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노란 화살표 방향으로 걸었다 - 서영은 산티아고 순례기
서영은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cold souls'라는 영화가 있다. 연극배우 폴이 자신을 짓누르는 영혼의 무게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실험실을 찾으면서 벌어지는 해프닝을 다룬 판타지물이다. 실험실에서는 영혼을 꺼내 플라스크에 보관해주고, 원한다면 다른 사람의 영혼을 빌려주기도 한다. "이렇게 작은 것이 어쩌면 이리 무겁게 느껴지죠!" 핀셋 끝에 매달린 폴의 영혼을 들여다보며 박사가 하는 말이다. 정말로 영혼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형체가 있어 꺼낼 수만 있다면 나는 잠깐이나마 영혼의 무게로부터 벗어나는 쪽을 택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역시 실현 불가능한 일이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형체도 없는 그 무엇은 여전히 우리 삶을 옥죄고 뜯어먹는다. 말 안 듣는 그 짐승은 가지 말라는 데로 가고, 먹지 말라는 것을 먹고, 보지 말라는 것을 본다. 자기와의 불화는 우리를 피곤하게 만든다. 매순간 보이지 않는 그 무엇과 싸우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물론 보이는 것들과도 계속 싸워야 한다. 눈앞으로는 창과 칼이 날아들고 나는 그것들을 교묘히 슉슉 피해가며 걷는다. 그런데 이렇게 치열하게 걸으면서도 문득문득 고개를 쳐드는 물음. 내가 어디로 가고 있나.
작가 서영은은 그 물음에 대답하는 방식으로 '걷기'를 택했다. 김동리의 마지막 아내로서 그의 삶은 녹록치 않았다고 들었다. 세상에 알려진 것 이면에는 그 혼자 감당해내었을 고독과 어려움이 더 많았을 것이다. 삶의 무게가 짓누를 때마다 그는 걷기를 통해 자신의 자리를 가늠하고 정리했다고 한다. 산티아고 순례를 결심했던 직후에도 서영은은 삶과 문학에 대한 회의에 젖어있었다. 그는 신에게, 그리고 본연의 자기에게 가까워지는 길을 택한다. 그리고 떠난다.
산티아고가 지구 어디쯤 붙어 있는가도 몰랐다. 순례기,라고 하여 이스라엘이 아닌가 생각했는데, 스페인 서쪽에 있는 도시라 한다. 옛날에 야곱이 전도여행을 했던 길인데, 팔백 년이나 된 길이란다. 팔백 년 동안 그 길을 보존시킨 것은 신일까, 신에 대한 인간의 믿음일까. 그것이 무엇이든 길은 팔백 년 동안이나 인간의 시간을 이어주고 있다. 생각하면 놀랍고 감동적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무게를 묵묵히 받아준 고마운 길에는 그만큼의 기억이 새겨져 있겠지. 그리고 그 길에는 노란 화살표가 있다. 먼 길을 걷는 순례자들을 위해 100m 간격 정도로 해서 방향 표시를 해 둔 것이다. 노란 화살표 만큼이나 인상적이었던 것은 나무 위에 열매처럼 매달린 물병들이었다. 순례자들을 위해 누군가 매달아 둔 착한 마음이었다.
집으로부터 멀리, 더 멀리 떨어지는 동안 스스로 '집(짐)'이 되어 걷는 순례자의 모습은 감동적이다. 달팽이처럼, 걸어다니는 집이 되어 걷는 그들의 모습에서 나는 우리가 너무 많은 것을 짊어지고 있었다는 생각을 했다. 하나라도 더 가지려고 아등바등하는 우리의 자화상이 비뚤어지고 창백해져서 숨을 헐떡이고 있는 것을 보았다. 거짓 욕망에 속아 점점 무거워지는 현대인은 '집'을 떠날 수가 없다. 가벼워지고자 하는 본능과 가지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불안 사이에서 정신없이 헤매고 있다. 길 위에서는 작은 것 하나도 무게를 늘려 짐이 된다. 마른 빨래라도 짜서 한 방울의 물이라도 덜어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짐을 줄여가는 일에 몰두하던 서영은은 짐을 무조건 가볍게 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무거운 짐을 질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짐을 벗는 것 이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말이다.
"인생의 짐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빚어지는 것이 태반이다. 짐을 지는 것으로 사랑이 가늠되기도 한다. 아무 짐도 지지 않는다는 것은 타인에 대한 의무도 책임도 안 지려는 태도이다. (...) 지금 짊어진 짐의 무게로 내가 얼마만큼 타인의 짐을 질 능력이 있는지 가늠한다면, 너무 가볍다. 부끄럽다. 더 무거운 짐을 질 수 있어야 한다."
- (본문 중에서)
산티아고 순례기라고 해서 다분히 종교적이고 지루할 것이라 걱정했었다. 기우였다. 소설만큼이나 재미있다. '치타'와의 좌충우돌 해프닝은 책에 생기를 더한다. '치타'는 서영은의 동행이다. 서로에 대한 불만으로 티격태격하면서 한길을 걷는 동안 서로에 대해 알아가고 이해해 나가는 그들의 모습이 낯설지 않다. 그러나 결국, 혼자 걷는 길이다. 깊은 산중 세 갈래 길에서 치타의 꽁무니를 놓치고 난 서영은은 그것을 깨닫는다. 저 앞에 펼쳐진 길은 내가 걸어야 되는 길이라는 것을. 책을 덮는다. 그리고 내 앞에는 길이 있다. 나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이제 더는 무엇의, 누구의 꽁무니를 쫓는 일은 그만하겠다. 내 마음의 노란 화살표를 따라 가다 보면 언젠가 거기 닿을 것임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