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시대
보리슬라프 페키치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1월
평점 :
절판


그간의 삶, 종교 없이 지낸 것이 이렇게 다행스러울 수 없다. 종교가 주는 사고의 틀에 갖히지 않은 채 이 책을 만나게 되어서 정말이지 다행스럽고 기쁘다. 이 책은 그런 책이다.

'패러디'라는 어휘가 가지는 다분히 가볍고 표피적인 느낌은,  근간에 우리가 접하는 영화산업 내지 인터넷 매체에서의 '패러디'의 모습에 큰 이유를 두고 있지 싶다. 그닥 긍정적인 냄새가 나지 않는다. 이 책을 최초의 '신약성서 패러디'로 규정하는 것이, 문무를 겸비한 심중 굳은 선비에게 압구정 날라리의 옷을 입히는 건 아닌가 애정어린 우려도 든다.

신의 아들 예수가 이루어낸 수많은 기적과 이적의 행적들. 그것이 현상적으로 놀라운 것이어서 수천년간 모든 사람들이 그것에 놀라고 있어 오던 중, 어떠한 연유로 이렇듯 날카롭고도 뜨끈뜨끈한 가슴과 시선을 가진 작가가 생겨나 우리에게 덥썩 물어 온 것이다. '여보쇼, 그게 진짜 그렇게 훌륭하고 필요한 일들이었던거유?'

'어!' 하고 당황하게 된다. 이 익살스러운 이야기꾼의 재담에 홀려 킬킬거리고 쓴웃음도 짓고 해 가며 쉽게 받아들이지만, 작자의 물음은 날카롭고 분명해서 금새 가슴이 서늘해 진다. 경이로운 현상 자체가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인류를 구하기 위해 왔다는 존재의 행로 뒤에 던져진, 망가진 삶의 질서와 리듬 속에서 어쩔 줄 모르는 이 가엾은 사람들은 어째야 하는가. 어떻게 그럴듯하게 변명되고 미화될 수 있는 것인가.

이 책의 미덕 중 하나는 억지스럽지 않다는 것이다. 대단한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이야기들지만 그것이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사유를 바탕으로 한 것이기에 '그래서 그들은 모두 행복하였다'는 결론의 열 배쯤 되는 설득력을 가지고 뜨끈하게 다가온다.

예수가 이룬 기적들의 결과가 이렇듯 어설플지니, 그가 기적들을 이루게 되는 과정이나 그 됨됨이 자체가 완벽하다면 어불성설일 것이다. 우유부단한 예수, 정답을 알지 못하는 예수, 흔들리는 예수의 모습이 또한 사뭇 진심스럽게 묘사되고 있다. 아울러, 어쩌면 이 책의 진정한 주인공이 아닐까 싶은 유다의 집념과 삶을 다시 감은 눈에 떠 올려 보는 것도 하나의 중요한 의미가 될 것이다.

좋은 번역이 좋은 책을 좋은 책일 수 있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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