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6:22-35 나는 생명의 떡이다

인터넷을 검색하다 보니 무슨무슨 날이 참 많더군요. 그중 재미있는 것을 골라봤습니다. 1월 1일은 가래떡 데이라네요. 3월 3일은 삼겹살 데이이고, 4월 4일은 클로버 데이이고, 5월 2일은 오이 데이이고, 6월 6일은 고기 데이이고, 8월 8일은 꽈배기 데이이고, 9월 9일은 구구 데이이고, 10월 4일은 천사 데이이고, 11월 11일은 빼빼로 데이이고, 12월 12일은 고래밥 데이라네요. 교회에서 정한 날도 있네요. 최일도 목사님의 다일공동체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되새기기 위해 5월 2일을 밥의 날로 정했습니다. 다일공동체는 2002년 5월 2일에 처음으로 식탁에서 밥을 제공하여 오병이어의 날로 정했다가 일반인에게까지 사역을 확장하기 위해 2007년 5월 2일부터 밥의 날로 정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도 밥과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난 주 말씀을 통해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유월절이 가까운 때에, 헤롯 빌립이 다스리는 갈릴리 호수 동쪽에서, 어린아이의 도시락인 보리 떡(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성인남자 오천 명을 먹이고 남은 조각을 12 바구니나 거두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이 세상에 오실 그 선지라고 믿고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 했으나 예수님은 혼자서 산으로 떠나가셨습니다. 저녁이 되어 제자들은 다시 갈릴리 호수 서쪽에 있는 가버나움으로 갔습니다. 백성들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백성들을 보고 안타까우셨습니다. 백성들이 배를 타고 갈리리 호수 동쪽에서 서쪽까지 따라왔는데 왜 반갑지 않고 안타까우셨는지 26절부터 27절에 나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나타내는 표적을 보고 찾아온 것이 아니라 떡을 달라고 몰려온 것을 보시고 안타까워하셨습니다. 말씀을 들으러 오지 않고 떡을 달라고 왔기 때문에 안타까우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합시다. 썩을 양식.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 썩을 양식은 육신의 양식인 떡입니다. 빵입니다. 우리나라로 하면 밥입니다.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은 영혼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이 백성들에게 썩을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일하라고 하신 것처럼 우리에게 밥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서 일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 알려주셨습니다. 29절을 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예수님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썩을 양식은 열심히 일해서 얻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 다시 말해 예수님을 믿으면 얻어집니다. 썩을 양식은 인간의 노력으로 얻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은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집니다. 여러분, 인간의 노력으로 얻는 것과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지는 것 중 어느 것이 쉬울까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 쉽습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얻는 육신의 양식은 눈으로 보입니다. 힘은 들지만 눈으로 보이기 때문에 믿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지는 영혼의 양식은 눈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힘은 들지 않지만 눈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에 믿어지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으로 보이지 않는 영혼의 양식보다 눈으로 보이는 육신의 양식을 위해 일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썩을 양식을 위해서 일하지 않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서 일하면 손해 볼까 걱정이 되어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일할 수 있도록 표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표적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31절을 봅니다.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가 광야에서 만나를 내려주었듯이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일하면 육신의 양식을 주는 지 궁금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심시키셨습니다. 32절을 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예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이집트)에서 탈출하여 가나안으로 가기까지 40년 동안 하나님께서는 만나를 내려주셨듯이 다시 말해 육신의 양식을 주셨듯이 눈으로 보이지 않는 영생하도록 있을 양식을 위해 일하면 참 떡 다시 말해 진정한 양식을 내려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내려 주시는 참 떡 다시 말해 진정한 양식은 무엇일까요? 35절을 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생명의 떡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영원히 굶주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물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내려주신 만나는 다시 말해 썩을 양식은 먹어도 배고프고 마셔도 목마릅니다. 그러나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은 다시 말해 예수님은 먹으면 배고프지 않고 마시면 목마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만족을 주십니다. 인간은 영과 혼과 육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육체적으로 만족하고 정신적으로 안정돼도 영적으로 갈급하면 불안정합니다. 영적으로도 만족해야 안정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육체적이고 정신적이고 영적인 만족을 모두 주십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6 장을 통해 우리가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선택하면 썩는 양식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공중을 훨훨 날아다니는 새를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새는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않지만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기르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들에 활짝 피어있는 백합화를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백합화는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지만 썩을 양식을 위하여 옷 입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입히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공중의 새도 먹이고 들의 백합화도 입히듯이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우리들을 먹이고 입히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먹고 사는 문제만 염려하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궁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썩을 양식을 위해서만 일하지 않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서 일하면 영혼의 양식도 주시고 육신의 양식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성인남자 오천 명을 먹이고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요6:12)고 말씀하셨듯이 예수님에게 주신 자 중에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기를(요6:39) 바라십니다. 하나님은 나만 잘 믿기보다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시기를 바라십니다. 자녀가 철이 들면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리듯이 교인이 신앙의 깊어지면 하나님의 뜻을 받들려합니다. 하나님은 늘 죽어가는 영혼을 안타까워하십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썩을 양식을 위해 이기적으로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사시겠습니까? 저와 여러분은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살아야 하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큐티와 목회의 실제 - 큐티에서 설교까지
로렌 커닝햄.이동원.하용조 외 지음 / 두란노 / 2009년 7월
평점 :
품절


큐티 세미나의 벅찬 감동을 책으로도 온전히 느낄 수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요 6:1-15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4 복음서에는 35 가지의 기적이 나오는데 오병이어의 기적은 4 복음서에 모두 나오는 유일한 기적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만이 모두 나오는 걸로 보아 이 기적은 여러 기적 중에서도 중요한 기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있기까지 3 사람이 눈에 띕니다.

첫 번째 사람은 빌립입니다. 예수님은 인기스타였습니다. 인기스타가 가는 곳마다 열성 팬들이 몰려들듯이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큰 무리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이 식사도 못하고 몰려오자 마음이 아프셨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에게 음식을 먹이고 싶어서 빌립에게 물으셨습니다.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5절) 예수님은 빌립이 디베랴 호수(갈릴리 호수) 근처인 벳새다에서 살았기 때문에 어떻게 대처하는지 알고 싶으셨습니다. 빌립은 무리들을 둘러보고 사람 수에 빵 값을 곱했습니다. 빌립이 대답했습니다.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1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입니다. 200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200 일 품삯입니다. 미국의 NIV 성경은 노동자의 8 달 봉급이라고 말합니다. 주일을 빼면 200 일은 8 달이 됩니다. 빌립은 무리에게 음식을 먹이려면 노동자의 8 달치 봉급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빌립은 그동안 수많은 기적을 목격했으면서도 신앙적으로 반응하지 못했습니다. 빌립은 계산적인 신앙인이었습니다. 계산적인 신앙인은 수지타산을 맞춰보고 신앙생활 합니다. 자신에게 유리한 지 불리한 지를 따져보고 신앙생활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숫자를 초월하시는 분입니다. 사사기 6-7 장을 통해 미디안 군대가 이스라엘을 쳐들어 왔습니다. 미디안 군대는 바닷가의 모래알만큼 많았습니다. 기드온이 미디안과 싸우고자 군대를 모집하였더니 3 만 2 천 명이 모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군인이 너무 많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전쟁을 하려면 군인이 많아야 유리하잖아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전쟁은 숫자가 아니라 믿음으로 하는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드온은 3 만 2 천 명 중에서 싸움을 두려워하는 자 2 만 2 천 명을 돌려보냈습니다. 만 명이 남았습니다. 기드온은 무릎을 꿇고서 물을 먹는 자 9 천 7 백 명을 돌려보냈습니다. 3 백 명이 남았습니다. 기드온은 3 백 명의 군인으로 바닷가의 모래알만큼 많은 미디안 군대를 격파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군인이 많으면 사람의 힘으로 이긴 줄 알까봐 소수의 군대로 다수의 군대를 격파하시고 ‘하나님의 도움으로 승리하였다’라고 자랑하게 만드셨습니다. 신앙은 숫자 놀음이 아닙니다. 계산적인 신앙으로는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안드레입니다. 안드레는 어린아이를 예수님에게 데리고 와서 말했습니다.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안드레가 여기까지만 말했다면 좋았을 텐데 쓸데없는 말을 덧 붙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9절) 안드레는 어린아이를 데려왔지만 사람 수에 비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턱없이 부족하다고 말했습니다. 안드레도 수많은 기적을 목격했으면서도 신앙적으로 반응하지 못했습니다. 안드레는 믿음이 없는 신앙인이었습니다. 믿음이 없는 신앙인은 끊임없이 의심하며 신앙생활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맞는지 틀리는지 따져보며 신앙생활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의심을 초월하시는 분입니다. 마태복음 14 장을 통해 제자들이 거센 바람과 성난 파도에 휩쓸려 위태롭게 되자 예수님이 물을 밟고 걸어오셨습니다. 베드로는 너무 감격한 나머지 예수님을 보고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오라고 하시자 베드로는 물을 밟고 걸어갔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바람이 불어오자 물속으로 빠지면서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며 나무라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바라볼 때는 믿음이 생겨 물 위를 걸어갔으나 바람이 볼 때는 의심이 생겨 물속으로 빠져갔습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의심하는 자에게 기적을 베풀지 않습니다. 믿는 자에게 기적을 베푸십니다. 기적은 우리의 믿음이란 성냥개비에 하나님의 능력이란 성냥갑이 부딪힐 때 일어납니다. 젖은 성냥개비로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의심하는 신앙으로는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세 번째는 어린아이입니다. 예수님은 배고픈 무리들을 먹이고 싶으셨지만 갑작스럽게 그 많은 사람들을 먹일 돈도 없었고 음식도 없었습니다. 어린아이는 어머니가 싸준 도시락을 안드레를 통해 예수님께 건네 드렸습니다. 비록 어린아이의 한 끼 식사밖에 안 되지만 예수님이라면 배고픈 무리들을 먹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어린아이는 수많은 기적을 목격하고는 신앙적으로 반응했습니다. 어린아이는 과자 하나를 주면 한 봉지를 사주겠다고 해도 망설이는데 하나가 아닌 한 봉지를 준다는 것은 대단한 결단입니다. 어린아이는 헌신적인 신앙인이었습니다. 헌신적인 신앙인은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고 신앙생활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으며 신앙생활 합니다. 하나님은 작은 헌신을 거름으로 삼아 큰 열매를 맺으십니다. 열왕기상 17 장을 통해 이스라엘에 가뭄이 들어 먹을거리가 떨어졌습니다. 가난한 과부는 마지막 식사를 준비하려고 나무를 줍고 있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나타나 마지막 식사를 주면 가뭄이 끊나는 날까지 통의 밀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올리브기름이 없어지지 않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과부는 마지막 식사를 엘리야에게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의 말씀대로 통의 밀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였고 병의 올리브기름이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과부가 한 끼 식사를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는 몇 년 동안 먹을 음식을 주셨습니다.

요즘은 집집마다 상수도가 연결돼 있지만 예전에는 마을에 수동식 우물펌프가 있었습니다. 우물을 길으려면 바가지에 물을 가득 담아 우물펌프에 넣고 펌프질을 하면 공기압력에 의해 우물물이 올라왔습니다. 한 바가지를 부으면 끝도 없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물이 아까워서 한 바가지의 물을 붓지 않는다면 얻을 수 없었습니다. 신앙은 투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한 바가지의 물을 부으면 끝도 없이 되돌려 주십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의 도시락을 받아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고 무리에게 나누어주었더니 성인남자 오천 명이 배불리 먹었습니다. 예수님은 남은 조각을 거두고 하셨더니 열 두 바구니나 걷혔습니다. 무리들은 이 기적을 보고 예수님은 세상에 오실 그 선지라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야라고 생각하고 임금으로 삼으로 했으나 예수님은 혼자서 산으로 떠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6 장 35 절을 통해 오병이어의 기적을 설명하며 예수님은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에게 나아오는 사람은 결코 주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주시는 떡입니다. 우리가 생명의 떡인 예수님께 정성껏 드리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풍성하게 되돌려 주십니다. 차고도 넘치게 되돌려 주십니다. 예수님은 빌립이 어떻게 대처하는지 테스트하셨듯이 우리도 어떻게 대응하는지 테스트하십니다. 우리는 빌립처럼 계산적인 신앙인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안드레처럼 믿음 없는 말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어린아이처럼 자신의 작은 것을 드려 하나님께서 크게 사용하시도록 내어드려야 합니다. 작은 자동차 키가 큰 자동차를 움직이게 하듯이 우리는 작은 헌신을 통해 하나님이 큰 역사를 이루시는 기폭제가 되게 해야 하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엡 2:11-22 둘로 하나를 만드사

1.
유대인들은 사람을 유대인과 이방인 이렇게 두 부류로 나눴습니다. 유대인들은 유대인이 아니면 모두다 이방인으로 간주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 가운데 오직 유대인들만을 사랑하신다고 믿었습니다. 선민의식을 가졌습니다. 유대인들이 선택받은 민족이라고 자부하는 것은 자유였지만 이방인들을 죄인으로 취급하고 경멸하는 것은 문제였습니다. 어떤 유대인은 하나님이 이방인을 만드신 까닭은 지옥의 땔감으로 사용하시려고 만드셨다고 어처구니없는 말을 했습니다. 또 어떤 유대인은 뱀을 밟아 죽이는 것과 이방인을 죽이는 것은 모두 잘하는 일이라고 섬뜩한 말을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선민의식의 표시로서 할례를 행했습니다. 할례는 하나님께 순종하겠다는 다짐이었고,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었다는 표식이었고, 옛 생활을 청산하겠다는 상징행동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할례를 통해 영원히 유대인이 되었다고 인정받았지만 이방인은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고 비난했습니다.

2.
사도 바울은 유대인이었지만 이방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사도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방인들은 메시야를 기다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선민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나라 밖에 있었고, 하나님의 약속에서 배제됐기 때문에 약속의 언약들에서 외인이었고, 죽음 이후의 삶을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에 소망이 없었고, 많은 신들은 있었지만 한 분 하나님이 없었기 때문에 세상에서 하나님도 없는 자들이었습니다.(엡2:12)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의 사이에 베를린장벽보다도 더 크고, 휴전선보다도 더 무서운 장벽을 쳤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께서 땅의 일에 개입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돌아가심으로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있던 이방인들이 하나님과 가까워졌고, 유대인들과도 멀리 떨어져있던 이방인들이 유대인들과도 가까워졌습니다. 예수님의 피가 어떻게 멀리 떨어져있던 하나님과 이방인을 또한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깝게 했을까요? 예수님이 중간에 막힌 담을 허무셨기 때문입니다.(엡2:14) 유대교의 성전은 이방인의 뜰, 여인의 뜰, 이스라엘의 뜰, 제사장의 뜰, 성소, 지성소로 구분되었습니다. 이방인의 뜰에는 이방인들이 거기까지만 들어갈 수 있었는데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이방인의 뜰과 여인의 뜰 사이에는 헬라어와 라틴어로 “이방인은 성소와 구내를 둘러싼 방책 안에 절대로 들어갈 수 없다. 누구든지 그렇게 하다가 붙잡히는 자는 죽음을 당해도 자기의 책임이다.” 라는 경고문이 쓰였다고 합니다.(LABC,117쪽) 이방인은 더 이상은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들어갔다간 살해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돌아가심으로 이방인과 유대인을 구분하는 담이 허물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육체를 찢어 담을 허무셨습니다.

3.
또한 예수님이 십자가에 피를 흘리고 돌아가심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르는데 사용된 유대교의 율법을 폐하셨습니다.(엡2:15) 유대인들은 율법을 엄격하게 준수했는데 율법을 준수하기 위해 수천 개의 규칙과 관습과 계율과 법령으로 세분하였습니다. 율법이 너무 세분되다 보니 율법으로 죄를 깨닫게 할 수는 있었지만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는 없었습니다.(롬3:19-20,7:7-13) 수십만의 유대인들 중에서 고작 6천 명 정도의 바리새인들만이 율법을 지킬 수 있었고 나머지는 율법을 지키지 못해 죄의식을 가졌습니다. 율법은 유대인들을 지켜주는 자물쇠가 아니라 유대인들을 옭아매는 족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돌아가심으로 율법을 완전하게 성취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속죄의 피를 흘리셨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의 피를 흘리지 않아도 되었습니다.(히7:27) 짐승의 피로로 사람들의 죄를 깨끗하게 씻었는데 하물며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는 우리들의 죄를 얼마나 깨끗하게 씻을 수 있었겠습니까?(히9:14)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을 완전하게 성취하시고 율법을 완전하게 폐하셨습니다. 이제부터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할례 받은 무리와 할례 받지 않은 무리라는 구분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육체를 화목제물로 내어주셔서 둘로 하나를 만드셨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로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은 화평이십니다.(엡2:14) 평화이십니다. 중세시대 설교가인 크리소스톰은 어떤 사람이 은으로 된 상과 납으로 된 상을 사랑으로 녹여 금덩어리를 만들었다고 비유했는데 바로 예수님이 은으로 된 유대인과 납으로 된 이방인을 십자가의 사랑으로 녹여 그리스도인이라는 금덩어리를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신하가 왕을 알현하듯이 멀리 떨어졌던 아버지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엡2:18)

4.
그러므로 이제부터 우리는 외국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입니다.(엡2:19) 첫째,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며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우리나라 불법체류자들은 단속반이 나타나면 목숨을 걸고 도망가는데 그러다 다치면 업무상 재해라고 하네요 우리는 예전에는 하늘나라의 불법체류자였으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속죄의 피를 흘리고 돌아가셨기 때문에, 중간에 막힌 담을 허무셨기 때문에 이제는 천국시민권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단속반이 나타나도 도망가지 않고 당당하게 신분증에 보여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우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터를 잡았고 예수님이란 모퉁잇돌 위에 세워진 건물입니다.(엡2:20) 건물은 모퉁잇돌에 정렬하여 모양을 만들듯이 우리는 예수님에게 연결하여 성전을 만들어갑니다. 둘째, 우리는 하나님의 처소요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되었듯이 지상의 교회도 다양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김치가 갖은 양념을 버무려 맞을 내듯이 다양한 사람들을 한데 모아 사랑의 띠를 이루어갑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예전에는 영남과 호남으로 나뉘어 지역갈등을 겪었는데 요즘은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 이념갈등을 겪고 있습니다. 여러 조각들을 한데 모아 퍼즐을 맞추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 맞추어놓은 퍼즐을 여러 조각으로 흩트리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말로는 해방 이후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의 정신과 배치됩니다. 예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로 만드셨듯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우리 사회를 통합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이 목숨을 버려 하나로 만드셨는데 우리가 이해관계 때문에 분열시켜서야 되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인데 싸웠다고 갈라서야하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인데 보기 싫다고 해체해서야하겠습니까? 우리는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서 트러블 메이커가 아니라 피스 메이커가 돼야 합니다. 분열을 조장하지 말고 단결을 촉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둘을 하나로 만드신 예수님을 본받아 접착제가 물건을 단단하게 붙이듯이 뿔뿔이 흩어진 우리 공동체를 단단하게 연결해야 하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EBS 퍼펙트 체크업 중학 수학 8-나 - 2009-2, 2009년 8월 3일 ~ 12월 20일
EBS한국교육방송공사 편집부 엮음 / EBS(한국교육방송공사)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 아이는 티비 중학 강의를 들었는데 

중간고사를 치르고 나서 

퍼펙트 체크업을 사 달라네요. 

이게 학교 시험문제 유형에 더 가깝다네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