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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연
필립 그랭베르 지음, 홍은주 옮김 / 다른세상 / 2010년 5월
평점 :
품절
자기가 하나뿐인 친구의 의자 다리였다는 걸, 받침대였다는 걸, 보철구였다는 걸 알면 기분이 어떨 것 같아요? 세상에 둘도 없는 사이라고 믿었는데 실은 악연이었다는 걸 깨달으면 어떤 심정일 것 같아요? - (본문 중에서)
글쎄, 어떤 심정일까. 직접 겪는 것이 아니라 추측만 해보는 것인데도 복잡한 기분이 된다. "그것은 만도의 얼굴, 내 얼굴이 될 뻔한 만도의 얼굴이다."라는 문장으로 끝을 맺는 이 짧은 소설을 읽고 난 내 심정도 '루'만큼이나 착잡하다. 한적한 길가를 산책하던 중 예기치않게 심한 가격(加擊)을 당한다면 이 비슷한 기분이 들까. 필립 그랭베르에게 한 대 맞은 기분이다.
그러나, 그 충격이 심한다고 한들 '만도'를 잃은 '루'에 비할까. '루'는 이제 "추억을 동여맨 무거운 사슬"과 씨름 중이다. 대체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고, 좀 알아듣게 말을 해달라고 재촉하지 마라. 만도와 루의 이야기를 들으려면 인내심이 필요하다. 우정관계라는 흔한 소재 안에 뜻밖의 이야기가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어릴 때 내가 즐겨먹던 막대사탕이 있었다. 사탕을 다 녹여먹고 나면 사탕 안에 선물처럼 숨어있던 초코맛 캐러멜을 맛볼 수 있었다. 캐러멜을 맛보기 위해 혀가 닳도록 사탕을 핥아먹던 기억이 난다. (아이고, 또 뜬금없는 이야기 ^ ^;) 소설은 회상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만도와의 만남과 성장과정을 회상하는 루의 목소리를 따라가다 보면 독자는 예기치 못한 충격에 휩싸이게 된다. 따분하다 싶어질 즈음, 껌인지 캐러멜인지 분명치않은 무언가가 씹히는 것이다.
서론이 너무 길었다. 실은 뭐라고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 머릿속에서 수많은 생각들이 오고가는 것 같은데, 나는 그 생각들을 포착해낼 수 없다. 분명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은 두려움과 분노이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지난 날 나의 만도를 떠올렸다.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데, 결코 기억에서 몰아낼 수 없는 사람. 소설 속 루의 고백처럼 나의 만도, 그 옛날 내 친구 역시 내 삶의 일부였고, 절교한 이후에도 그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사실 굉장히 놀랐다.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나만의 경험, 기억을 송두리째 들켜버린 기분이다. 은폐하고 달아나고 싶던 기억의 검은 손에 붙들린 것 같다.
어린 시절 몽소 공원에서 만난 만도와 루는 절대적인 우정 관계를 지속해 나간다. "같이 놀고, 같은 책을 읽고, 첫 경험도 같이 치르면서 숱한 것을" 공유한다. 누구에게나 이런 우정이 있었거나 있을 것이다. 예정된 것처럼 서서히 우정이 변모하거나 시들해지는 시기가 찾아온다는 것도 공감할 것이다. 공유할 것이 하나 둘 사라져가고, 그러면 우정관계는 자연스럽게 소원해지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별로 특별한 이야깃거리가 못 된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자기가 하나뿐인 친구의 의자 다리였다는 걸, 받침대였다는 걸, 보철구였다는 걸 알면" 어떨까. 나의 부재가 그의 존재의 뿌리를 뒤흔드는 것이었다면? 기우뚱 위태롭게 서 있던 그의 정신을 무너뜨린 것이 나라고 한다면 어떨까. 이것은 평범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오랫동안 나는 만도가 만든 이미지에 나를 맞추려고 노력했다. 그것이 그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때때로 느꼈으므로 나는 그 이미지를 변질시키지 않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지쳤다. 나는 그에게서 점점 멀어지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어땠을까? 아마 샴쌍생아의 가슴을 가르는 메스가 와 닿는 감각을 느꼈으리라. 샴쌍생아는 수술 뒤에 한쪽만 살아남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살아남은 쪽은 다른 한쪽의 목숨과 자유를 맞바꾸었다는 죄의식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 - (본문 중에서)
만도와 소원해지던 루는 충격적인 사실과 맞닥뜨린다. 만도의 고질적 정신병. 그 병을 유발한 것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충격과 죄책감에 사로잡힌 루는 만도의 광기를 잠재우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한다. 그러나 어느 밤 만도의 광기는 극에 달하고 루는 자신의 오랜 친구에게서, 수많은 약속들에게서 달아난다.
"정신질환자는 정신병에 '걸리는' 게 아니라 '애초부터' 정신질환자이다"라고, 그는 또박또박 말했다. (...) 증상의 첫 출현은 그가 '악연'이라 부르는 것의 결과로 나타날 때가 많은데, 이를테면 그때까지 아무 장애도 드러내지 않았던 어떤 사람에겐 아버지가 되거나 책임 있는 자리로 승진하는 것도 계기가 된다. 또 어떤 경우엔 실연이나 절교 때문일 수도 있다. (...) "등 없는 작은 의자가 전부 다리 네 개로 서 있는 건 아니다. 그중엔 다리 세 개로 버티는 것들도 있다. 거기서 다리 하나가 더 없어지면 치명타가 된다." - (본문 중에서)
루가 달아나는 동안 만도도 루의 반대 방향, 삶의 반대 방향으로 달아나고 말았다. 남은 것은 이제 루 자신의 유령들 뿐이다. 그리고 나는 나의 유령들에게 붙들려야 했다. 가까운 친구가 정신병에 사로잡혀 본모습을 잃어가는 것을 지켜보야야 했던 그 충격과 두려움을 다시 느껴야 했다. 내가 그의 '악연', 광기의 근원은 아니었더라도 그 경험은 내 삶에 크고 검은 구멍을 남겼다. 나는 아직도 가끔 그 구멍에 다시 빠져 허우적거린다. 정신적 후유증이 크다. 피하고, 피하고, 또 피하다 결국 또 그 구멍에 빠져 발버둥칠 때마다 나는 그 친구가 죽도록 원망스럽다. 그 친구가 의도한 일은 아니었더라도 나는 그에 의해 고통받았고, 여전히 내 삶의 일부분은 그 기억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나는 다만 그에게 진심에서 우러난 사과를 받고 싶었다. 나 때문에 많이 힘들었겠다. 정말 미안해. 그러나 지금은 누구보다 건강하게 잘 살고 있는 그에게서 나는 조금의 미안함의 기색도 찾을 수 없었다.
만도, 네가 떠나고 없는데, 나한테 스툴 의자의 세 번째 다리와 보철구 말고 다른 것이 남아 있니? 허공에서 멈춘 내 손이 벽에 그림자를 만든다. 스탠드 불빛으로 길게 늘어난 그 그림자가 가볍게 떨린다. 그러자 마지막 물음이 달려든다. 내가 그 애의 악연이었나, 그 애가 나의 악연이었나? - (본문 중에서)
내가 그 애의 악연이었나, 그애가 나의 악연이었나? 허공에 대고 묻는 루에게서 나는 연민을 느꼈다. 루가 느끼는 감정이 죄의식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만도에 대한 혐오와 분노, 두려움 따위의 감정도 따랐을 것이다. 루의 삶에는 끝내 사라지지 않을 만도의 그림자들이 끈질기게 따라붙어 그의 정신을 갉아먹을 것이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불교의 아름다운 인연설이 두렵게 다가오는 때가 있다. 인연이라는 것,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라는 것이 때로 예상치 못한 파국을 초래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필립 그랭베르의 《악연》은 굉장히 섬세한 작품이다. '정신분석가가 쓴 소설'이라는 타이틀 때문에 다소 학문적이거나 소설적인 맛이 부족하지 않을까 했던 내 걱정은 기우였다. 그의 문장은 아름답고 힘이 있다.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소설의 전개를 매혹적으로 바꾸어놓은 것이 바로 그 문장이다. 물론 번역자의 공이 크리라 생각한다. 옮긴이의 말에서 역자가 호소했던 문장의 '까다로움'을 나는 전혀 느낄 수 없었으니까 말이다. 이 짧고도 강렬한 이야기가 다른 이에게는 어떤 의미와 감동을 줄지 사뭇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