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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편안한 죽음 ㅣ 을유세계문학전집 111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강초롱 옮김 / 을유문화사 / 2021년 4월
평점 :
나는 한번도 엄마가 내 곁을 떠나갈 생각이란 것을 해본 적이 없다. '엄마의 죽음은 탄생과 마찬가지로 신화적인 시간의 차원에 속한 것이었다'라고 말하는 보부아르처럼 나에게 있어 '엄마의 죽음'이란 개념은 먼 옛날 전설같은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엄마와 딸의 관계는 쉽게 설명할 수 있으면서도 설명하기 어려운 무엇이 있다. 애증, 사랑, 애달픔, 미움 모든 감정이 섞여있는 복잡한 관계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보부아르가 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당황스럽고 생소한 감정의 변화 과정을 이 책을 통해서 미리 간접경험을 할 수 있었다.
일흔이 넘은 보부아르의 엄마 프랑수아즈는 어느 날 욕실에서 넘어져 대퇴부 골절을 입고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이 때 소화기에 암 덩어리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보부아르와 동생은 엄마를 수술시켜야 하나 말아야 하나, 엄마를 고통스럽게 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어떻게 해야하나 갈등을 겪게 된다. 결국 엄마 프랑수아즈에게 복막염 수술을 한다는 거짓말을 하고 암 수술을 하여 한 달 가량 엄마의 시간을 연장한다. 프랑수아즈는 알고 있었다. 그녀가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그러나 끝없는 삶에의 의지로 병마를 이겨내려 노력했다.
정신이 혼미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엄마가 돌아가신다 해도 마찬가지일 거야"라고 동생에게 말했었다.
이날 밤 이전까지 내가 느꼈던 슬픔은 모두 이해 가능한 범위 내에 있는 것들이었다.
심지어 슬픔에 잠겨 있을 때조차도 정신을 차린 상태를 유지했다. 하지만 이번에 느낀 절망감만큼은 나의 통제를 벗어난 것이었다.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내 안에서 울고 있는 듯했다. 나는 사르트르에게 엄마의 입에 대해, 아침에 본 모습 그대로 이야기했다.
그 입에서 내가 읽어 낸 그 모든 것에 대해 들려주었다. 받아들여지지 못한 탐욕, 비굴함에 가까운 고분고분함, 희망, 비참함,죽음과 대면해서뿐만 아니라 살아오는 내내 느껴 왔을, 하지만 털어놓지 못했던 고독함에 대해서.사르트르에 따르면 내가 더 이상 입을 내 뜻대로 움직이지 못했다고 한다. 내 얼굴에 엄마의 입을 포개어 놓고 나도 모르게 그 입 모양을 따라 했던 모양이다. 내 입은 엄마라고 하는 사람 전부를, 엄마의 삶 전체를 구현하고 있었다.
엄마에 대한 연민의 감정으로 나는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몇년 전 정정하시던 외할머니께서 사고를 당했다. 나는 그때의 엄마를 잊지 못한다. 뜬눈으로 밤을 지샜던 나의 엄마는 아마 보부아르가 말한 이해 가능한 범위를 넘어선 슬픔과 절망감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이 글을 쓰면서 보부아르는 엄마의 죽음, 엄마와의 관계, 설명할 수 없는 절망감 등을 건강하게 받아들이는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프랑수아즈 드 보부아르.
이 이름이 호명되는 순간, 자신의 이름으로 불린 적이 거의 없는, 잊힌 여인에 불과했던 엄마가 한 명의 주체로 새롭게 태어나고 있었다.
엄마의 이름을 불러줌과 동시에 누군가의 엄마가 아닌, 프랑수아즈 개인 그 자체로 인식하며, 그녀의 삶을 인정하는 과정을 통해 나름 엄마의 죽음에의 애도와 예의를 갖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의 엄마도, 이 글을 보고 있는 당신의 엄마도 각자의 이름을 가지고있는 하나의 개인이었는데, 삶의 여러가지 일들을 겪으면서 '나'라는 이름을 잃어가고 있는게 아니었을까, 죽음을 통해 다시 '나'의 이름을 되찾는 것이 아이러니하기도 하지만, 이 세상에 이름없이 왔다가 나의 이름을 되찾고 다시 떠난다는 것은 그 나름의 의미가 있지 않나 생각한다.
엄마의 죽음이란 과정을 함께하며 보부아르는 엄마와 화해한다. 어머니에 대한 애증은 가부장제 속에서 그렇게 살아갈 수 밖에 없던 엄마에 대한 안타까움, 미움, 답답함, 절망감, 혐오라는 감정이 뒤엉킨 평생의 숙제와도 같았을 것이다. 엄마와의 관계 회복을 통해 이러한 모든 감정에 대한 안녕을 고하고, 또한 자신의 엄마처럼 가부장제 속에서 그렇게 살아야만했던 모든 여성들에게 보내는 연민어린 시선이었을 것이다.
언젠가 엄마가 지나가는 말로 불의의 사고를 당하게 되어 뇌사 상태라던가 피치못할 사정이 생기면, 생명연장은 원하지 않으니 편안히 보내달라고 했다. 나는 불길한 소리는 하지 말라며 무시했다. 무심한듯 평온한 그 문장이 내게는 벼락같이 다가와서 순간 감당이 되지 않았었다.
나는 병원에서 가져온 압지 속 가느다란 종이 띠 위에서 스무살 무렵처럼 반듯하게 꾹꾹 눌러쓴 필체로 엄마가 남긴 두 줄로 된 문구를 발견했다. "나는 장례식을 아주 단순하게 치렀으면 한다. 꽃도 화관도 없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기도만큼은 많이 해 주길 바란다."
아주 어릴 적 외할머니와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나의 외할머니는 죽으면 화장(花葬)을 시켜달라 하셨다. 들꽃같던 나의 외할머니는 이른 나이에 남편을 보내고 억척스레 잡초처럼 살아왔다. 죽으면 다시 생전에 좋아하던 예쁜 꽃밭으로 돌아가고싶다 했다.
"돌아가실 만큼 연세를 잡순 거죠"
이 말은 노인들을 슬프게 하고, 또 그들을 유배된 것과 다를 바 없는 상황으로 몰아넣는다. 그런데 자기가 죽을 나이가 됐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나 역시 엄마에 관해서 그런 상투적인 표현을 쓴 적이 있다. 그때의 나는 일흔 살이 넘은 부모나 조부모가 돌아가셨을 때 진심으로 슬퍼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제 막 돌아가신 어머니 때문에 몹시 슬퍼하는 쉰 살가량의 여자를 만났더라면 나는 그 여자를 신경 쇠약증에 걸린 환자로 치부했을 것이다. 우리 모두가 죽을텐데, 여든 살이면 죽을 만큼 충분히 나이를 먹은 게 아닌가, 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그건 잘못된 생각이었다. 사람이 죽는 것은 태어났기 때문도, 살 만큼 살았기 때문도, 또 늙었기 때문도 아니다. 사람은 무언가로 인해 죽는다.
(중략)
인간에게 닥친 일 가운데 그 무엇도 자연스러운 것은 없다. 지금 이 순간 인간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 이는 그 자체로 세상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 하지만 각자에게 자신의 죽음은 하나의 사고다. 심지어 자신이 죽으리란 걸 알고 이를 사실로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인간에게 죽은은 하나의 부당한 폭력에 해당한다.
얼마 전 영어회화 수업 주제로 '죽음과 나이듦'에 대해 튜터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아시아권 튜터는 나와 죽음과 나이듦에 대해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시간은 흘러가고 죽음은 모두에게나 찾아오는 것, 겁내지 말고 하루하루를 후회없이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입장이었다. 서양권 튜터는 죽음과 나이듦에 대해 보부아르가 말하는 것처럼 하나의 갑작스런 천재지변, 폭력과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살만큼 살았다는 말만큼 슬픈 이야기가 없다. 사실 누구나 삶에의 의지는 강렬하다. 보부아르는 엄마의 죽음을 통해 실존에의 질문을 던지고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이 부분에서 나는 다시 한 번 더 서양과 동양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인식 차이를 새삼스레 느꼈다.
153페이지 가량의 분량으로 삶과 죽음, 실존한다는 것의 의미, 엄마와 자식간의 갈등 등 삶의 보편적인 부분을 다루고 성찰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새삼 보부아르의 역량이 뛰어나다고 느끼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