, 어떤 우정은 연애 같다. 쇼코를 생각하면 그애가 나를 더 이상 좋아하지 않을까봐 두려웠었다

 사실 쇼코는 아무 사람도 아니었다. 당장 쇼코를 잃어버린다고 해도 내 일상이 달라질 수는 없었다. 쇼코는 내 고용인도 아니었고, 나와 일상을 공유하는 대학 동기도 아니었고, 가까운 동네 친구도 아니었다. 일상이라는 기계를 돌리는 단순한 톱니바퀴들 속에 쇼코는 끼지 못했다. 진심으로

 쇼코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쇼코에게 내가 어떤 의미이기를 바랐다. 쇼코가 내게 편지를 하지 않을 무렵부터 느꼈던 이상한 공허감. 쇼코에게 잊히지 않기를 바라는 정신적인 허영심.


씬짜오, 씬짜오

(70) 

 응웬 아줌마는 엄마에게 직접 만든 크림을 줬다. 샤워한 후에 꾸준히 바르면 가려움이 줄어들 거라고. 엄마는 아줌마의 크림 덕분에 남은 여름을 수월하게 보낼 수 있었다. 아줌마는 우리가 말하지 않아도 어디가 불편한지 알고 있었고, 배관공을 부르거나 집주인과 이야기 해야 할 때도 나서서 일을 해결해줬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두 살짜리 아이를 붙들고 하루종일 집에 고립되어 있던 엄마의 유일한 말동무가 되어주었다. 엄마를 보면 홀로 투이를 키워야 했던 시간이 떠오른다고. 혼자 그렇게 오래 있으면 자연히 어두운 생각에 빠지게 된다고, 이야기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전화하라고 했다.

(89-90) 

 시간이 지나고 하나의 관계가 끝날 때마다 나는 누가 떠나는 쪽이고 누가 남겨지는 쪽인지 생각했다. 어떤 경우 나는 떠났고, 어떤 경우 남겨졌지만 정말 소중한 관계가 부서졌을 때는 누가 떠나고 누가 남겨지는 쪽인지 알 수 없었다. 양쪽 모두 떠난 경우가 있었고, 양쪽 모두 남겨지는 경우도 있었으며, 떠남과 남겨짐의 경계가 불분명한 경우도 많았다.


한지와 영주 

(136) 

 “아니. 처음에는 그냥 일주일만 머물려고 했었어. 일주일이 이 주일이 되고, 이 주일이 삼 주일이 되고, 나도 내가 얼마나 여기에 있을지 몰라. 학교도 휴학했고, 아무 계획이 없어. 난 스물일곱 살이야.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안 된다는 걸 알아. 

 “왜?” 한지가 물었다

 “도피하는 건 옳은 게 아니니까. 내 삶에 대해서 책임감을 가져야 하니까. 

 “괜찮아, 영주.” 한지가 말했다.  

 충동적으로 여기에 머물기로 한 것도, 네가 해야 했던 일을 내팽개쳐버린 것도, 수도원 생활도 모두. 괜찮아

 그 이야기를 하는 한지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는 표정이었다. 나를 위로하려는 얼굴도 아니었고, 그저 누구나 할 수 있는 빈말을 할 때의 얼굴도 아니었다. 웃을 때조차도 상대방을 의식하는 어른들의 얼굴도 아니었다. 한지의 얼굴은 그저 자연스럽게 풀려 있었다

 대학원이라는 좁은 사회로 진입하면서 나는 사람을 조심하라는 충고를 많이 들었다. 대학원 사람들을 경계하지 않는 내 태도가 굉장히 유아적이라는 것이었다. 특히 여자는 이미지 관리가 중요하다고, 한 번 뒷소문이 퍼지기 시작하면 미래가 없다는 이야기를 나는 밥먹듯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꽤나 그 룰을 잘 따라왔다고 믿었다. 수업과 답사에 적극적이었고 뒤풀이에도 참석해서 늦게까지 웃고 떠들었지만 집으로 가는 길엔 아무 이유 없이 울었다

(164) 

 시간은 지나고 사람들은 떠나고 우리는 다시 혼자가 된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기억은 현재를 부식시키고 마음을 지치게 해 우리를 늙고 병들게 한다

 할머니는 그렇게 말했었다

 나는 그 말을 언제나 기억한다

(168)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내 고통에 대해 시위하고 싶지 않았다.


먼 곳에서 온 노래 

(193) 

율라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어렸다

 “그와 헤어지고 정신 못 차리고 있을 때 미진이 집을 보러 왔어요. 같이 살기로 하고, 밤마다 이 식탁에 앉아 이야기했지요. 미진이 러시아에 온 지 일 년밖에 안 돼 어려운 점이 많을 때였습니다. 내게 도움을 청할 때마다 기꺼이 들어줬어요. 같이 이민국에도 가고 학교에도 가고, 미진이 러시아 말로 설명하지 못하는 부분을 대변인처럼 말해주고. 미진은 내게 고마워했어요.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때 나는 나보다 약한 누군가를 도와주는 내 모습을 좋아했던 것 같아요. 말로는 친구라고 하면서도 내가 미진보다 더 위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너는 나 없이 아무것도 못해, 라고. 미진이 점점 더 러시아 말을 잘하게 될수록, 저의 도움이 필요 없어질수록, 매력적인 친구들과 어울릴수록 미진에게 화가 났습니다. 미진이 내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어요. 넌 아무것도 아니야. 넌 아무것도 아니야. 그게 날 견딜 수 없게 하더군요. 이타심인 줄 알았던 마음이 결국은 이기심이었다는 걸 깨닫게 된 건 미진이 떠난 이후였습니다.

(24)

"쇼코, 쇼코."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그러더니 소유가 왔다고, 한국에서 소유가 왔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방안에서는 작은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노인은 문고리를 돌려 보더니, 안에서 문이 잠겼다고 몸짓으로 말했다. 덥고 습한 날씨였지만 서늘했다. 쇼코는 더 이상 나를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 나는 그냥 쇼코의 가상 친구나 일기장 정도였는데, 쇼코는 그냥 그 일기장에 일기 쓰기를 그만둔 것뿐인데, 일기장 주제에 쇼코의 삶에 개입하려고 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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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어 수업 - 지적이고 아름다운 삶을 위한
한동일 지음 / 흐름출판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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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공부하는 노동자입니다.˝ <라틴어 수업>은 내게 노동에 대해 한참 생각해 보게 했다. 자신을 공부하는 노동자라 명명하는 지식인들이 많은 사회라면, 오늘날 어처구니 없이 일어나는 노동 문제가 조금은 줄어들지 않았을까, 아이들이 자라면서 노동에 대해 올바르게 배워갈 수 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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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백년을 설계하라
박상철 지음 / 생각속의집 / 2012년 11월
품절


책의 앞부분에는 탄생에서 노년까지 그 전형적인 과정을 나타내는 그림이 펼쳐저 있는데, 10년 단위로 나누어 각 시기의 특징들을 설명한다. 방황의 20대, 의욕과 열정이 넘치지만 처음으로 인생의 남은 시간을 확인하는 30대, 능력은 있지만 처음으로 이별을 경험하는 40대 등등. 로타르는 그 그림을 보자 마치 번개를 맞은 듯 찌릿찌릭한 전율이 온몸을 타고 흘렀다고 한다. 자신이 바로 그 시기였던 것이다! 40대 초반이었고 의욕이 급격히 떨어지는 현상을 느끼던 시기였다. 삶의 의미에 회의를 느끼는 시기. 인생의 덧없음을 느끼는 시기. 바로 중년의 위기였다. 그는 그 자리에서 교수직을 그만두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지금은 세계적인 시간관리 강사로, 또 베스트셀러 저자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제2의 인생을 제대로 시작한 것이다.-76쪽

이처럼 삶의 멋을 누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여유가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삶의 여유며 여백이라 할 수 있는가. 먼저 여유롭기 위해서는 육체적으로 불편함이 없어야 하고 정신적으로 다급함이 없어야 한다. 여유가 있으면 사람은 안정을 찾게 된다.

(중략)

가능성을 남겨둔 완벽 직전의 상태가 가장 바람직하며, 인간에게도 바로 그런 점을 요구해 '완전한 것은 하늘이지만 노력할 여지가 있는 것이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다.-2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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