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랑을 하고 있어
마스다 미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이봄 / 2014년 10월
평점 :
절판


'늘 불안한 마음, 사랑을 하고 있으니까' 이 한 문장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읽는 동안 친구의 일기장을 몰래 훔쳐보는 듯한 기분,

친구와 카페에 앉아서 커피 한 잔 시켜놓고 두런두런 고민을 나누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사랑에 빠진 혹은 빠졌던 여자라면 누구나 공감할 이야기를 소소한 필체로 풀어놓고 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이미 몇 번이고 스스로의 규칙을 깨는 요즘.

이 문자에 대답이 없으면 포기하자.

다음 주말에도 못 만나면 깨끗하게 포기하자.

 

 

......

방금 한 결심조차 끊임없이 무너진다.

도대체 어디서 포기할 거지, 난?

한계선을 아는 것이 두렵지만, 살짝 보고 싶기도 한 자학적 쾌락.

끝이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랑은 이미 완벽하게 끝난 사랑이었다.

 

 

.....

아 전화하지 말걸. 이젠 절대 내가 먼저 전화 안 해.

하지만 그런 맹세는 늘 간단하게 깨져버리지.

 

 

 

....

고백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누가 정한 거야?

되든 안 되든 해보라고?

아니, 운에 맡기듯이 고백하지 않아.

사랑을 그렇게 함부로 대하지는 않아.

 

 

....

'올해도 잘 부탁합니다!'

마지막에 붙어있는 '!'에 살짝 성의가 느껴지지 않아? 그는 내게만 '!'를 붙였는지도 모르잖아?

아무리 작은 것에도 희망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사랑인 것이다.

 

 

 

 

'먼저 좋아하는 쪽이, 더 많이 좋아하는 쪽이 지는 것이다'라는 말의 표현을 개인적으로는 좋아하지 않지만, 어쩔 수 없는 마음을

이 문장만큼 더 잘 표현할 문장이 있을까? 사소한 것에도 의미부여를 하고, 오늘은 나를 바라봐주지 않을까 한없이 기대하게 되는 마음. 마스다 미리는 그런 사랑에 빠진 소소한 여자의 감성을 있는 그대로 풀어놓고 있다. 물론 책에 나오는 모든 에피소드에 공감하지는 못했다. 여자가 있는 남자와 알면서도 사귀는 사이가 된다던가, 나보다 어린 여성이 아닌 연상의 여자에게 남자를 빼앗기면 억울하다던가, 늘 언제든 남자가 부르면 나갈 수 있는 스탠바이하고 있는 자세라던가...누구가의 세컨드, 불륜인 상대라는 것은 개인적으로는 경험한 적도 없고, 그다지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지도 않기에 공감할 수는 없었다.

 

 

그는 나의 과거를 탕감해주었으니까.

조금도 인기가 없었던, 과거의 나. 하지만 이렇게 어른이 되어 이렇게

멋있는 남자와 사귈 기회가 찾아왔다. 비록 영순위는 되지 못하더라도

플러스마이너스 제로가 된 기분.

핸드백에서 콤팩트를 꺼내 파운데이션을 살짝 덧바른다.

그 눈동자에는 새로운 자신감이 숨 쉬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특히 이 부분... 뭔가 남자에게 사랑받고, 관심받을 때만이 자존감이 상승하는 부류의 여성인 것일까?하는 생각도 지울 수 없었다. 개인적으로는 이런식의 자존감 상승방법은 부작용이 크다고 생각하기에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다. 진짜 자존감 상승이 아니라 오히려 스스로를 더 상처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

 

p59의 내용은 아주 오래전 내 일기장 속 내용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짝사랑의 마음을 잘 표현한 내용이 있었다. 혼자 괴로워하고 혼자 슬퍼하고...혹시 이런 날 귀찮아 하지 않을까, 이렇게 말을 건내야할까, 이 정도면 남들이 눈치채지 못하겠지 등등...정작 그 사람은 알아주지도 않는 천길 낭떠러지같은 마음.

 

 

*

 

 

p69역시 공감하면서 읽었다. 제어할 수 없는 마음, '설마 내가 지금 저 남자를 좋아하고 있는건가?' 정말 사소한 것에서 시작된 사랑의 감정.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가랑비에 옷 젖듯이 빠져버리는 감정. 이 감정을 알아차렸을 때의 당혹감과 낭패감 동시에 고개를 쳐드는 설렘. '절대로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결심했을 때는 이미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

 

여자에게는 각자 '약한' 말이 있어서, 듣는 순간 지금까지 아무것도 아니었던 남자가 연애대상으로 승격해버리는 일이 종종 일어난다....특별히 유횩하려고 하는 말도 아니고, 나 혼자 멋대로 유혹당하는 것뿐!

 

얼마 전에 겪은 일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공감했던 부분! 연애대상으로 생각도 안했던 연하의 남자가 내가 지나가는 말로 했던 말을 기억하고 음료를 사올 때나 무슨 일을 할때 무심한 듯 시크하게 챙겨줬을 때! 심장이 곤두박질치는 경험을 했다. 비록 찰나의 순간이고 다시 원상복귀 되었지만 말이다.

 

 

 

*

 

사랑에 빠지고 연애를 하는 것만큼이나 그 마무리 역시 중요하다. 순간의 쓸쓸한 마음으로 로맨틱한 이별의 경험을 가질 기회를 놓쳐버려 후회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별. 어떻게 해야 좋은 이별이 되는 것일까? 

 

 

 

*

 

단순하게 가진 마음 그대로 좋아해, 좋아해 하고 돌진하는 사랑. 불필요한 밀당따위 없는 순수한 마음 그 자체로 연애를 하고 싶다는생각은 누구에게나 있는 모양이다.

 

 

 

*

20대 후반이 넘어가면 늘 듣는 결혼문제. 내게 필요한 사람과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 이 사이에서 소소하게 사랑의 감정을 싹트우며 살고있다는 저자. 백금반지 같은 것은 없어도 내 사랑엔 문제가 없다고 말하는 저자. 왜 늘 연애의 유효기간을 정해두고 살아야하는 걸까? 언제부턴 결혼을 하는거야 시작, 땅!...결혼이든 뭐든 생각않고 그 순간에 집중하는 그런 연애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하나하나에 내 감정의 최선을 다하는 연애.

 

 

불안한 마음도 질투하는 마음도 야속한 마음도 모두 사랑의 형태라고 저자는 말한다. 여러 개의 사랑의 얼굴을 친구에게 털어놓듯이 소소하게 풀어내는 책. 가벼운 마음으로 잡아들었지만, 어느 새 내 사랑의 얼굴은 무엇일까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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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보다 더 재미있는 철학 - 생각하는 10대로 길러주는 철학 이야기 10대를 위한 문답수업 1
왕팡 지음, 곽선미 옮김, 강성률 감수 / 글담출판 / 201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철학이라고 하면 거창하게 느껴지고, 그 용어들도 생소해서 딴 나라 이야기처럼 느껴지고는 한다. 10대를 겨냥해서 나온 책답게 가볍게 소장하며 들고 다닐 수 있는 책이다. 철학사에 굵직굵직한 인물들이 1일 선생님으로 학교에 와서 수업하는 식의, 가상의 철학 학교를 바탕으로 각 철학자의 이론을 풀어나가는 구조로 이야기는 진행된다. 얇은 책 안에 핵심들만 집약되어 있는 듯해서 꽤 만족스러웠다.

 

전에는 책을 읽으면 처음부터 쭉 읽어 내려갔었으나, 이제는 목차를 펴들고 관심이 가는 부분부터 먼저 보는 방식으로 바뀌었다.(때문에 관심있게 본 부분만 리뷰할 듯)

 

이 책을 읽을 때 내 기분이 무저갱을 헤매는 듯한 우울감에 젖어서였는지, '키르케고르 선생님, 죽고 싶을 만큼 우울할 땐 어떡하죠?' 편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쇠렌 오뷔 키에르케고르는 대학교 교양 시간에서 배운 기억이 나는데, 지금 머릿속에 남은 건 명언으로 알려진 한 마디뿐이다. '폭군이 죽으면 그의 지배는 끝나지만, 순교자가 죽으면 그의 지배가 시작된다'

 

 

 

키르케고르는 절망을 3종류로 나누어 구분한다. 자신이 절망에 처한 지를 모르는 무의식의 절망, 절망 속에 빠져 자기 자신을 원하지 않게 되는 여성형 절망, 그리고 절망 속에서도 자신을 증명하고자 하는 남성형 절망. 완벽하다고 믿는 삶이 거부당하면 극단적인 형태의 절망, 복수심에 남을 강간하고 파괴하는 등 양식의 악마의 절망으로 터져 나오기도 한다. 절망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자 하는 이들에게 강력한 자살에의 동기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자신을 잘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의 절망에 비교하면 약한 수준. 자기 자신의 절망을 인식조차 못 하는 상태가 가장 불행하다는 걸까. 계속 행복을 잡으려 애쓰며, 불행 뒤에 찾아올 행복에 희망을 건다. 하지만 실제로 행복을 갈망하는 삶은 진정으로 그들의 것이 되어본 적이 없으며, 진정으로 스스로를 인식하지도 않는다. 행복은 늘 그 자리에 있는데, 여러 가지 상황과 조건들로 재단하고는 늘 불행하다 한다. 나조차도 '앞으로는 좀 더 나아지겠지, 지금이 끝나면 곧 내 자리가 생기겠지...'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는 늘 희망 한 조각을 놓지 못한다. 사실 내 앞에 바로 행복이 놓여있는데, 장님처럼 그 주위만 뱅뱅 돌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여성형 절망은 영원성을 목적으로 한다. 이것은 사랑과도 같은데, 그 사랑의 순간은 영원할 것 같지만 이 또한 변하기 마련이다. 실연한 사람은 상대방과 더불어 자기 자신을 증오한다. 절망이 깊어질수록 자신과 직면하기란 어려우며 자신의 마음을 닫고 절망을 억지로 누르며 스스로 갇히게 된다. 이렇게 살펴보면 절망은 사실 자기 자신에 대한 절망이지 자신 외의 욕망에 대한 절망이 아니다.

 

 

 

남성형 절망을 설명하는 '꿈, 가장 지독한 절망 상태' 한 문장은 모든 것을 함축하고 있는 듯하다. 꿈은 늘 저기서 반짝거리고 있는데, 내가 꿈꾸던 것을 이루기 위해, 혹은 증명하기 위해 늘 자기 자신을 채찍질하여 영원에의 절망의 쳇바퀴를 돌게 된다. 절망 속에서도 이러한 유형은 가장 지독한 절망이라 키에르케고르는 말한다. 스스로 알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못나서라고 자책하며 희망 고문당하는 것. 어쩌면 현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젊은이들의 자화상이 아닐까 싶다. '이 세상에도 내 자리 하나쯤은 있겠지, 이렇게 된건 내가 모자라서야, 조금만 더 하면 저기에 도달할 것같은데...' 등등등 늘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다그치며 살아간다. 이렇게 하다 보면 누군가는 사랑, 지혜 같은 긍정적인 것들과 정직, 청렴 같은 것은 그저 이상일 뿐 돈, 명예, 권력 같은 것들이 우리를 지탱하며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고 한다. 1800년대 사람이 한 말이지만, 곱씹을수록 지금의 상황과 맞아 떨어지는 듯하다. 이 유형의 절망가(?)들은 자기 자신을 포기하지 않기에 그만큼 구조될 확률이 높다한다. 마지막에 이런 상황에서 신이라는 존재가 우리를 위로하고 우리의 본질을 찾을 수 있게 지탱하는 존재라 하며 이야기가 끝난다.

 

 

 

키에르케고르 편에 바로 이어 포이어바흐 '세상에 신은 정말 존재하는 건가요?' 편으로 이어진다. 포이어바흐는 부끄럽게도 이름만 들어본 철학자이다. 맑스의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로도 유명하고 인간 소외에 대해 다루었다는 것 정도 밖에는...이 책을 읽고 나서 키에르케고르와 포이어바흐에 대해 더 알고 싶고 더 읽고 싶어졌다.

 

신의 본질은 인간에게 있으며, 신이 가진 전지전능함은 인간의 이성과 의지가 무한으로 확장된 결과, 종교는 융통성 없고 부자연스러운 자연관이자 자아관이라고 말한다. 종교는 모순 속에 존재한다. 이상과 현실 사이, 희망과 실현 사이 등 인간들은 상상 속의 존재를 통해 그것을 구체화해간다. 신성에서 소외된 인간의 본질이란 무엇인가? 본래 인성을 형성하는, 인간이 가지고 실천해야하지만 그러기 힘든 이성, 의지, 사랑 이런 모든 것이 신이라는 존재에 투영된다. 인간들은 경외심을 신에 대한 사랑으로 표현한다. 신에게 경배드리는 것만이 옳고 절대적이고 순수한 인간의 무언가를 완성한다고 한다. 포이어바흐는 신에 대한 사랑을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옮길 때 비로소 진정으로 인간소외는 극복할 수 있다고 한다. 도덕적 세계, 기도하는 자에서 노동하는 자로, 신자가 아닌 철학자로...

 

현대 사회에서는 늘 가슴 한구석에 무언가가 뻥 뚫려 휑한 마음을 지니고 사는 사람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이 허전함과 외로움을 그들은 그들 나름의 신에게서 채움을 받는다.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게임이 될 수도, 돈이 될 수도 있고 음식이 될 수도 있다. 포이어바흐는 그들 안의 신에게서 눈을 돌려 바깥을 바라보라 말한다.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이들의 주장을 반대한 이들의 주장도 들어보고 싶고 꼬리에 꼬리를 물어 생각할 거리를 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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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 2판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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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김영하의 소설은 속도감 넘치는 단문과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적절히 넘나들며 눈길을 잡는다. 어디선가 들어본 것도 같고, 어디선가 실제로 일어날 것만 같은 이야기들...

 

단편집 제 일 첫 번째 내용은 제목과 같은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는 한편의 블랙 코미디 영화를 본 듯했다. 머피의 법칙에 적용이라도 됐는지 남자는 온종일 불운이다. 그러나 그는 그 와중에도 아침에 엘리베이터에 끼여서 다리만 대롱대롱 나온 남자를 구하기 위한 노력도 잊지 않는다. 현대사회의 냉랭함? 무관심을 묘하게 틀어서 보여주는 단편. 이 외에도 사진관 살인사건, 에도가와 란포의 '인간 의자'가 떠오르던 흡혈귀, 피뢰침, 비상구, 고압선, 왕가위 감독의 2046이 떠오르던 당신의 나무, 바람이 분다 등 흥미로운 단편들로 책은 이루어져 있다.

 

그중에서도 마지막 단편인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는'이 내 눈길을 잡아끌었다. 잃어버린 소리, 폐허를 찾는 프로그램을 담당하는 남자. 남자는 자신이 잃어버린 무언가를 늘 찾아 헤매는 듯 보인다. '저는 달이에요.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어요. 당신이 눈만 감으면 절 보지 않을 수 있는데 왜 저를 불편해하세요?'라고 하는 여자.

 

남자는 여행길에서 달의 존재를 통해 누나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여자로 살아야 했던 잊었던 과거를 찾게 된다. 아니마, 아니무스...남성의 여성적 내적 인격인 아니마를 찾아 떠나는 여정이었을까? 달과의 성관계는 잊고 살았던 또 다른 자신과의 온전한 합치를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달은 어쩌면 자아 의식을 무의식의 심층 '자기'에게로 인도하는 인도자의 역할이었을지도...

 

 

p.280

쿠스코에는 언제 가시나요?

어느 새 그 남자 앞에 기차 안에서 만난 여자가 앉아 있다.

(중략) 갈 수 있을 거에요. 아주 오래 전부터 꿈꿔오던 곳이잖아요. 꼭 가보세요. 그곳엔 신이 사는 호수가 있어요.

그 호수엔 이런 전설이 있다지요. 아주 오래 전 펠리컨 한 마리가 날아와 그곳에 두 개의 알을 낳아놓고 다시 날아갔대요.

세월이 흘러 첫번째 알이 부화되었는데 거기에서 한 남자아이가 태어났지요. 그 남자아이가 나머지 알을 깨뜨리자

그곳에서 여자아이가 나왔대요. 둘은 쌍둥이처럼 닮았다지요. 두 아이는 그 뒤로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아먹으며

자라났는데, 서로 아주 깊이 사랑했다지요. 세월이 흘러 이성에 눈을 뜨게 되었겠지요. 어느 비바람이 몹시 치던 날,

두 아이는 호수 위에 떠 있는 갈대섬 위에서 아주 길고 격렬한 정사를 벌였답니다. 그러자 신이 진노하여 하늘에서 벼락을 내려 그 갈대섬을 태워버렸답니다. 두 사람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여자아이는 물속으로 사라지고 남자 아이만 갈대를

부여잡고 살아났는데 그 사내아이가 너무도 구슬프게 우는 바람에 수많은 새들이 호수에 날아와 함께 울어주었대요.

사내와 새들이 하도 울어대니까 신도 마음이 변하여 자비를 베풀어주기로 했답니다. 신이 사내아이에게 물었어요.

그녀를 원하느냐? 사내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지요. 그 애를 다시 볼 수만 있다면 어떤 것도 감수하겠어요. 신은 고심을 했겠지요. 그래서 신은 죽은 여자아이를 되살려주기는 하였으되 두 사람이 만날 수는 없도록 하였답니다. 그 후로 사내아이는 그녀가 보고 싶을 때면 가만히 호수 위를 들여다본답니다. 그러면 그녀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 사내아이는 자기가 듣고 싶은

이야기를 말합니다. 그러면 그녀가 똑같이 속삭여 주니까요.

 

p.286

옛날, 아주 옛날 중국 황제 시대엔 거울 속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가 지금처럼 단절되어 있지 않았대. 아주 다양한 길이

나 있었다는 거야. 거울 속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는 평화를 지키며 거울을 통해서 서로 왕래할 수 있었대.

그러던 어느날 밤, 거울 속의 존재들이 인간을 공격해 왔다지. 처절한 전투 끝에 인간들은 황제의 신비한 능력 덕택으로

힘겨운 승리는 거둘 수 있었대. 황제는 침략자들을 모두 거울 속에 가둬버리고는 그들에게 인간의 행위를 똑같이 따라서

하도록 명령했대. 하지만 언젠가는 그들도 그 동면상태에서 깨어날 거래. 그러면 네 전설 속의 두 남녀도 다시 만날 수 있게 되겠지

 

쿠스코의 호수에 얽힌 설화와 보르헤스 책에 나오는 중국의 전설이 묘하게 얽혀서 남자와 달의 이야기를 풀어간다.

남자의 여정은 어쩌면 인격의 통합과 분화를 이루어나가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거울때문에나는거울속의나를만져보지못하는구료마는

거울이아니었던들내가어찌거울속의나를만나보기만이라도했겠소

 

나는지금거울을안가졌소마는거울속에는늘거울속의내가있소

잘은모르지만외로된사업에골몰할게요

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반대요마는또꽤닮았소

 

라고 말하는 이상의 거울이라는 시가 떠올랐다. 거울은 만남을 가능하게 하면서도 단절의 존재이다. 호수 속의 그녀 또 다른 나... 호수도 어쩌면 또 다른 거울일지도 모르겠다. 물은 彼岸피안과 此岸차안을 모두 아우르는 곳. 책에 나온 설화와 같이 상실과 재생의 공간이기도...생명은 항상 생애의 마지막인 죽음과 가까운 곳에서 어깨를 스치며 공존한다. 남자의 또 다른 자아, 달이라는 여자는 남자와 항상 공존하는 타나토스, 죽음에의 본능일지도 모르겠다. 아직도 남자의 여정은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과는 달리 앞으로의 남자의 여정은 조금은 달라질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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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척 공주 그림책이 참 좋아 8
최숙희 글.그림 / 책읽는곰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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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여운 그림과 밝은 내용만을 담고 있을 것 같은 이 책은 어른들의 싸움에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있는 아이에 대해 그리고 있다. 아이들은 자신의 마음을 읽어주는 사람을 알아보고 잘 따른다. 아무리 좋은 이야기라도 아이들의 감정을 읽지 않고, 무작정 쏟아내면 그때부터는 좋은 의도가 퇴색되고 만다. 이 책은 아이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이라고 따뜻한 말로 이야기하고 있다.

 

부모님의 싸움에 마음이 아파서 블록으로 마음의 벽을 쌓아가는 공주. 벽을 너무 높이 쌓아서 그 탑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마음을 나누지 못하는 공주.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을 만나서 함께 감정을 공유하고 울음을 통해 감정을 터뜨리자 부모님들이 달려와서 안아주고 보듬어주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어린 시절 나 역시도 부모님이 싸우는 것이 정말 싫었었다. 어린아이에게 부모님이라는 존재는 그 아이의 우주이자 전부인 존재이다. 아이에게는 부모님의 싸움은 그저 단순한 싸움이 아니라 그 자신의 우주가 흔들리는 커다란 위협이자 두려움 그 자체이다. 알게 모르게 우리 주위에는 부모님의 불화 등으로 마음에 병이 생긴 아이들이 많이 있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그렇게 모르는 척 공주처럼 가슴 속에 묻어두고 끙끙 앓다가 어른이 되어서야 고름이 되어 터져 나오는 모르는 척 어른들도 많이 있다.

 

부모님이 싸우는 이유가 나 때문일까? 엄마, 아빠가 헤어지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나는 엄마, 아빠의 사랑으로 태어난 존재가 아닌가? 이런저런 고민을 하며 점점 더 마음을 문을 닫아버리는 아이. 우리 주위에서 볼 수 있는 이유 없이 분노를 표출하는 아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아이 등 모두 상처받고 불안하다는 마음의 표현을 나름의 방식으로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아이들의 마음을 열게 하는 것도,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도 결국 엄마, 아빠의 따뜻한 관심과 보듬음 일 것이다. 자녀를 양육하는 데 부부관계가 미치는 영향, 아이들의 입장에서 마음을 헤아려서 아이가 가지고 있는 마음을 표현할 수 있게 어떻게 도와줘야 하는지 다시 한 번 고민하게 되었다. 그림책이라고 해서 아이만 보는 책이 아니라 온 가족이 같이 읽고 한 번쯤 생각을 해보는 계기가 되는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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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저기까지만, - 혼자 여행하기 누군가와 여행하기
마스다 미리 지음, 권남희 옮김 / 이봄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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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라는 말 한 마디에 바로 마우스 클릭 클릭...여행은 누구에게나 설레는 감정을 주기도 하고, 아련한(?) 추억을 더듬어 보게 만드는 마법의 단어이다.

미친짓도 해볼 수 있고, 평소에는 감춰두었던 나를 개방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나는 이렇게 내 돈으로 부모와 여행을 가는 것으로 또 하나의 인생을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아마 앞으로의 인생에도 자식을 낳지 않을 것이다.

자식이 없다는 것은 먼 미래, 아이와 둘이 여행하는 일도 없다는 말이다.

그래도 아이와 여행을 하는 부모의 기분을 지금의 엄마를 보면 상상할 수 있다.

'부모란 이런 식으로 기뻐하는구나'

나를 여행에 데려가 줄 자식은 없지만, 엄마와 여행을 함으로써 '부모' 유사 체험을 한다.

내가 내 자식과 여행을 한다면 분명 지금의 우리 엄마와 비슷한 느낌으로 기뻐할 것같다.

다른 인생을 상상하는 것도 은근히 재미있다.

-13p-

 

몇 년전 부여로 가는 버스 안에서 초등학생 여자아이와 그 아이의 엄마로 보이는 여자분을 본 적이 있다. 지도를 펴들고 딸과 함께 이곳은 어떨까 어디선 무엇을 먹을까 설레는 마음이 그대로 느껴지는 대화를 들으면서 나도 언젠가는 엄마랑 둘이서 여행을 가리라 다짐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비록 작가는 자신의 엄마를 통해서 유사 체험(?)을 한다해도 실제로 겪는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일 것이고, 어쩌면 평생가도 그 기분은 깨닫지 못할 것이다. 사실 나도 자식을 낳을 거라는 생각은 막연하게 안하고 있기에 작가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진짜...다른 인생, 다른 차원 속의 나는 엄마와 여행을 하고 있을까 또 다른 내 자식과 여행을 하고 있을까...갑자기 궁금해졌다.

 

 

 

그러다 문득 진지한 얼굴로, "이제 가나자와에 올 일도 없을 지 모르겠네." 하고 중얼거렸다.

무심결에 나온 말이어서 갑자기 울 뻔했다.

엄마는 올해 예순여덟 살이다. 그런 대사를 읊을 때가 되었다. 그럴 때 나는 내가 아직 한참 어린아이처럼 느껴진다.

언젠가 엄마와 헤어질 날이 온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

-15p-

 

 

왠지 모르게 울컥했다. 나 뿐만이 아니라 모두에게 엄마라는 존재는 영원의 존재로 느껴진다. 늘 내 옆에 있고, 내가 힘들 때마다 달려와주는...문득 엄마가 내 곁에 없다면? 엄마를 떠나보낼 준비를 해야한다면? 상상이 되지 않는다. 이런 생각을 했을 때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엄마 없으면 나는 어떻게해' ...

나란 자식은 끝까지 이기적이다. 엄마가 없을 때 좌절하고 상실할 내 감정이 감당이 안되서 '엄마 없으면 난 어떻게 해' 라는 생각부터 든다. 이 세상 모든 자식들은 영원히 엄마앞에서는 이기적인 아동이 되나보다. 좀 더 늦기전에 엄마랑 손붙들고 가까운 곳이라도 다녀오고 싶어졌다.

 

 

제일 부러웠던 파트는 핀란드 여행부분...고등학교 때부터 막연하게 언젠가는 핀란드에 가보리라 다짐했던 기억이 있다. 일본에서는 의외로 핀란드 여행이 활발해서 핀에어가 직항으로 개설되었다는 소식을 몇 년전에 들었던 것같은데, 역시나 작가의 여행기에도 빠지지 않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눈의 여왕, 무민, 산타마을...왠지모르게 북유럽으로 가면 나도 동화 속 주인공이 될 수 있을 것같은 기분이 들었었다. 패키지 여행은 개인적으로 선호하지 않는 방식이나, 이 마저도 너무 부럽고 지금 상황에서는 어디라도 떠나지 못하는 사정이 있어서 더 갑갑함을 느낀다.

 

 

 

여행에는 실수가 따르는 법이라고는 하지만,  포기가 되지 않았따. 대체 어떤 요리였을까.

-86p-

 

 

 

여행을 가게되면 언제나 지금 이 순간은 다시 오지 않는 다는 생각으로 모든 것을 후회없이 다 해보려고 노력하는 주의이다. 여행하면 먹는 즐거움 또한 놓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예전에 나도 친구와 함께 여행하다가 가격의 문제로 먹지 못했던 지역 특색 음식이 있었는데, 지금까지도 생각나는 것을 보면 작가도 꽤 후회하고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가벼운 문체로 쉽게쉽게 넘겨 읽을 수 있는 에세이이다. 갓 고등학생 티를 벗고 20대가 되어 자유롭게 떠돌고 싶던 마음에 무작정 학교를 휴학해 놓고 여기저기 떠돌아 다니던 때가 생각난다. 지금도 가끔 여행은 하지만 그때의 기분과 그때의 감정은 다시 들지는 않는다. 정해진 때가 되면 떠나고 싶어서 늘 끙끙 앓았었는데, 이젠 그런 기분도 들지 않고 뭔가 쩌든(?)기분만 든다. 나이도 있고, 여러가지로 발목을 잡는 일들이 많기에 생각할 것이 많아서 인가...'잠깐 저기까지만,'이라는 가벼운 마음을 먹기란 나이가 들수록 쉽지가 않다. 마스다 미리의 여행은 특별할 것은 없다. 읽다보면 우리가, 내 친구가 하는 여행과 다르지 않다. 다만 그냥 잠깐 저기까지만 다녀와보자 하는 마음가짐일까. 머리 터지도록 외울 지식도, 준비해야하는 면접도, 과제도, 고민도 넘쳐나는 때 한번쯤은 다 훌훌 털어버리러 떠나는 기회를 만드는 것도 좋겠다 생각이 든다. 잊고 있던 여행에의 열망이 슬금슬금 고개를 드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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