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낳고 나니 그 전까지는 전혀 생각지도 않던 문제로 고민하게 되는 경우가 생기더군요.
분유를 먹일 것인가 모유를 먹일 것인가, 일회용 기저귀를 쓸 것인가 천 기저귀를 쓸 것인가, 전집을 살 것인가 말 것인가...
지나고 보니 저희 부부는 이러한 문제에 직면했을 때, 항상 소수파적인 선택을 한 것 같습니다.
수유나 기저귀의 선택은 한 번 결정하고 나면 끝나는 문제였지만, 전집을 살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문제는 출판사 판매사원 아주머니들의 방문 덕에 저희 부부를 상당 기간 괴롭혔던 문제였지요.
하지만 그 아주머니들 덕에 전집을 꼭 사야만 하는가라는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고, 전집을 사는 대신 좋은 책을 한권 두권 사모으는 재미를 붙이게 되었으니, 이제는 오히려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제가 전집을 반대하는 이유는 여러가지입니다만, 우선 판매사원 분들의 마케팅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 분들이 이야기하는 걸 직접 들어본 적은 없지만, 아내를 통해 전해들은 바로는 대개 부모들의 불안감과 경쟁심을 자극하는 것 같더군요. "남들 다하는데 이 집 아이만 안하면 뒤처진다"는 식으로요. 그리고 자기들이 판매하는 전집을 사기만 하면 아이를 영재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환상을 심어주더군요. 자신들의 전집 세트가 아이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담고 있고, 그것만 보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비싸긴 하지만 오히려 경제적이고, 아이를 위해서 이 정도는 해줘야 하지 않느냐는 식으로 구매를 권유하는 것 같더라구요.
사실 어릴 때 제대로 된 그림책 한 권 보지 못하고 자란 부모로서는 아이에게 어떤 책을 사줘야 할지 고민도 되고, 이런 판매사원분들의 말을 들으면 넘어가기 쉬운 것도 사실입니다. 그리고 큰 돈 들여 전집을 사고 나면, 아이에게 뭔가 해준 것도 같아 뿌듯할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전 바로 이런 점에서 전집을 반대합니다. 전집을 사준다고 해서 모든 게 해결되는 건 아니라는 거죠. 사람이 책을 읽는 것은 지식을 얻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마음의 양식을 얻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결국 다른 사람의 생각과 감정을 이해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전 아이가 책을 읽어서 영재가 되는 것보다는, 남을 이해하고 세상을 더 잘 인식하고 감정이 풍부한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전집은 다른 사람이 미리 정해놓은 틀에 자신의 아이를 맞추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죠. 그 틀 자체가 우리 아이에게는 맞지 않을 수도 있는데 투자 비용이 만만치 않다보니 일단은 아이에게 전집 읽기를 강요하게 됩니다. 그러나 단행본을 사는 경우는 다르죠. 우선은 엄마 아빠가 이것 저것 고르게 될 겁니다. 그 중에 몇권은 아이가 정말 좋아해서 자주 읽을 것이고 또 어떤 책은 몇번 읽다가 전혀 보지 않을 수도 있죠. 어떤 책은 정말 유명한 작가의 명작이라고 해서 샀는데 아이는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수도 있고, 부모님이 보기엔 별로였는데 아이는 열광하는 책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리고 사놓고 몇달 동안 한 번도 안보다가 어느 때부턴가 열심히 읽는 책이 생기기도 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 아이가 어떤 책을 좋아하는지 알 수 있고, 책을 고르는 과정 자체가 아이와 부모간의 훌륭한 대화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가능하면 일주일에 한번은 아이를 데리고 서점에 간답니다. 삼성역에 있는 반디 앤 루니스에 가는데요... 초등학교 아이들이 어찌나 많은지 정말 놀라곤 합니다. 그 아이들이 서가 곳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책을 읽고 있는 걸 보면 왠지 마음이 뿌듯해집니다. 세살배기 가영이도 이제는 이 책 저 책 둘러보며 자기 나름대로 책을 고른답니다.
그리고 전집은 출판사 입장에서 구색을 맞추다 보니 좋은 책도 있지만 맘에 들지 않는 책도 있기 마련입니다. 작가들의 수준도 고르지 않고요. 대부분의 전집은 낱권 판매를 하지 않기 때문에 좋은 책만 골라서 살 수 없는 게 현실입니다. 그런데 좋은 책을 사기 위해 맘에 안드는 책까지 함께 사야한다는 건 좀 억울하지 않을까요. 요즘은 정말 좋은 단행본들도 쏟아져 나오는데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전집은 책 크기가 똑같다는 게 싫습니다. 글쎄요... 책꽂이에 꽂아놓을 때는 폼나 보일지 모르겠지만 왠지 규격화된 것 같아 재미가 없군요. 그건 아이에게도 그렇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