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이 나를 위로한다 - 혼자면 둘이, 둘이면 혼자가 되고픈 당신에게
마리엘라 자르토리우스 지음, 장혜경 옮김 / 예담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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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고독(孤獨)이란 말은 '외롭다'라든가 '쓸쓸하다', '적적하다' 같은 말과 달리 강렬한 포스를 풍긴다. 그것은 뭔가 굉장히 촌스러운 것들을 연상시킨다. 낡은 바바리코트와 떨어지는 낙엽 - 시몬 어쩌고 하는 시도 떠오르고 - 같은 것들. 사람들이 너무 많이 씹어대서 너덜너덜해진 '고독'은 이제 싸구려 다방커피 맛이 난다. '철이'와 '순이'처럼 흔하게 널린 게 고독, 정확히 말하면 고독의 이미지이다. 그 우스워진 이미지 때문에 진짜 고독한 사람들은 종종 조롱거리가 되기도 한다. 지난 해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탤런트 최민수 은거(隱居) 사건이 좋은 예이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옛날 잘나가던 탤런트가 미치광이가 되어간다고 수군거렸다. 한편에서는 연출이라고 손가락질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최 씨에게서 본 것은 광인 아니면 사기꾼이었다. 그들은 최 씨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폭행시비에 휘말렸다고 가족과 세상을 등지고 산중 움막에 들앉는 태도는 대중을 당혹스럽게 하기에 충분했다. 갑자기, '고독' 하니까 최 씨의 사건이 떠올랐다. 이제는 산을 내려온 최 씨가 그때 어떤 심경으로 그런 행동을 했는지는 나도 모른다. 그렇지만 수도자 같은 모양으로 산중 움막에서 명상을 하던 그의 모습은 굉장히 '고독해 보였던 것'이 사실이다. 바바리코트나 낙엽 떨어지는 소리 같은 싸구려 고독 말고 진짜 고독 말이다.

 

 

   잡말이 길었다. - 서평을 쓰다보면 종종 내가 서평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깜박하는 순간이 있다. 헤헤 ^ ^a - 이 책의 저자가 잡말이 많다고 투덜댔지만, 나도 별로 다를 것이 없는 것 같다 (평소에도 말이다). 우리는 왜 잡말, 잔말들이 그리 많은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우리는 잡스러운 소음 속에서 살아가는가. 그리고 갑작스러운 적막감에 놓여지면 무엇을 해야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한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니까, 혼자 살 수 없는 존재니까 . . . . . . 얼버무리는 사람들에게 마리엘라 자르토리우스 - 이하 '마자'라고 하겠다 ^ ^; - 는 일침을 가한다.

 


 외로움은 주위에 아무도 없을 때가 아니라, 사람들과의 관게 속에 있을 때 엄습한다.


 

 

   군중 속 고독. 사회적 동물이니 뭐니 하던 사람들도 분명 공감할 것이다. 사람은 혼자 있어서가 아니라 혼자 있지 못해서 외롭다고 역설하는 마자 씨는 남편과 이혼하고 '혼자' 산다. "혼자 살면 무섭지 않으세요?" 외떨어진 시골 농가에 혼자 산다고 하면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똑같은 말을 던진다고 한다. 사실을 말하자면 나도 책에 대고 똑같은 질문을 했으니까. 마자 씨는 그런 질문을 비웃으면서, 사람들이 진짜 두려워하는 것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혼자 있는 느낌'이라고 받아친다. 마자 씨는 책에서 '고독'은 실제로 혼자 있는 것, 그리고 '외로움'은 혼자 있는 '느낌'이라고 구별하고 있다. 사전적 의미로는 같은 뜻이지만, 마자 씨의 구별법을 따르면서 읽는 것이 책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한다. 실제로 사람들이 인식하는 '고독'과 '외로움'의 '이미지'는 차이가 나기도 하고 말이다. 어쨌든 마자 씨는 수다스러운 '고독 예찬론'을 펼치기 시작한다. 많이 수다스럽다. 마이.

 

 


   내 낡은 오두막은 새근새근 잠든 짐승첢 엎드려 있다.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면 나지막하게 코를 곤다. 바람마저 지는 날, 산속의 고요한 밤은 저 먼 마을에서 건너온 소형 오토바이의 엔진 소리에도 베어 상처가 난다.

 


  

   초반부는 상당히 좋았다. 시골 오두막의 정취와 마자 씨의 차분한 고독이 잘 어우러진 문장이 매혹적이었다. 아쉽게도 그것은 잠깐이었다. 자기의 경험을 살려 '고독'에 대한 정서를 전달하는 초반부를 지나고부터 마자 씨는 추상적인 문장으로 책을 가득 채워나간다. 거기에 더해 '촌스러운 고독의 이미지' 중 하나인 고독고독고독 노래부르는 것 같은 시나 문장들을 인용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그 인용문들은 너무 자주 등장해서 독서의 '흥' - 콧방귀를 말하는 것은 '결코', '절대!' 아니다. 이것은 우리 강아지 전문이다 - 을 깨뜨린다. 약간 산만한 마자 씨의 수다를 읽어내려가면서 나는 이런 생각도 해보았다. '마자 씨가 많이 외로워 보여'.

 

 

  

   고독이든 외로움이든 결국 자기 '마음가짐'에 달렸다는 얘기를 마자 씨는 너무 장황하게 늘어놓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때로는 마음가짐만으로 해결 안 되는 것들이 있다. 혼자 있는 시간을 만들 수 없을 만큼 생계가 바쁜 사람들도 있고, 혼자 있으면 공황발작이 일어나는 신경쇠약 환자도 있다. 몇 백만년 동안 혼자 있어서 고독이라면 지긋지긋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우연히 같은 공원 벤치에 앉게 되어 이야기를 나누었던 한 노신사는 내게 말했다. "다들 죽어버렸다오."


 

   다들 죽어버렸다오. 노인의 한마디는 긴 여운을 남긴다. 최근에 본 인간극장 재방송에서 한때 타짜였던, 지금은 농사 짓고 고기 잡으면서 살아가는 아저씨에게 출소한 옛 동료가 "이렇게 살면 외롭지 않습니까, 형님?" 그러니까 타짜 아저씨가 말했다. 천국을 가든 지옥을 가든 죽을 때는 누구나 혼자 떠나는 거라고. 그것을 깨우치고 나니까 외로움이 별 것 아니더라고. 지금은 아니지만 한때 타짜였던 아저씨가 강에 작은 배를 띄우면서 그런 말을 하니까 굉장히 감동적이었다. 어차피 혼자 태어나 혼자 죽는 것이 인생이니까 고독이든 외로움이든 훌훌 털어버려라, 강요할 생각은 없다. - 책을 읽으면서 나는 마자 씨가 '고독을 강요'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 - (마자 씨의 구별법 대로라면) '고독'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고, 어쩔 수 없이 고독에 처해지더라도 그 시간을 가치있게 보내보자는 것이다. 탤런트 최 씨처럼 산중 은거를 하는 것도, 아침에 일어나 잠들기 전까지 휴대전화를 놓지 않는 것도 자기선택이다. 자신이 불편하지 않다면 굳이 휴대전화를 끄고 고독 속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 고독이 필요한 때에는 각자의 방식으로 즐기면 될 것이다. 어느 광고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인상적인 문구가 있어 메모를 해두었다. "우리는 자신과 얼마나 대화를 나눕니까? 우리는 언제나 자신과 싸워 이기려고만 합니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마자 씨는 아마 이런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자신과의 대화 시간이 귀하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려주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데 마자 씨는 자신과의 대화를 조금 더 해야 할 것처럼 보였다. 물론 마자 씨가 책에서 틀린 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너무 잡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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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진 사람들
아리안 부아 지음, 정기헌 옮김 / 다른세상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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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살 인구가 날로 급증하고 있다는 뉴스를 접하면서도 나는 대체로 무감하다. 사람들은 씹었던 껌을 훅 뱉어내는 것처럼 무심하게 다른 사람의 죽음을 이야기하고는 이내 잊어버린다. 나도 그들도 자살 문제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것은 아니다. 죽음을 껌으로 알지도 않는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자살 - 어떤 죽음이든 - 에 큰 상처를 받지 않는 것은 그것이 '다른 사람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물론 충격적이지만, 우리 삶을 뒤흔들 만큼은 아니다. 뉴스에 나오는 그들 '자살한 사람들'은 우리 삶과 무관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에, 이런 일은 상상도 하기 싫지만, 그것이 내 가족의 일이라면 상황은 크게 달라질 것이다.



 

   1월의 아침, 스무 살 청년이 아침햇살을 가르고 추락한다. 몸뚱이가 유리처럼 깨어진다. 청년의 죽음과 동시에 남은 가족들의 마음과 일상에도 금이 가기 시작한다. 아리안 부아의 『남겨진 사람들』은 가족 구성원의 죽음 - 자연사가 아니라 자살이다 - 이후 남겨진 이들이 겪는 위태로운 일상을 적나라하게 그려낸다. 

 


  그러고 싶진 않지만 겁이 난다. 모든 게 무섭다. 아이가 학교에서 가는 길이 걱정되고 자연학습을 떠나는 것도 걱정이 된다. 아이가 아동 성추행범이라도 만날까 봐 걱정이 된다. 일단 집안에 불행한 일이 생기면, 그 불행은 마치 회오리바람처럼 집안을 돌아다니며 다른 희생자를 찾는 것이다. 그 1월의 아침 이후, 로라는 다음 차례를 걱정하고 있다. - (책에서)


 

  사랑하는 아들, 형, 동생을 잃은 가족들은 큰 충격과 슬픔, 자책감 속에서 허우적거린다. 누구도 죽음을 입에 올리지 않고, 죽음을 떠올리게 할 만한 어떤 언행도 스스로 금한다. 가족 구성원의 '죽음'은 그러나 어디서든 그들을 무너뜨린다. 입 안에 생긴 궤양처럼 한시도 잊을 수가 없다. 음식물을 씹을 때는 물론 혀끝이 살짝 스치기만 해도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아프다. 그들의 상처는 깊어가고 서로에 대한 알 수 없는 분노와 원망으로 마음의 벽이 높아진다. 사랑하는 아들, 형, 동생 - 드니 - 를 마음에 품고 그들은 각자의 집에 틀어박힌다. 한순간에 한 가정이 붕괴된다.

   


   "여보." 피에르가 속삭인다. "우리도 살아야 하잖아. 살아 있는 척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사는 거 말이야." "당신은 이해 못 해요. 그냥 못 하겠어요. 그뿐이에요." "마음 가는 대로 자신을 좀 내버려둬 보는 건 어때?" "만약 내 마음 가는 대로 내버려뒀다면" 그녀가 잇 사이로 내뱉듯 말한다. "아마 벌써 그 자리에서 무너졌을 거예요." 피에르에게 갑자기 피로가 몰려온다. 슬퍼하는 것에도 어지간히 지쳤다. 오늘과 같은 날들이 앞으로도 계속 이어지게 될까? 피에르는 섬뜩한 기분에 몸서리친다. - (책에서)





 

 

   "엄마, 형은 언제 죽는 게 끝나?" 형의 장례식장에서 아홉 살 난 알렉상드르가 던지는 질문은 의미심장하다. 자식을 잃은 도비녜 부부와 동생을 잃은 디안은 '드니'의 죽음을 쉽게 인정하지 못한다. 그들 삶에 뚫린 어둡고 커다란 구멍 앞에서 어쩔 줄 몰라한다. 구멍을 못 본 체하거나 아니면 그 안으로 들어가 몸을 숨겨버린다. 장례식은 끝났지만 '드니'의 죽음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이때 알렉상드르의 '가출'은 흩어졌던 이들 모두를 하나로 묶어준다. '형처럼 날고 싶어서' 에펠탑에 올라가고 싶었다는 아들 앞에서 그들은 정신이 번쩍 든다. 그들에게는 '죽음'이 아니라 '삶'이 남아있다는 것을 알렉상드르의 '종이날개'는 깨우쳐준다.

 


   "알렉상드르, 겉으로는 잘 안 보였지만 형은 몹시 불행했어…… . 사람들은 때로 너무 슬퍼서, 그 슬픔을 주체할 수가 없어서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한단다. 네 형도 그렇게 죽은 거야." - (책에서)


 

   이들의 슬픔을 지켜보면서 나는 고다르 감독의 '미치광이 삐에로' 마지막 장면이 자꾸 떠올랐다. 마리안의 죽음 앞에서 페르디낭은 자신의 얼굴에 푸른색 페인트를 아무렇게나 칠하면서 울부짖는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 앞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과 비통함만이 남은 그 남자를 보면서 전율했었다. 순간적이나마 허구적 인물의 슬픔을 공유했던 것 같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살아남은 사람들'의 '죽음 같은 삶'이 이어지는 내내 나는 가슴이 답답했다. 끝까지 숨막히는 삶이 이어졌다면 책을 펼친 것을 후회했을지도 모른다. 다행이다. 아리안 부아의『남겨진 사람들』은 '같은 추억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슬픔을 극복해내는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의 힘이 무섭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사랑의 양면. 파괴성과 치유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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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인의 명사 이순신을 말하다
김성수 외 지음 / 자연과인문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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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시 이순신이다. <9인의 명사 이순신을 말하다>는 다양한 시각으로 충무공을 살피고 있다. 그들의 토양은 현재다. 그래 서 주된 서술은 이순신에 대한 칭송과 숙연한 마음을 드러내는 어조로 일관되고 있지만, 현실에서 그와 같은 인물 없음에 한탄하는 듯한 어조 역시 느껴진다. 9인의 명사가 누구인지를 먼저 살펴야 이 책의 취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약력을 살핀다. 집필 구성원의 성격이 확연히 드러난다. 소설가 송우혜 씨를 제외한 다른 분들은 변호사, 판사, 예비역 중장(전 육군사관학교장), 전 해군작전사령관, 정수장학회 이사, 새만금위원회 위원 등이다.

 

  "마침 이러한 중요한 시기에 <이순신리더십연구회>에서 사회 각계각층에서 본연의 직을 수행하면서도 본 연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계신 아홉 분의 글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엮게 된 것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 기회에 <이순신리더십연구회>를 간단히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발간사)

 

  <이순신리더십연구회>는 경영학의 접근방법으로 21세기형 CEO로 충무공을 평가, 강의하던 지용희 교수의 주도로 발족한 것이라 한다. 연구단체로서 2004년에는 회원이 100여명, 세미나, 전적지 유적지 답사, 대학생수련회 개최등의 활동을 수행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단체가 있다는 것은 전연 몰랐다. 사회성이 뒤처지는 탓도 있지만, 아무튼 이미 충무공은 귀에 박힌 못이 녹슬 정도로 지속적으로 들어오고, 다양한 서적이 출판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물론 주위에는 충무공의 전적지를 살피며 그의 공을 기리는 것에 만족하는 분들도 꽤 있다. 극화로 방송에 장기간 방영되면 한 회도 빠뜨리지 않고 찾아 시청하는 분들도 있다. 나 역시 충무공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안다고 생각했지만, 최근 몇 해 들어 읽어본 책들 속에서 남해안을 줄곧 다녀왔으면서 곳곳에 충무공의 흔적이 남아 있고, 구전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 때 낯부끄럽고, 반대로 자랑스럽기까지 하다.

 

  <이순신리더십연구회> 주간으로 엮은 <9명의 명사 이순신을 말하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관점으로 충무공을 바라보고, 본받으려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책 읽기 전에 목차를 살피면서 예상했지만, 지금 우리는이라는 의문을 끊임없이 던지고 있는 책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충무공의 행적을 왜곡, 혹은 부족하게 다루지는 않는다. 좀더 상세 파고들어 충무공의 혼을 느끼고 싶은 부분도 때때로 발견하기도 한다. 난중일기의 훼손 부분에 대한 이야기는 특히 그랬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기실 전혀 모르는 것보다 못한 때가 종종 있다. 내 고장의 문화유적지를 새로이 살필 때 나는 얼마나 난감했는지 모른다. 더 난감했던 일은 나뿐 아니라 주위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이 사는 고장에 대해서 완전히 무지하다는 것이다. 남도 해안과 내륙에 얽힌 전설과 신화, 민담을 하나하나 살필 때 역사를 볼 수 있다. 충무공의 혼을 관할 행정구역장들이 "우리 고장이야말로 충무공의 고장이오!" 하며 망발의 남발하는 것은 아예 귓등으로 흘려야 한다. 귀를 씻어내야 한다. 전적지, 유적지를 살피는 것은 실제 경험을 동반하기 때문에 충무공의 얼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곳에 내가 살고 있다. 국민과 무관한, 역사와 무관한 행정구역의 무분별한 관광사업보다는 이 책 한 권이 충무공과의 만남을 더 살풋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는 것, 의심치 않는다. 참 좋은 시간이었다. 충무공의 흔적이 아직도 여전한 남도에서 살면서 이제 하나하나 그에 대해서 알아 간다는 것이 날로 새롭고, 신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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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돌 그 찬란한 구들문화 - 자랑스런 우리의 문화유산, 개정증보판
김준봉.리신호.오홍식 지음 / 청홍(지상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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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들장하면, 정겹다. 지금이야 어디 볼 수 있을까 하지만, 있다. 아직도 구들장이 남아 있고, 어느 노부부의 황혼을 달래는 따스함이 장판 아래에 깃들이고 있다. 그러나 그 흔적만은 여전하다.  비록 구들장의 은은하고 웅근한 온기와 직결되는 이미지를 찾아보기 힘들 뿐, 여전히 구들장은 우리 삶 속에서 생명력을 과시하고 있다.

 

  나는 오래 전에 잊었던 그 온돌이, 또 황토가 지금은 사람들이 애써 찾아가 반기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니다. 새마을 운동에 몇 개년 '갱'제 계획으로 깡드리 짓밟았던 우리 문화가, 사실 그때는 우리의 것을 문화라 칭하지 않았으니 오히려 지금 우리의 것이 각광 받는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울 따름인데, 유구한 역사에 걸맞은 문화는 형태를 바꾸어가며 자생하고 있다.  황톳길을 시멘트로 들이붓던 광경을 목격하시던 어르신들이 지금 황혼을 등에 지고서 소줏잔을 입에 털어넣는다. 그들은 먼 발치서 나는 본다.  안타깝다, 안됐다는 생각이 아니다. 나와 그 소줏잔 하나 털어넣을 수밖에, 그 이외에 할 수 있는 일은 담벼락 대고 상소리 하는 것뿐 달리 도리가 없는 것으로, 무기력해진다.

 

  <온돌Ondol 그 찬란한 구들문화>는 먼저 '온달'을 상상케 한다. 자주 나는 이렇게 멋대로고, 어쩌면 내가 멋대로가 아니라 내 사고작용이, 딱히 어떻게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 그렇게 멋대로 널을 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책 어느 부분에는 온돌, 구들장에 관한 역사적 고찰이 있기 때문에 고구려, 발해조의 서술부에서 아마도 나는 온달을 생각해 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온달 이야기의 상승구조를 꿈꾸고 그 비극에 안타까워하는 민중의 마음을 욕심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아무것도 아닐 수도, 그냥 표기의 유사성에서 미친 도발적인 연상작용이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 이 책은 단순히 온돌의 어떤 장점에만 국한되어 서술하고 있는 책이 아니다.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특히 우리 문화를 다시 조명하면서 우리가,  내가 좋아하지만 미처 알지 못한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게하고 아울러 통찰까지 제시해준다. 즉 <온돌 그 찬란한 구들문화>는 온돌의 유래, 구조, 역사, 그리고 현재 변형된 온돌을 살피면서 내일을 기약하고 있다. 서술방식은 학위 논문에 가깝다는 인상을 받지만, 적절한 사진매체와 시각화 자료 덕분에, 그리고 큼직한 활자와 널찍한 행간격 덕분에 읽기는 어렵지 않다. 가독성이 있고, 다행히 판독성도 있는 책이라 할 만하다.

 

   많은 이야기가 듬직한 책 속에서 또아리를 틀고 있지만,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도록 즐거웠다. 설명조의 글에서 나는 오히려 중후한 정서적인 글을 맛본 느낌이다. 이불속 할머니 다리 밑을 파고들면서 구미호 이야기를 해달라 마구 조르던 그때를 나는 떠올린다. 할머니는 지금 흙벽이 되어 바람을 온몸으로 받고 계실 것이다. 어느 집 구들장에 온돌로 다시 숨을 쉬고 계실지도 모른다. 나도 곧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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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 2012-06-08 2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죄송하지만...온돌의 유래를 알수 있을까욤?
 
2009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시
정진규 외 지음 / 작가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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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편을 읽었고, 또 2008년도 분명 읽었을 것이다. 기억하지 못하는 것에는 의식이든 무의식이든, 하나의 선택이 갈피표처럼 끼워져 있을 것이다. 시, 특히 한 해를 채워놓은 시선집을 읽는 것은 재미있다. 흥미롭다. 읽다가 덮어두어도 다시 펼칠 때 썩 죄책감도 없는 것이 시집이다. 중간부터 다시 펼쳐, 상쾌함으로 다시 읽는 행위에는 면죄부가 놓여 있다. 돈을 얼마나 더 줘야 우리는 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한때 서구에서는 면죄부를 발행했고, 돈 주고 그 행위에 동참하던 사람들, 어쩌면 위안을 받지 않았을까, 어렴풋, 막연하게 예상해본다. 2000년도 이제, 곧 2010년대로 넘어갈 이 무렵에 나는 시가 철저하게 외면 당하는 시기에, 시를 찾는다. 동화를 찾는다. 그리고 초등1,2년생이 쓰는 일기장을 구입했다. 비로소 알았다. 나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야 면죄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미해결문제, 유년의 어느 시점으로 나는 돌아와 있다.

   2009년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시는 너무 힘든 날,힘들게 읽었고, 몇 번 책을 잃어버리고, 다시 찾고, 만행이다. 그러면서도 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족쇄, 책을 읽고 싶었다. 봄날은 책을 읽지 못하고 훌쩍, 그렇다고 하던 일을 매조지하지도 못한 채, 그렇다 나는 봄을 잃었다. 어린 날, 지금보다 조금 더 어렸던 날, 몇 년 전 나는 왜 이렇게 시간이 가지 않습니까, 마른 하늘에 벼락이라도 떨어져 뇌를 터뜨리기를 바라는 마음에 원망과 저주, 그리고 자학을 했었다. 하지만 천지개벽도 없었고-이미 있었는데 나는 모를 뿐일지도- 나는 여전히 유사한 일상을 영위하고 있다. 2009년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시는 그러한 날들이 조금 큰 변동을 일으킨 어느 시점에, 그렇게 나는 이 책을 만났다고 기억할 것이다. 책과 상관 없는 메모를 열심히 하면서, 나는 내 삶을 저주했다. 나는 나의 못남에 대해서 원망도 아니고, 칭찬도 아니고, 그렇다고 뭉건한 그것도 아닌 것이 참 희한한 몸부림을 쳐댔다.

   시가 무엇인가. 인간은 모두가 시인(아이)으로 태어나 성장과 동시에 시를 잃어버린다. 동심은 시가 아니다. 동심을 가진 그 아이가 시이다. <2009년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시>는 내가 원하는 그런, 내가 바라마지 않는 시를 찾기는 제법 어려웠지만, 더께를 들어내면 그 속에는 아이들 뛰노는 황혼녘, 그 아슴한 메아리, 어미가 밥 처먹으라 부르는 소리를 찾기 어렵지 않다. 그렇다. 나는 돌아가고 있다. 거대소설에서 진을 다 빼고, 이제는 단편조차 읽을 여력이 없어서 나는 어쩌면 시를 찾아, 그 광활한 울타리 속에서 널뛰고 있나 보다. 또출네의 발광처럼 나는 밤낮없이 이성과 먼 생활이다. 시는 그것을 보듬어 준다.

  <2009년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시>는 구성에 큰 변화가 없다. 그렇지만 몇 차례, 벌써 3년이다. 3년 동안 이 시선집을 읽으면서 나는 안도감을 느낀다.

  내가 시인 되어 내가 쓴 시가 널리 읽힌다면, 나는 무서워할 것이다.  칭찬에 불안해 하는 성정이 무엇인지, 어디서 기인하는지에 대해서 심리학에서는 자세히 다루지만, 지적하기보다는 '보여주기' 방식이 더 감정을 끌어올리는 '마중물'이 된다. 그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시 한 편 읽어보자. 읽고 난 뒤 내가 대단한 것이다. 시를 읽는 행위의 주체는 '나'이다. 시가 대단한 것이 아니라, 지금 시를 읽은 '나'가 워낙에 대단한 것이다. 봄날이 갔다. 이 책을 읽던 한 철이 가고,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성장하고 있을 것이다. 비록 육체의 성장기는 노화로 진척이 되고 있지만, 행과 불행의 갈림길에서 수도 없이 바장이는 이 몸뚱이는 자꾸자꾸 커서, 잭과 콩나물의 식물처럼 성장할 것이다.

 

  시를 읽자. 거기는, 내가 잊어버린 언어들이 있고, 내가 찾아야 할 '나'가 도사리고 있다. 그러나 의무감으로 읽는 것보다 자연스럽게, 언젠가 팔자가 허락하면 시를 허락하는 시간이 있을 것이다. 당혹스럽지만, 감미로운 '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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