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황한 명동 밤거리를 가로질러 극장 앞에 섰다. 데스크에 물어보니 남은 표가 네 장이란다. 그런데 당일표는 8층까지 올라가서 사란다. 그럼....! 그사이 누가 먼저 올라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냅다 달린다. 데스크 앞에 도착하여 헉헉대며 물으니 달랑 표 두 장 남았단다. 끼유~~~ 간발의 차이로 앞의 몇 분은 놓쳤다.

전도연을 싫어한다. 그렇긴 한데, 연기가 괜찮다는 건 또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고두심 연기야 말 하면 입아픈 에너지 소모다. 박해일... 이 문제의 청년이 얼마나 성장해 갈지 역시 나에겐 중요한 관심사다. 조승우와 박해일이 없다면 우리 영화 미래가 깝깝하다 생각하는 중이다.

그악스런 엄마의 어린 시절을 만나는 이야기. 또 젊은 날의 아빠를 만나는 이야기.

뜬금없이 찾아든 도시 처녀를 경계심도 없이 식구처럼 받아들이는 설정, 동네 사람들이 수군거릴 법도 한데, 아무도 이 도시 처녀에게 신경 안 쓴다는 점이  어색하다면 심하게 어색하지만, '판타지'라는 이름으로 모른 것을 용서받을 줄 알았으려니 하자. 그러고는 엄마와 아빠의 순박하고 고운 사랑이야기의 생생한 목격자가 된다. 이야기만큼이나 따듯하고 고운 섬 풍경이 마음을 뉘고 싶을 지경으로 좋다. 그런데 그 착하고 싱싱했던 청년이 왜 지금의 무기력하고 궁상맞은 아빠가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좀 설명이 부족해 보인다. 착하고 인정 많음=무능  이라는 공식을 깔고서라야만, 그래서 엄마가 억척스러워 질 수 밖에 없었다고 이해하고 되는 것인데, 앞의 공식도 뒤의 결과도 도무지 저 젊은 날의 아름다운 사랑의 후일담으로는 너무 서럽고 그렇다.

내 눈에 확 다가드는 것은 우리 영화의 기술적인 발전이다. 한없이 서정적이고 생생한 자연이 숨쉬는 영화 전체의 화면 속에는, 전도연의 1인 2역, 젊은 날의 엄마와 뒷날의 딸이 마주보고 얘기나누고 안고 같이 걸어가는 장면을 '어? 어떻게 하는거지?'하며 눈을 크게 뜨도록 하는 기술력이 숨어 있다. 외국 영화고 우리 영화고 그런 비스무레한 장면들을 안 봤던 건 아니지만, 내가 본 중 제일이다. 포레스트 검프와  대통령의 만남도 신기하긴 했는데, 그래도 좀 장난친 흔적은 있었다. 같은 사람이 한 두 역할들이 무리 없이 말을 섞고 공간을 나누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것을 신경써야 하는 걸까 생각해 본다. 같은 빛의 밝기, 그림자의 겹침, 같은 음향상태, 시선의 일치...... 거의 완벽하게 하나의 공간에 있는 두 사람으로 표현된 많은 장면들에 심히 놀랐다.

뭐, 기대만큼 근사뻑적지근하지는 않아도, 박해일의 매력이 십분 발휘되지는 않은 것 같아도, 좋은 연기,  마냥 그리워지는 풍경, 가끔씩 터뜨려 준 웃음,  최고의 기술이, 돈이란 시간 아깝단 생각은 안들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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