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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 2판 ㅣ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평점 :
품절
김영하의 소설은 속도감 넘치는 단문과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적절히 넘나들며 눈길을 잡는다. 어디선가 들어본 것도 같고, 어디선가 실제로 일어날 것만 같은 이야기들...
단편집 제 일 첫 번째 내용은 제목과 같은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는 한편의 블랙 코미디 영화를 본 듯했다. 머피의 법칙에 적용이라도 됐는지 남자는 온종일 불운이다. 그러나 그는 그 와중에도 아침에 엘리베이터에 끼여서 다리만 대롱대롱 나온 남자를 구하기 위한 노력도 잊지 않는다. 현대사회의 냉랭함? 무관심을 묘하게 틀어서 보여주는 단편. 이 외에도 사진관 살인사건, 에도가와 란포의 '인간 의자'가 떠오르던 흡혈귀, 피뢰침, 비상구, 고압선, 왕가위 감독의 2046이 떠오르던 당신의 나무, 바람이 분다 등 흥미로운 단편들로 책은 이루어져 있다.
그중에서도 마지막 단편인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는'이 내 눈길을 잡아끌었다. 잃어버린 소리, 폐허를 찾는 프로그램을 담당하는 남자. 남자는 자신이 잃어버린 무언가를 늘 찾아 헤매는 듯 보인다. '저는 달이에요.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어요. 당신이 눈만 감으면 절 보지 않을 수 있는데 왜 저를 불편해하세요?'라고 하는 여자.
남자는 여행길에서 달의 존재를 통해 누나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여자로 살아야 했던 잊었던 과거를 찾게 된다. 아니마, 아니무스...남성의 여성적 내적 인격인 아니마를 찾아 떠나는 여정이었을까? 달과의 성관계는 잊고 살았던 또 다른 자신과의 온전한 합치를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달은 어쩌면 자아 의식을 무의식의 심층 '자기'에게로 인도하는 인도자의 역할이었을지도...
p.280
쿠스코에는 언제 가시나요?
어느 새 그 남자 앞에 기차 안에서 만난 여자가 앉아 있다.
(중략) 갈 수 있을 거에요. 아주 오래 전부터 꿈꿔오던 곳이잖아요. 꼭 가보세요. 그곳엔 신이 사는 호수가 있어요.
그 호수엔 이런 전설이 있다지요. 아주 오래 전 펠리컨 한 마리가 날아와 그곳에 두 개의 알을 낳아놓고 다시 날아갔대요.
세월이 흘러 첫번째 알이 부화되었는데 거기에서 한 남자아이가 태어났지요. 그 남자아이가 나머지 알을 깨뜨리자
그곳에서 여자아이가 나왔대요. 둘은 쌍둥이처럼 닮았다지요. 두 아이는 그 뒤로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아먹으며
자라났는데, 서로 아주 깊이 사랑했다지요. 세월이 흘러 이성에 눈을 뜨게 되었겠지요. 어느 비바람이 몹시 치던 날,
두 아이는 호수 위에 떠 있는 갈대섬 위에서 아주 길고 격렬한 정사를 벌였답니다. 그러자 신이 진노하여 하늘에서 벼락을 내려 그 갈대섬을 태워버렸답니다. 두 사람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여자아이는 물속으로 사라지고 남자 아이만 갈대를
부여잡고 살아났는데 그 사내아이가 너무도 구슬프게 우는 바람에 수많은 새들이 호수에 날아와 함께 울어주었대요.
사내와 새들이 하도 울어대니까 신도 마음이 변하여 자비를 베풀어주기로 했답니다. 신이 사내아이에게 물었어요.
그녀를 원하느냐? 사내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지요. 그 애를 다시 볼 수만 있다면 어떤 것도 감수하겠어요. 신은 고심을 했겠지요. 그래서 신은 죽은 여자아이를 되살려주기는 하였으되 두 사람이 만날 수는 없도록 하였답니다. 그 후로 사내아이는 그녀가 보고 싶을 때면 가만히 호수 위를 들여다본답니다. 그러면 그녀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 사내아이는 자기가 듣고 싶은
이야기를 말합니다. 그러면 그녀가 똑같이 속삭여 주니까요.
p.286
옛날, 아주 옛날 중국 황제 시대엔 거울 속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가 지금처럼 단절되어 있지 않았대. 아주 다양한 길이
나 있었다는 거야. 거울 속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는 평화를 지키며 거울을 통해서 서로 왕래할 수 있었대.
그러던 어느날 밤, 거울 속의 존재들이 인간을 공격해 왔다지. 처절한 전투 끝에 인간들은 황제의 신비한 능력 덕택으로
힘겨운 승리는 거둘 수 있었대. 황제는 침략자들을 모두 거울 속에 가둬버리고는 그들에게 인간의 행위를 똑같이 따라서
하도록 명령했대. 하지만 언젠가는 그들도 그 동면상태에서 깨어날 거래. 그러면 네 전설 속의 두 남녀도 다시 만날 수 있게 되겠지
쿠스코의 호수에 얽힌 설화와 보르헤스 책에 나오는 중국의 전설이 묘하게 얽혀서 남자와 달의 이야기를 풀어간다.
남자의 여정은 어쩌면 인격의 통합과 분화를 이루어나가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거울때문에나는거울속의나를만져보지못하는구료마는
거울이아니었던들내가어찌거울속의나를만나보기만이라도했겠소
나는지금거울을안가졌소마는거울속에는늘거울속의내가있소
잘은모르지만외로된사업에골몰할게요
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반대요마는또꽤닮았소
라고 말하는 이상의 거울이라는 시가 떠올랐다. 거울은 만남을 가능하게 하면서도 단절의 존재이다. 호수 속의 그녀 또 다른 나... 호수도 어쩌면 또 다른 거울일지도 모르겠다. 물은 彼岸피안과 此岸차안을 모두 아우르는 곳. 책에 나온 설화와 같이 상실과 재생의 공간이기도...생명은 항상 생애의 마지막인 죽음과 가까운 곳에서 어깨를 스치며 공존한다. 남자의 또 다른 자아, 달이라는 여자는 남자와 항상 공존하는 타나토스, 죽음에의 본능일지도 모르겠다. 아직도 남자의 여정은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과는 달리 앞으로의 남자의 여정은 조금은 달라질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