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발의 꿈 맨발의 여행자 - 낯선 이름의 여행지 동티모르의 조금은 쓸쓸하고 조금은 달콤한 이야기
박성원 지음, 정일호 사진 / 21세기북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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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행은 목적이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다. 당신에게 여행은 어떤 이미지를 떠올리는가. 생각해 보면 대부분의 여행은 계획되지 않고 떠났다가 길 위에서 너무 많은 시행착오를 반복하면서도, 돌아오는 길에는 또 우연찮은 여행을 상상하며 흐뭇해하기도 한다. 귀환이 전제되어 있는 떠남은 바로 행복이다.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여행을 계획한다면, 혹은 무목적을 목적으로 하고 여행을 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기대심리의 작용이 크지 않을까 싶다. '남는 것, 혹은 얻는 것'이 없다면, 결국 여행은 헛되다는 평가를 내리게 되고 참혹한 허무감이 엄습할 것이다. 남의 이목에 신경이 쏠린 사람이라면 여행 경비를 따져보며 웃기도, 인상을 쓰며 미간을 찌푸리기도 할 것이다.

 

  돌아오지 않는 긴 여행은 결국 삶이다.

 

2.

  <맨발의 꿈, 맨발의 여행자>. 이 책을 알기 전, 방을 뒹굴면서 주말에 영화 소개 프로그램을 본 적 있다. 동티모르로 간 축구감독, 그의 이야기를 영화로 풀어냈다는 이야기. 같은 국적을 가졌다는 이유 때문에 터무니없는 자부심을 느끼며 영화 소개에 관심을 가졌다. 만약 내가 글쓴이처럼 타지에 가 있었다면,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사전에 가이드까지 둘 정도였다면 김신환 축구감독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충분한 정보를 가지고 갔을 게 분명하다. 글쓴이는 그의 족적을 살피면서, 어떠했을까. 확실치는 않지만 행간에 느껴지는 감정은 '자부심'이었다.

 

3.

 동티모르, 하면 생각나는 것이 우선은 '전쟁'이다. 글쓴이도 조선을 떠올리며 안타까워하며, 경제적 궁핍에 시달리고 있는 동 티모르의 현 실정에 대해서 '동정'한다. 이것이 이 책의 성격, 즉 여행기라는 것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셈이다. 일면 글쓴이의 인간적인 모습을 반영하고 있고, 일면 이 책의 한계를 알아챌 수가 있다. 제삼자의 눈은 때때로 차갑고, 때때로 너무 감성적인 경향을 띈다.

  시각, 음향의 세례를 받고 자라난 나는 이 책의 구성이 좋았다. 글보다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사진이 좋았다. 읽기보다 '보기'에 더 익숙한 탓이다. '보기'는 '읽기'보다 인지가 빠르고, 상상을 증폭시키는 경향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행기에서 '보기'는 철저히 '읽기'를 바탕으로 상상력이 제한될 뿐이다. 사진이 어둡다. 문장이 차분하고 감성적인데 비해 다소 어두운 분위기의 사진들과 동 티모르 사람들의 거무틱틱한 살빛이 아마 글쓴이가 의도한 사진일 것 같다는 추측을 해 본다. 초두의 글쓴이가 동 티모르의 역사에 대해서 언급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어조는 이러한 사진들의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

  동 티모르의 '내일'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역사에서 미래는 반드시 과거보다 훨씬 나은 내일이라고 절대 단언할 수 없다. 그러나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인간은 꿈꾼다. 그래서 자주 착각하게 되나 보다. 글쓴이의 책에서는 동 티모르의 내일을 희망적으로 보고 있다는 생각을 얼핏 추측할 수 있다. 과연 그럴까. 그랬으면 좋겠다.

 

 

4.

  여행은, 우연이어도 좋다. 길 위에서 얼마나 지치고 매말랐는지, 그것은 잠깐이다. 추억은 늘 다르게 적힌다. 여행은 새롭게 해석되고, 퇴비처럼 오래 묵힐수록 빛이 달라지낟.

 

  동 티모르, 불운의 역사만을 가볍게, 남의 나라 신문기사로, 혹은 뉴스 앵커의 밍밍한 어조로 접했던 동남아의 한 약소국. 어쩌면 해방된 지금은 과거를 떠올릴 수 있어서 어제보다 나은 오늘일지도 모르겠다. 한 세기 전 조선조 말 제국주의 국가에 침탈 당해 이제는 기억 속에 잊혀진 약소국을,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계속해서 그 나라를 떠올리게 되었다. 유구(琉球) 왕국. 오키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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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화살표 방향으로 걸었다 - 서영은 산티아고 순례기
서영은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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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d souls'라는 영화가 있다. 연극배우 폴이 자신을 짓누르는 영혼의 무게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실험실을 찾으면서 벌어지는 해프닝을 다룬 판타지물이다. 실험실에서는 영혼을 꺼내 플라스크에 보관해주고, 원한다면 다른 사람의 영혼을 빌려주기도 한다. "이렇게 작은 것이 어쩌면 이리 무겁게 느껴지죠!" 핀셋 끝에 매달린 폴의 영혼을 들여다보며 박사가 하는 말이다. 정말로 영혼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형체가 있어 꺼낼 수만 있다면 나는 잠깐이나마 영혼의 무게로부터 벗어나는 쪽을 택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역시 실현 불가능한 일이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형체도 없는 그 무엇은 여전히 우리 삶을 옥죄고 뜯어먹는다. 말 안 듣는 그 짐승은 가지 말라는 데로 가고, 먹지 말라는 것을 먹고, 보지 말라는 것을 본다. 자기와의 불화는 우리를 피곤하게 만든다. 매순간 보이지 않는 그 무엇과 싸우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물론 보이는 것들과도 계속 싸워야 한다. 눈앞으로는 창과 칼이 날아들고 나는 그것들을 교묘히 슉슉 피해가며 걷는다. 그런데 이렇게 치열하게 걸으면서도 문득문득 고개를 쳐드는 물음. 내가 어디로 가고 있나.

 

 

   작가 서영은은 그 물음에 대답하는 방식으로 '걷기'를 택했다. 김동리의 마지막 아내로서 그의 삶은 녹록치 않았다고 들었다. 세상에 알려진 것 이면에는 그 혼자 감당해내었을 고독과 어려움이 더 많았을 것이다. 삶의 무게가 짓누를 때마다 그는 걷기를 통해 자신의 자리를 가늠하고 정리했다고 한다. 산티아고 순례를 결심했던 직후에도 서영은은 삶과 문학에 대한 회의에 젖어있었다. 그는 신에게, 그리고 본연의 자기에게 가까워지는 길을 택한다. 그리고 떠난다.

 

 

 산티아고가 지구 어디쯤 붙어 있는가도 몰랐다. 순례기,라고 하여 이스라엘이 아닌가 생각했는데, 스페인 서쪽에 있는 도시라 한다. 옛날에 야곱이 전도여행을 했던 길인데, 팔백 년이나 된 길이란다. 팔백 년 동안 그 길을 보존시킨 것은 신일까, 신에 대한 인간의 믿음일까. 그것이 무엇이든 길은 팔백 년 동안이나 인간의 시간을 이어주고 있다. 생각하면 놀랍고 감동적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무게를 묵묵히 받아준 고마운 길에는 그만큼의 기억이 새겨져 있겠지. 그리고 그 길에는 노란 화살표가 있다. 먼 길을 걷는 순례자들을 위해 100m 간격 정도로 해서 방향 표시를 해 둔 것이다. 노란 화살표 만큼이나 인상적이었던 것은 나무 위에 열매처럼 매달린 물병들이었다. 순례자들을 위해 누군가 매달아 둔 착한 마음이었다.

 

 

   집으로부터 멀리, 더 멀리 떨어지는 동안 스스로 '집(짐)'이 되어 걷는 순례자의 모습은 감동적이다. 달팽이처럼, 걸어다니는 집이 되어 걷는 그들의 모습에서 나는 우리가 너무 많은 것을 짊어지고 있었다는 생각을 했다. 하나라도 더 가지려고 아등바등하는 우리의 자화상이 비뚤어지고 창백해져서 숨을 헐떡이고 있는 것을 보았다. 거짓 욕망에 속아 점점 무거워지는 현대인은 '집'을 떠날 수가 없다. 가벼워지고자 하는 본능과 가지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불안 사이에서 정신없이 헤매고 있다. 길 위에서는 작은 것 하나도 무게를 늘려 짐이 된다. 마른 빨래라도 짜서 한 방울의 물이라도 덜어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짐을 줄여가는 일에 몰두하던 서영은은 짐을 무조건 가볍게 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무거운 짐을 질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짐을 벗는 것 이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말이다.

 

 


   "인생의 짐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빚어지는 것이 태반이다. 짐을 지는 것으로 사랑이 가늠되기도 한다. 아무 짐도 지지 않는다는 것은 타인에 대한 의무도 책임도 안 지려는 태도이다. (...) 지금 짊어진 짐의 무게로 내가 얼마만큼 타인의 짐을 질 능력이 있는지 가늠한다면, 너무 가볍다. 부끄럽다. 더 무거운 짐을 질 수 있어야 한다." 

 

                                                       -     (본문 중에서)


 

 

   산티아고 순례기라고 해서 다분히 종교적이고 지루할 것이라 걱정했었다. 기우였다. 소설만큼이나 재미있다. '치타'와의 좌충우돌 해프닝은 책에 생기를 더한다. '치타'는 서영은의 동행이다. 서로에 대한 불만으로 티격태격하면서 한길을 걷는 동안 서로에 대해 알아가고 이해해 나가는 그들의 모습이 낯설지 않다. 그러나 결국, 혼자 걷는 길이다. 깊은 산중 세 갈래 길에서 치타의 꽁무니를 놓치고 난 서영은은 그것을 깨닫는다. 저 앞에 펼쳐진 길은 내가 걸어야 되는 길이라는 것을. 책을 덮는다. 그리고 내 앞에는 길이 있다. 나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이제 더는 무엇의, 누구의 꽁무니를 쫓는 일은 그만하겠다. 내 마음의 노란 화살표를 따라 가다 보면 언젠가 거기 닿을 것임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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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것은 - 존재의 안부를 묻는 일곱 가지 방법
박범신 지음 / 한겨레출판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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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가는 건 '나부끼는' 일이다.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람은 늙고 물건은 마모되고 숲은 쓰러진다. 때론 쓸데없는 분노 때문에 상처받고 세계와의 불화 때문에 몸이 상한다. 상처는 계속 쌓여가지만, 그러나 허공을 보지 않고선 그 '해답'을 구할 수 없는 것이 사람살이다. 그러니, 나는 노래를 부른다. 나이 들면서도 여전히 '상처'를 다 부리지 못하는 내게 들려줄 노래는 이것이다. "그 해답은 친구여, 바람 속에 있다. …… 바람 속에 나부끼고 있다."  (본문 중에서)


 

 


    사직서를 냈다. 힘들었다. 같이 일해야 할 사람들과의 틈이 까마득했다. 몇 사람 몫의 일을 혼자 했다. 밤이 깊도록 회사 일에 붙들려 있으면서, 나는 그들이 미웠다. '나 참 더러워서!' 담배를 뻑뻑 피워댔다. 시원스럽게 사직서를 냈지만 앞길이 걱정이었다. 어둑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날이 밝아올 때는 꺽꺽 게워댔다. 더럽다. 더럽다. 구시렁거렸던 것도 같다. 아내는 문을 잠그고 조용했다. 외로웠다.

 

 

   나는 길 잃은 개처럼 황망하게 세상 가장자리를 기웃거렸다. 어디에도 나를 받아줄 곳이 없어 보였다. 까짓, 막일이라도 할까. 나는 갑자기 세상에서 밀려나고 있는 것처럼 불안했다. 그러면서도 아내와 밥을 먹고 개를 산책시키고 '일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개그맨의 연기에 큭큭 웃어댔다.

 

 

   진짜, 진짜, 산다는 것이 뭔가. 까맣게 타들어가는 가슴은 허공에 연기 같은 물음을 피워올렸다. 어쩌면 그건 물음이 아니었다. 허공에, 우주의 품에 암팡지게 발길질을 해댄 것이었는지 모른다. 내 삶에, 나 자신에 행패를 부리고 있을 때 나는 이 책을,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이 책의 제목을 발견했다. 산다는 것은. 정신이 와짝 들었다. 그 짧은 문장이, 불완전한 문장이 나를 부끄럽게, 쳐다보고 있었다.

 

 

   박범신 작가의 글은 소설 몇 편, 그리고 우연히 읽었을 몇 편의 수필 정도가 전부이다. 게으름 때문에, 최근 연재되었던 '개밥바라기 별'은 읽다 끝을 보지 못했다. 기억나는 글은, '흰 소가 끄는 수레'라는 소설뿐이다. 내용이 전부 기억나지도 않는다. 아들이 차를 훔쳐가 끙끙대던 아버지가 떠오르는데, 내 기억이 맞는가도 모르겠다. 재미있었다는 기억만 또렷하다. 그는 지난 한때를 "인기작가였을 때"라고 수식하였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인기작가라는 것을 실감한다. 블로그 방문자 수와 수많은 덧글들만 봐도 알 수 있다. 게다가 여전히 청년작가이다. 선생의 생애를 한마디로 축약해서 말한다면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출연했던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진행자의 질문을 받고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내 인생은 '작업'이었지요. 연애할 때 상대편을 유혹한다는 그 작업이요. 요컨대, "고통과 황홀" 속에서 그의 작업, 삶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은유로서의 '작업'뿐 아니라 실제로 그는 작업(作業)을, 몸을 움직여 일하는 것을 좋아한다. 마당에 있는 꽃과 나무와 채소를 가꾸는 것을 즐긴다. 마당에 앉아 꽃에 취해, 나무에 취해 술잔을 기울이는 모습이 글에 자주 나온다. 그 모습이, 꼭 신선 같다고 생각돼서 슬쩍 부럽기까지 하다.


 

   나는 여러 해 늙는 것이 두려웠다. 어떤 땐 너무 두려워 실신할 만큼 술을 마시기도 했고, 또 어떤 땐 수천 미터 높이의 낯선 산야르 죽을 둥 살 둥 헤매기도 했다. 갈망과 염원은 나날이 깊어졌지만 내가 가진 것은 두려움뿐이었다. (본문 중에서)

 


   나의 '짐승(기르는 애견의 애칭)'을 데리고 산책을 나갔다가 아직 같은 회사에서 일하는(한 달 뒤면 굿빠이) 직원을 보았다. 우연한 만남이었다. 우리(짐승과 나와 아내)가 서 있는 맞은편 도로에 그가 있었다. 신호가 바뀌고 그가 이편으로 걸어왔다. 나를 향해서는 아니고. 걸으면서는 아내에게 그에 관한 짤막한 소개를 했다. 형식적인 눈웃음이 허공으로 증발하고 우리는 서로 갈 길로 향했다. "굉장히 화려하네. 꽃무늬 원피스." "어. 평소에도 가슴에 꽃 달고 다닌다." 큭큭. 아내와 그런 대화를 주고 받다가 나도 모르게 마음이 누그러지는 것을 느꼈다. 저들과 나는 그저 갈 길이 달랐을 뿐이다. 잠시 엇갈렸을 뿐이다. 그런 생각이 들면서 갑자기 그들이 측은하기도 하고 아름답게도 보였다. 내가 그들을 향해 품었던 불만, 불안, 미움이 여직원의 꽃무늬 치맛자락과 함께 희미해지는 것을 느꼈다. 잠시나마 속이 편안해졌다. 언제 또 무슨 일로 속이 뒤집히고 불이 붙을지 모르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랬다.

 


  사람처럼 추한 것이 없고 사람처럼 독한 것이 없고 사람처럼 불쌍한 것이 없고, 그리고 사람처럼 예쁜 것이 없다. 모든 게 영원하다면 무엇이 예쁘고 무엇이 또 눈물겹겠는가. (본문 중에서)

 


   사람이 미워질 때, 그보다 더 내가 미워질 때 나는 박범신 작가의 얼굴을 떠올릴 것 같다. 책 표지 안쪽, 프로필 사진이 인상적이다. 박범신 작가는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다. 거울 앞에서 거울 속의 '그'를 쳐다보고 있다. '그'에게 조용한 미소를 보내고 있다. 거울 속의 '그'도 거울 밖의 작가에게 미소를 보내고 있다. 선생의 미소는 곧 울 것 같은 표정으로도 보인다. "고통과 황홀"의 시간을 거쳐온 그의 얼굴이 거기 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거울 속의 '그'를 꺼내주고 싶다는 이상한 충동이 아주 잠깐 들었다. 쓸데없는 생각이다.

 


   '연민'이야말로 평생 작가로서의 내겐 '적'이었고 '감옥'이었다. 우주로 날아가 별이 되기 전까지는 '나는 자유인'이라는 내 말엔 반 이상 '뻥'이 섞여 있다고 보면 된다. (...) 요즘은 매일 온갖 군데가 계속 아프다. 그래도 괜찮은 척 만나자는 사람을 여전히 만나고 심지어 건네주는 술잔을 거절 못 하고 받는다. 상대편이 심심하고 쓸쓸할까 봐 일부러 내 스스로 원샷 원샷! 할 때도 있다. 그리고 화장실에 가서 남몰래 의사의 처방에 따른 안정제와 약을 수돗물로 삼킨다. 내가 아내에게, 당신에게, 세상에게 '자유인'인가. 자, 이제 나는 어디로 어떻게 떠나면 되는가. (본문 중에서)

 


   그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은 별로 없다. 언제인가 텔레비전에서 그가 이국의 산길을 걷는 모양을 비춰주는 것을 보고 감동했던 기억이 있다. 저 사람 멋있다, 저렇게 살면 늙지도 않겠다고 생각했다. 박경리 선생의 시집에서 그에 관한 시를 읽고, 우물처럼 맑고 깨끗한 눈망울을 가진 소가 떠올랐던 일도 있다. 그분, 박범신 작가에 대해서 잘은 모르지만, 그의 글을 읽으면서 고운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어떤 면에서는 기이한 동질감 같은 것도 느껴져서 얼굴 마주하고 술 한 잔 기울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지난 번에 블로그에 가서 보니까, 덧글에 독자들과 '번개'도 하시는 것 같던데, 나도 언제 그 번개 모임에 슬쩍 흘러들어볼까. 그때 뵈요.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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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를 그리다 - 화가들이 사랑한 '나의 어머니'
줄리엣 헤슬우드 지음, 최애리 옮김 / 아트북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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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 분에 몇 번이나 눈을 깜빡이는지, 감았다가 뜨는지, 그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생각지 못한 질문을 받을 때면 눈앞은 새하얘진다. 몇 번을 눈 감았다가 뜨는가, 나는 모른다. 그것을 알아볼 생각을 한 적도 없다. 그런데 그런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는 나를 발견할 때, 나는 안다.  대답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당황하고 있는 나를 안다.

 

  어머니. 수많은 화가들이 어머니를 그렸고, 그 많은 화가들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이가 있었다. 그 사람이 바로 "어머니를 그리다"의 필자이다. 그는 화가들과 어머니의 관계가 어떠했는지가 궁금했다고, 그래서 조사했고, 의외의 결과를 얻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그들은 사이가 참 좋았다, 그것이 신기하다고 필자는 밝히고 있다. 왜 그런 가설을 가졌던 것일까. 어머니를 그린다는 것은, 단순히 생각에 그치는 것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신경을 쏟아야 한다는 것인데 범인은 모두 알 만한 사실을 필자는 역으로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필자는 어머니를 생각함에 어떤 감정이 솟치는 것이었을까. 다만 추정해 볼 뿐이다. 그리고 혼자 생각에 자못 서글퍼지고 만다.

 

  서른. 그 나이를 넘어 이제 중반에 다다랐다. 갈 곳이 없는 나이라고들 하고, 몹쓸 소리에 참고 견딤이 옳다는 소리를 종종 듣는다. 그런 나이 언저리에 나는 그림을 보는 눈빛이 제법 달라졌다는 것을 "어머니를 그리다"를 보면서, 읽으면서 느꼈다. 사실적인 그림을 더 우위에 손꼽았던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의 나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나는 "어머니를 그리다"를 보면서 느꼈다. 추상적인 형상화도, 정묘한 사실화도 모두 같은 느낌이었다는 것이 신기하다. 형상화 방법, 수단보다는 하나의 상통하는 주제를 찾아내는 눈을 얻은 것이다. 그것이 여태 삶에, 그래도 헛것 아니라는 항변이 가능하게 하는 자위이다.

 

  필자는 '어머니와 자녀'의 관계를 주목하며, 어머니를 그린 화가들의 이야기를 많이도 언급하고 있다. 왜 그렇게 많은 화가들을 살펴야 했을까. 이 책은 특정한 화가를 심도 있게 탐구하는 것과는 애초부터 다른 출발점에 놓여 있다는 것을 독자를 깨달아야 한다. 많은 화가들을, 마치 수박 겉핥기처럼 적은 지면에 언급하고 있는 필자의 의도를 먼저 살핌이 옳겠다. 그렇다. 필자는 '관계'를 살피고, 그 울림 속에서 색다른 '치사랑'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내리사랑'과 '치사랑'을 견주며 존재 여부를 따지는 것은 사실 소모적인 일이다. 지금 나는 '관계'를 어떻게 형상화하고 있는지를 점검하게 된다. 필자는 이미 많은 선인들이 언급했던 '지금 여기의 우리'를, 그 소중함을 깨치도록 경각심을 울리고 있다.

 

  두 아들을 먼저 보내고, 여생을 살았다는 '고흐와 테오'의 어머니가 자꾸 눈에 밟힌다. 아들의 천재성을 미리 알았다는 어머니, 그러나 불행했던 아들을 지켜보던 어머니의 한생은 수없이 오고갔던 편지만큼이나 세상의 인식과는 다른 무엇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고흐의 편지가 동생 테오에게만 즐겨 오고갔는 줄 알았는데, 이 책은 또다른 고흐의 이야기, 그의 가족사에 대해서 알게 도와주었다. 편지를 쓸까, 생각만 하다가 멋쩍어 웃고 만다. 편지를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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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연
필립 그랭베르 지음, 홍은주 옮김 / 다른세상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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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가 하나뿐인 친구의 의자 다리였다는 걸, 받침대였다는 걸, 보철구였다는 걸 알면 기분이 어떨 것 같아요? 세상에 둘도 없는 사이라고 믿었는데 실은 악연이었다는 걸 깨달으면 어떤 심정일 것 같아요?   - (본문 중에서)

 

 


     글쎄, 어떤 심정일까. 직접 겪는 것이 아니라 추측만 해보는 것인데도 복잡한 기분이 된다. "그것은 만도의 얼굴, 내 얼굴이 될 뻔한 만도의 얼굴이다."라는 문장으로 끝을 맺는 이 짧은 소설을 읽고 난 내 심정도 '루'만큼이나 착잡하다. 한적한 길가를 산책하던 중 예기치않게 심한 가격(加擊)을 당한다면 이 비슷한 기분이 들까. 필립 그랭베르에게 한 대 맞은 기분이다.

 

 

 

   그러나, 그 충격이 심한다고 한들 '만도'를 잃은 '루'에 비할까. '루'는 이제 "추억을 동여맨 무거운 사슬"과 씨름 중이다. 대체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고, 좀 알아듣게 말을 해달라고 재촉하지 마라. 만도와 루의 이야기를 들으려면 인내심이 필요하다. 우정관계라는 흔한 소재 안에 뜻밖의 이야기가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어릴 때 내가 즐겨먹던 막대사탕이 있었다. 사탕을 다 녹여먹고 나면 사탕 안에 선물처럼 숨어있던 초코맛 캐러멜을 맛볼 수 있었다. 캐러멜을 맛보기 위해 혀가 닳도록 사탕을 핥아먹던 기억이 난다. (아이고, 또 뜬금없는 이야기 ^ ^;) 소설은 회상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만도와의 만남과 성장과정을 회상하는 루의 목소리를 따라가다 보면 독자는 예기치 못한 충격에 휩싸이게 된다. 따분하다 싶어질 즈음, 껌인지 캐러멜인지 분명치않은 무언가가 씹히는 것이다.

 

 

   서론이 너무 길었다. 실은 뭐라고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 머릿속에서 수많은 생각들이 오고가는 것 같은데, 나는 그 생각들을 포착해낼 수 없다. 분명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은 두려움과 분노이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지난 날 나의 만도를 떠올렸다.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데, 결코 기억에서 몰아낼 수 없는 사람. 소설 속 루의 고백처럼 나의 만도, 그 옛날 내 친구 역시 내 삶의 일부였고, 절교한 이후에도 그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사실 굉장히 놀랐다.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나만의 경험, 기억을 송두리째 들켜버린 기분이다. 은폐하고 달아나고 싶던 기억의 검은 손에 붙들린 것 같다.

 

 

   어린 시절 몽소 공원에서 만난 만도와 루는 절대적인 우정 관계를 지속해 나간다. "같이 놀고, 같은 책을 읽고, 첫 경험도 같이 치르면서 숱한 것을" 공유한다. 누구에게나 이런 우정이 있었거나 있을 것이다. 예정된 것처럼 서서히 우정이 변모하거나 시들해지는 시기가 찾아온다는 것도 공감할 것이다. 공유할 것이 하나 둘 사라져가고, 그러면 우정관계는 자연스럽게 소원해지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별로 특별한 이야깃거리가 못 된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자기가 하나뿐인 친구의 의자 다리였다는 걸, 받침대였다는 걸, 보철구였다는 걸 알면" 어떨까. 나의 부재가 그의 존재의 뿌리를 뒤흔드는 것이었다면? 기우뚱 위태롭게 서 있던 그의 정신을 무너뜨린 것이 나라고 한다면 어떨까. 이것은 평범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오랫동안 나는 만도가 만든 이미지에 나를 맞추려고 노력했다. 그것이 그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때때로 느꼈으므로 나는 그 이미지를 변질시키지 않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지쳤다. 나는 그에게서 점점 멀어지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어땠을까? 아마 샴쌍생아의 가슴을 가르는 메스가 와 닿는 감각을 느꼈으리라. 샴쌍생아는 수술 뒤에 한쪽만 살아남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살아남은 쪽은 다른 한쪽의 목숨과 자유를 맞바꾸었다는 죄의식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    - (본문 중에서)


 

   만도와 소원해지던 루는 충격적인 사실과 맞닥뜨린다. 만도의 고질적 정신병. 그 병을 유발한 것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충격과 죄책감에 사로잡힌 루는 만도의 광기를 잠재우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한다. 그러나 어느 밤 만도의 광기는 극에 달하고 루는 자신의 오랜 친구에게서, 수많은 약속들에게서 달아난다.

 


   "정신질환자는 정신병에 '걸리는' 게 아니라 '애초부터' 정신질환자이다"라고, 그는 또박또박 말했다. (...) 증상의 첫 출현은 그가 '악연'이라 부르는 것의 결과로 나타날 때가 많은데, 이를테면 그때까지 아무 장애도 드러내지 않았던 어떤 사람에겐 아버지가 되거나 책임 있는 자리로 승진하는 것도 계기가 된다. 또 어떤 경우엔 실연이나 절교 때문일 수도 있다. (...) "등 없는 작은 의자가 전부 다리 네 개로 서 있는 건 아니다. 그중엔 다리 세 개로 버티는 것들도 있다. 거기서 다리 하나가 더 없어지면 치명타가 된다."   - (본문 중에서)

 


   루가 달아나는 동안 만도도 루의 반대 방향, 삶의 반대 방향으로 달아나고 말았다. 남은 것은 이제 루 자신의 유령들 뿐이다. 그리고 나는 나의 유령들에게 붙들려야 했다. 가까운 친구가 정신병에 사로잡혀 본모습을 잃어가는 것을 지켜보야야 했던 그 충격과 두려움을 다시 느껴야 했다. 내가 그의 '악연', 광기의 근원은 아니었더라도 그 경험은 내 삶에 크고 검은 구멍을 남겼다. 나는 아직도 가끔 그 구멍에 다시 빠져 허우적거린다. 정신적 후유증이 크다. 피하고, 피하고, 또 피하다 결국 또 그 구멍에 빠져 발버둥칠 때마다 나는 그 친구가 죽도록 원망스럽다. 그 친구가 의도한 일은 아니었더라도 나는 그에 의해 고통받았고, 여전히 내 삶의 일부분은 그 기억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나는 다만 그에게 진심에서 우러난 사과를 받고 싶었다. 나 때문에 많이 힘들었겠다. 정말 미안해. 그러나 지금은 누구보다 건강하게 잘 살고 있는 그에게서 나는 조금의 미안함의 기색도 찾을 수 없었다.


 

   만도, 네가 떠나고 없는데, 나한테 스툴 의자의 세 번째 다리와 보철구 말고 다른 것이 남아 있니? 허공에서 멈춘 내 손이 벽에 그림자를 만든다. 스탠드 불빛으로 길게 늘어난 그 그림자가 가볍게 떨린다. 그러자 마지막 물음이 달려든다. 내가 그 애의 악연이었나, 그 애가 나의 악연이었나?  - (본문 중에서)

 


   내가 그 애의 악연이었나, 그애가 나의 악연이었나? 허공에 대고 묻는 루에게서 나는 연민을 느꼈다. 루가 느끼는 감정이 죄의식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만도에 대한 혐오와 분노, 두려움 따위의 감정도 따랐을 것이다. 루의 삶에는 끝내 사라지지 않을 만도의 그림자들이 끈질기게 따라붙어 그의 정신을 갉아먹을 것이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불교의 아름다운 인연설이 두렵게 다가오는 때가 있다. 인연이라는 것,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라는 것이 때로 예상치 못한 파국을 초래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필립 그랭베르의 《악연》은 굉장히 섬세한 작품이다. '정신분석가가 쓴 소설'이라는 타이틀 때문에 다소 학문적이거나 소설적인 맛이 부족하지 않을까 했던 내 걱정은 기우였다. 그의 문장은 아름답고 힘이 있다.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소설의 전개를 매혹적으로 바꾸어놓은 것이 바로 그 문장이다. 물론 번역자의 공이 크리라 생각한다. 옮긴이의 말에서 역자가 호소했던 문장의 '까다로움'을 나는 전혀 느낄 수 없었으니까 말이다. 이 짧고도 강렬한 이야기가 다른 이에게는 어떤 의미와 감동을 줄지 사뭇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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