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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집 이야기 ㅣ 네버랜드 Picture Books 세계의 걸작 그림책 235
버지니아 리 버튼 지음, 홍연미 옮김 / 시공주니어 / 199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요즘에야 지천에 깔린 게 그림 동화책이지만, 내가 어렸을 적만 해도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림책 자체가 귀했을 뿐 아니라, 좋은 그림책은 더욱더 보기 힘들었던 것 같다.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했던 나도 기억 나는 그림책은 없다. 만화는 몇 권 있지만 말이다. 따라서 내 아이를 위해 어떤 그림책을 고르는 게 좋을까 망설이는 때가 많다. <어린이와 그림책>의 작가 마쯔이 다다시의 말처럼 “그림책을 보는 즐거움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어린이에게 어떻게 제공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는 것이다. 그런 부모님들에게 주는 처방전은 좋은 동화책을 먼저 읽어보라는 것이다.
버지니아 리 버튼의 <작은집 이야기>는 이렇게 그림책이 주는 즐거움을 경험하지 못한 엄마, 아빠에게 좋은 경험을 안겨 줄 만한 책이다. 이 책에서 작가가 다루고자 하는 바는 산업화, 도시화에 따른 비인간화와 소외 문제이다. 엄청 무거운 주제이지만 작가는 이것을 잔잔하고 따스한 수채화풍의 그림으로 나긋나긋 부드러운 목소리로 풀어간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현대사회의 철학적 문제를 그림책 한 권에 녹여낸 작가의 역량에 놀랄 것이며, 그림책이 얼마나 다양하고 풍부한 표현력을 지니고 있는지에 대해 놀랄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의 또 다른 장점은 어린이의 세계를 잘 알고 어린이의 기분으로 그려낸 그림책이라는 데 있다. 어른이 보기에도 어려운 이야기인 이 책을 만 두 살도 안된 우리 아이가 서서히 몰입하기 시작한 것도 ‘어린이가 쉽게 들어갈 수 있는 책’이라는 데 그 비밀이 있다. 작은 집 이야기의 그림을 살펴보면 항상 작은 집의 위치는 변함이 없다. 주변의 풍경은 변하지만, 집은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집 주위의 풍경은 계절이 변함에 따라 달라지고 도시화, 산업화에 따라 급변한다. 아이는 그림의 변화 속에서 스스로 많은 것을 알아낸다.
화창한 봄날에 냇가에서 배를 띄우고 놀던 아이가, 여름이 되면 홀딱 벗고 물장구를 치며, 겨울이 오면 스케이트를 탄다는 걸. 작은 집이 있는 언덕의 사과나무는 꽃을 피우고 울창한 나뭇잎을 틔우다가 가을에 빨간 사과열매를 맺는다는 걸… 계절의 변화에 따른 풍경의 변화와 오밀조밀한 그림 속 이야기에 몰입하던 아이는, 산업화가 진행되면서부터는 자꾸 “작은 집이 어디 있어?”라고 묻기 시작한다. 그 자리에 그대로 있건만 어울리지 않는 주변 환경 때문에 존재가치를 상실해버린 작은 집의 신세를 아는 것처럼 말이다.
아이들은 그림책을 볼 때 이야기 보다는 그림을 통해 더 많은 것을 받아들이곤 한다. 난 그래서 아이들에게 많은 ‘발견’을 제공하는 그림책을 좋은 그림책이라고 생각한다. <사과가 쿵!> 같은 경우 우리 아인 책 중간부터 나오는 초록색 애벌레를 무척 좋아한다. 책장을 넘기면서 계속 애벌레가 이번엔 뭘 하냐고 묻고 그 위치를 추적하는 것이다. 처음 아이가 그런 반응을 보였을 땐 정말 깜짝 놀랐다. 난 그 책을 읽어주면서도 애벌레 따위엔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후로 우리 아이가 좋아하는 책들을 보면 대부분 표현력이 풍부하고, 그림 속에서 다른 많은 이야기 꺼리를 발견할 수 있는 책들이라는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다. 이 <작은 집 이야기>도 마찬가지이다. 처음엔 아이에게 글을 다 읽어주느라 고생도 했지만 이젠 그림을 같이 읽으며 논다. 그림 속의 풍경과 사람들 이야기를 하다 보면, 이야기는 매번 달라지고 또 다른 발견을 하는 색다른 재미가 있다. <작은집 이야기>는 어른에게는 그림책 읽는 즐거움을, 아이에겐 자신만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 즐거움을 맛보게 해줄 좋은 동화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