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남겨진 사람들
아리안 부아 지음, 정기헌 옮김 / 다른세상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자살 인구가 날로 급증하고 있다는 뉴스를 접하면서도 나는 대체로 무감하다. 사람들은 씹었던 껌을 훅 뱉어내는 것처럼 무심하게 다른 사람의 죽음을 이야기하고는 이내 잊어버린다. 나도 그들도 자살 문제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것은 아니다. 죽음을 껌으로 알지도 않는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자살 - 어떤 죽음이든 - 에 큰 상처를 받지 않는 것은 그것이 '다른 사람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물론 충격적이지만, 우리 삶을 뒤흔들 만큼은 아니다. 뉴스에 나오는 그들 '자살한 사람들'은 우리 삶과 무관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에, 이런 일은 상상도 하기 싫지만, 그것이 내 가족의 일이라면 상황은 크게 달라질 것이다.
1월의 아침, 스무 살 청년이 아침햇살을 가르고 추락한다. 몸뚱이가 유리처럼 깨어진다. 청년의 죽음과 동시에 남은 가족들의 마음과 일상에도 금이 가기 시작한다. 아리안 부아의 『남겨진 사람들』은 가족 구성원의 죽음 - 자연사가 아니라 자살이다 - 이후 남겨진 이들이 겪는 위태로운 일상을 적나라하게 그려낸다.
그러고 싶진 않지만 겁이 난다. 모든 게 무섭다. 아이가 학교에서 가는 길이 걱정되고 자연학습을 떠나는 것도 걱정이 된다. 아이가 아동 성추행범이라도 만날까 봐 걱정이 된다. 일단 집안에 불행한 일이 생기면, 그 불행은 마치 회오리바람처럼 집안을 돌아다니며 다른 희생자를 찾는 것이다. 그 1월의 아침 이후, 로라는 다음 차례를 걱정하고 있다. - (책에서)
사랑하는 아들, 형, 동생을 잃은 가족들은 큰 충격과 슬픔, 자책감 속에서 허우적거린다. 누구도 죽음을 입에 올리지 않고, 죽음을 떠올리게 할 만한 어떤 언행도 스스로 금한다. 가족 구성원의 '죽음'은 그러나 어디서든 그들을 무너뜨린다. 입 안에 생긴 궤양처럼 한시도 잊을 수가 없다. 음식물을 씹을 때는 물론 혀끝이 살짝 스치기만 해도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아프다. 그들의 상처는 깊어가고 서로에 대한 알 수 없는 분노와 원망으로 마음의 벽이 높아진다. 사랑하는 아들, 형, 동생 - 드니 - 를 마음에 품고 그들은 각자의 집에 틀어박힌다. 한순간에 한 가정이 붕괴된다.
"여보." 피에르가 속삭인다. "우리도 살아야 하잖아. 살아 있는 척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사는 거 말이야." "당신은 이해 못 해요. 그냥 못 하겠어요. 그뿐이에요." "마음 가는 대로 자신을 좀 내버려둬 보는 건 어때?" "만약 내 마음 가는 대로 내버려뒀다면" 그녀가 잇 사이로 내뱉듯 말한다. "아마 벌써 그 자리에서 무너졌을 거예요." 피에르에게 갑자기 피로가 몰려온다. 슬퍼하는 것에도 어지간히 지쳤다. 오늘과 같은 날들이 앞으로도 계속 이어지게 될까? 피에르는 섬뜩한 기분에 몸서리친다. - (책에서)
"엄마, 형은 언제 죽는 게 끝나?" 형의 장례식장에서 아홉 살 난 알렉상드르가 던지는 질문은 의미심장하다. 자식을 잃은 도비녜 부부와 동생을 잃은 디안은 '드니'의 죽음을 쉽게 인정하지 못한다. 그들 삶에 뚫린 어둡고 커다란 구멍 앞에서 어쩔 줄 몰라한다. 구멍을 못 본 체하거나 아니면 그 안으로 들어가 몸을 숨겨버린다. 장례식은 끝났지만 '드니'의 죽음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이때 알렉상드르의 '가출'은 흩어졌던 이들 모두를 하나로 묶어준다. '형처럼 날고 싶어서' 에펠탑에 올라가고 싶었다는 아들 앞에서 그들은 정신이 번쩍 든다. 그들에게는 '죽음'이 아니라 '삶'이 남아있다는 것을 알렉상드르의 '종이날개'는 깨우쳐준다.
"알렉상드르, 겉으로는 잘 안 보였지만 형은 몹시 불행했어…… . 사람들은 때로 너무 슬퍼서, 그 슬픔을 주체할 수가 없어서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한단다. 네 형도 그렇게 죽은 거야." - (책에서)
이들의 슬픔을 지켜보면서 나는 고다르 감독의 '미치광이 삐에로' 마지막 장면이 자꾸 떠올랐다. 마리안의 죽음 앞에서 페르디낭은 자신의 얼굴에 푸른색 페인트를 아무렇게나 칠하면서 울부짖는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 앞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과 비통함만이 남은 그 남자를 보면서 전율했었다. 순간적이나마 허구적 인물의 슬픔을 공유했던 것 같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살아남은 사람들'의 '죽음 같은 삶'이 이어지는 내내 나는 가슴이 답답했다. 끝까지 숨막히는 삶이 이어졌다면 책을 펼친 것을 후회했을지도 모른다. 다행이다. 아리안 부아의『남겨진 사람들』은 '같은 추억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슬픔을 극복해내는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의 힘이 무섭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사랑의 양면. 파괴성과 치유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