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만하 -

  틈을 주무른다. 애절한 눈빛으로 서로를 더듬는 알몸의 포옹이 만드는 캄캄한 틈. 멀어져가고 있는 지구의 쓸쓸한 등이 거느리고 있는 짙은 그늘. 진화론과 상호부조론 사이를 철벅거리며 건너는 순록 무리들의 예니세이 강. 설원에 쓰러지는 노을. 겨울나무 잔가지 끝 언저리. 푸근하고도 썰렁한 낙탓빛 하늘 언저리. 안개와 하늘의 틈.

  지층 속에서 원유처럼 일렁이고 있는 쓰러진 나자식물 시체들의 해맑은 고함소리. 바위의 단단한 틈. 뼈와 살의 틈. 영혼과 육신의 틈. 빵가 꿈 사이의 아득한 틈. 낯선 도시에서 마시는 우울한 원둣빛 향내와 정액빛 밀크 사이의 틈. 외로운 액체를 젖는 스푼.

  존재는 틈이다. 손이 쑥쑥 들어가는 적막한 틈이다.

============================================================

조탁된 언어. 구질구질함도 질퍽임도 없다. 오랜 사유를 다듬은 흔적을 본다. 시인은 의사다. 인상좋은 흰머리의 은퇴한 의사선생님. 그런데 오십년 가까이 시를 써온 시인이기도 하다. 모든 걸 다 가질 수 없다고? 그의 시가 보여주는 완성도를 잘 들여다 보기를....

가장 폐부를 찌르는 부분

' 존재는 틈이다. 손이 쑥쑥 들어가는 적막한 틈이다.'

그래서 이렇게 외로운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