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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이의 속마음을 척척 읽어내는 어린아이 심리학 - 아이와 함께 크는 엄마 5
홍기묵.한미현 지음 / 팜파스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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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홍기묵. 한기현 :

(팜파스, 2007, 총 254쪽)

 

                                                               내 아이의 속마음을 척척 읽어내는
                                                                                    어린아이 심리학

 

"대체 네가 왜 이러는지 속을 한 번 들어갔다 왔으면 좋겠어!"

 책표지에 담긴 내용으로도 충분히 이 책이 어떤 책인지 가늠할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 심리학>은  발달심리학의 축대에 힘입어 양육의 실용적인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문 학문적 성격보다는 실용적인 측면이 강한 책입니다. 그래서 실용서라 불러야 할 것 같습니다. 양육과정에 필요한 지식을 확인할 수 있으며 익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 심리학>은 아이의 성장과정을 따라 가면서 친절한 설명을 아끼지 않습니다. 

  <어린아이 심리학>에서 어린아이는 미취학아동을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즉, 영유아의 양육을 돕는 실용서입니다. 출생에서부터 5세까지, 유치원 들어가기 전의 아이들을 '어린아이'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좋은 부모가 되는 필수 과정은 아이에 대한 민감성을 키우는 과정입니다."

  머리말에서, 들어가는 말에서 소제목을 이렇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민감성은 관심의 다른 이름이겠죠. 

  "(...) 우리는 너무 허술한 준비 속에서 엄마가 되고 아빠가 됩니다. (...) 이것이 바로 현실이죠. (...) 뾰족한 대안과 기준을 제시하는 이도 없는 (...)"

  머리말에서 언급한 해법찾기에 <어린아이 심리학>은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저자의 의도를 명확히 파악할 수 있습니다. 저자는 양육에 있어서의 "대안과 기준"을 전달하고자 합니다. 해서 저작 의도에 맞추어 책의 목차가 짜여 있습니다. 각장은 연령과 특징적 행동반응에 나뉘어 있고,  정서발달, 인지발달, 신체발달, 사회성발달, 사회정서 발달 등으로 서술됩니다. 심리학상의 전문 개념어가 사용되기는 하지만 크게 어려워할 것은 아닙니다. 아이의 정서, 신체발달에 초점을 두고서 책이 엮여 있기 때문에 개념어는 걸림돌이 되지 못합니다. 

  이 책은 아이를 이해하는 데에 적으나마 도움을 주고자 엮였고, 사실상 많은 도움을 얻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 한권으로 영유아의 마음을 훤히 꿰뚫을 수 있다고 장담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단지 좀더 과학적으로 아이들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는,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을 뿐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관심입니다. 아이에게 지속적인 관심과 그를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할 때에만 비로소 우리는 그들의 속마음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낳아 기르는 것(양육)은 인간에게 있어 가장 큰 업적입니다. 생명을 낳아 기른다는 것은 대단히 위대한 일입니다. 그 자랑스러운 부모님들께 드리는 책이, 안내서가 바로 <어린아이 심리학>입니다. 양육 지침서로 활용이 가능한 <어린아이 심리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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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 현대시 100년, 사상 최고의 시인
김소월 지음, 백시나 엮음 / 천케이(구 티알씨)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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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김소월

(백시나 / 천케이 2007 / 총 247쪽)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소월의 시 더 이상 새롭지 않다. 소월의 시를 새롭게 읽기 위해서는 더 오래 들여다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김소월 시집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는 새롭다. 오래 들여다보려 했지만 쫓기는 마음이라 그러지 못한 것이 아쉽다. 어느 때고 언젠가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를 윤동주 시인이 들여다 본 우물로 여길 날이 분명 있을 것이다. 하늘 구름이 담긴 우물을 들여다보는 시인의 마음은 때때로 가엾고 때때로 부럽다. 그의 마음을 흉내낼 수 없음에 부럽고, 그 마음이 스스로를 옥죄는 참극이 가엾고 안타깝다. 그냥 수용하고 살 수도 있으련만은 그는 그러지 않는다. 수용이 곧 패배, 죽음이기 때문이다.

 

  백시나 씨는 왜 시집의 제목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라고 했을까. 몰랐다. 그러면 지금은 알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는 소월의 시집을 묶으면서 무엇을 깨달았을까. 그의 시에 대해서? 아니면 그의 죽음의 진상 파악? 적어도 나는 소월의 긴 이야기를 시의 여백에서 만났다. 만날 수 있었다. 모두 백시나 씨의 수고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백시나 씨 덕분에 나는 시의 여백에서 소월의 수다를 느낀다. 절망의 수다를 느낀다. '이상'의 시 오감도에서 도망치는 아해들과는 다른 공포를 느낀다.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봄 가을 없이 밤마다 돋는 달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렇게 사무치게 그리울 줄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달이 암만 밝아도 쳐다볼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제금 저 달이 설움인 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달, 그리움, 서러움...

  봄 가을 밤마다 돋는 달을 시적화자는 몰랐었다고 한다. 그것이 그리움이고, 설움인 것을 몰랐다고 고백한다. 아무리 밝아도 쳐다볼 줄을 몰랐다고 한다. 김소월의 시를 수동적으로 자주 접해왔기 때문에 진실로 다가가지 못한 나를 꼬집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백시나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나는 나의 방식대로 소월 시의 수다를 만나고자 한다. 아마 에움길을 걷는 형상을 보이리라. 그렇지만 시의 행간에 난 길을 따라 간다.

 

  <초혼>, <산유화>, <접동새> 등 익히 아는 시는 시를 해부하지 않아도 좋다. 시험지에서 틀린 답을 적어도 괜찮다. 이미 내 것으로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바라건대 우리에게 우리의 보섭 대일 땅이 있었드면>을 만날 때에는 여린 감성의 시적화자를 자주 창조해낸 소월의 시에서 사람냄새를 맡고서 놀라기도 한다. 슬픔을 즐겨야 하는 시적화자와는 달리 한숨을 손에 움켜쥔 시적화자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가을 저녁에

 

                                            물은 희고 길구나, 하늘보다도.

                                            구름은 붉구나, 해보다도.

                                            서럽다, 높아 가는 긴 들 끝에

                                            나는 떠돌며 울며 생각한다, 그대를.

 

                                            그늘 깊이 오르는 발 앞으로

                                            끝없이 나아가는 길은 앞으로.

                                            키 높은 나무 아래로, 물 마을은

                                            성긋한 가지가지 새로 떠오른다.

 

                                            그 누가 온다고 한 언약도 없건마는!

                                            기다려 볼 사람도 없건마는!

                                            나는 오히려 못 물가를 싸고 떠돈다.

                                            그 못물로는 놀이 잦을 때.

 

 

  만 사람에게 만 가지 고통과 애한이 있다. 물과 구름이 서럽다고 시적화자는 말한다. '떠돌며 울며 생각한다, 그대를' 그리고 마침표를 꾹 눌러찍었다. 언약이 없다고, 기다릴 사람도 없다고 느낌표를 친다. 그리고 다시금 마침표를 행마다 찍어둔다. 못물에 놀이 잦아진다는 것은 달리 생각하면 어둠이 가까워졌음을 말한다. 시적화자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있다. 어차피 노을은, 자연현상은 반복되며 순간적인 것이다. 그러한 속성을 빌려 시적화자는 스스로를 노래한다. 떠돌며 울며 생각한다. 물가를 벗어나지 못하고 떠돈다. 소월 시의 전부라고 해도 그릇되지 않을 것이다. 잊지 못하는, 버리지 못하는 마음. 그것은 집착일 수도 있고 절대순수일 수도 있다. 나는 그냥 진실함이라 부르고 싶다.

 

 

낙천

 

 

                                            살기에 이러한 세상이라고

                                            맘을 그렇게나 먹어야지,

                                            살기에 이러한 세상이라고, 

                                            꽃이 지고 잎 진 가지에 바람이 운다.

 

 

 시인은 시적화자를 통해서 절망스러운 상황에도 빛을 남기고 있다. 절망적 이미지 강한 시를 읽어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속에는 삶에 대한 희망이 웅송그리고 있다. 그것을 발견해주기를 바라면서 시인은 시적화자를 내세워 우리에게 감흥을 주는 것이리라.

  너무 익숙해서, 가볍게 자주(교과서, 텔레비전, 여타 문학, 비문학) 만나왔던 터라 소월의 시에 심드렁해져 있는 상태에서 백시나 씨가 묶은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는 참으로 귀한 선물이다. 게다가 이북에서 돌아가신 소월의 전생애에 대한 명확한 정보를 전달하고 있다. 소월의 삶에 대해서 자제분이 지니고 있었던 자료를 통해서 새로운 김소월 평전을 백시나 씨는 만들어냈다. 시집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는 우리가 가진 귀한 시인과 시를 다시금 돌아보게 하고 아울러 지금 우리 시대에 살고 있는 김소월과 같은 시인을 찾아내기를 바라는 마음도 담겨 있다. 2000년대 한국에는 또다른 소월이 있거나 성장하고 있을 것이다. 그를 알아볼 눈을 키워야겠다.

 

 

 

 

 

 

 

 

 

 

 

 

* 이번에 소월 시를 읽으면서 느낀 것은

유난히 쉼표, 느낌표가 많다는 것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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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저편, 길을 나서다 -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여행이야기
안홍기 지음 / 부표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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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안홍기 :

 

영화 저편, 길을 나서다

(부표/ 총 263쪽)

 

 

 

 

 

 

 

 

 

   

 

  간혹 그런 때가 있습니다. 책 곳곳에 내가 생각하던 그대로를 옮겨 놓은 듯, 내가 보고 느꼈던 것들이 그대로 옮겨져 있는 듯 착각하게 되는 책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혼란은 혼동을 일으켜 내가 써놓은 게 아닌가, 의심이 되어서 자주 글쓴이의 활자로 박힌 이름 석 자를 확인하게 되는 책이 있습니다. 행복한 거죠. 그런 행복한 책을 부표 출판사에서 만들어냈습니다. <영화 저편, 길을 나서다>(이하 <영화저편>)가 바로 그 책입니다. 여행정보와 감상에 균형을 잘 지켜낸 책. 그리고 영화 이야기가 담백하게 담긴 책. 사진이 아름다운 책 <영화 저편, 길을 나서다>입니다. 책의 부제로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여행이야기"가 책 전체를 잘 대변해 주는군요.

 

  안홍기 씨는 떠남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그저 여행이 좋아서 떠난다. (...) 얻은 만큼 두고픈, 어떻게든 나의 한 부분을 그곳에 살게 하고 싶은 나의 객기(머리카락을 뽑아놓고 돌아온답니다.^^) (...)  때때로 우리는 시공간을 초월해 함께할 수 있다는 것. 여행 이야기도 마치 어제 본 영화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기억에 관한 것이다. 나의 기억이 타인의 기억이 되기도 하고, 타인의 기억이 나의 추억이 되기는 하는, 여행과 영화가 가지는 힘이리라.

  이 책의 모든 여행과 영화는 한 줄이 될 수도 있다. (...) 한 줄이 되고도 남는 마음을 한숨처럼 술 한 잔에 내려놓기만 해도 족하다."

 

  우리의 이야기는 안홍기 씨의 말씀처럼 '한 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 책을 먼저 훑어봤을 때 유독 사진에 눈이 끌립니다. 그래서 이름도 그렇고, 사진의 느낌도 있고 해서 저자가 남자일 것이라 추측했습니다. 그러나 보기 좋게 틀렸더군요. '여자로서 여행하기'가 힘들다는 말씀에, 옆에 누군가 함께 있었나? 여동생에 호칭이 '언니'? 여성분의 책이라 여기니 존경이 샘솟더군요. 여자로서, 그 넓은 길을 걸었다 생각하니 존경스럽더군요. 하지만 존경해야 할 일은 성별 문제만이 아닙니다. 이 책에서 저자가 써내려가는 여정과 감상은 편협하지 않고 절제하며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은 더없이 온화하고 깊고 따뜻한 철학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한 내용이 영화와 한 치 어그러짐 없이 잘 어우러져 있습니다. <영화 저편>을 읽으면서 목마름이 씻겨 내려가는 듯한 착각이 들었습니다. 그 착각은 감동이겠죠.

 

  "영화는 영화로 그냥 두는 편이 더 좋다. 내 여행을 하자." 누구나 사랑하게 된다는 도시, 파리에서 안홍기 씨는 현실과 이상의 벽을 인정합니다. 영화 속 주인공들이 걷던 길을, 극적환상에서 깨어나 자신의 중요성을 자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있는 곳에서의 우리의 중요성에 대해서 피력하고 있습니다. 파리에서 <아멜리에>를, <비포 선라이즈>의 두 연인을 찾으려는 허망한 걸음 억누르고 그는 그의 여행에 몰두합니다. 이러한 고찰은 <여행 저편>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노트에 옮겨 적다가 아예 책을 노트 삼기로 할 정도로 많은 말들이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고 있습니다.

 

  "(...) 지는 해는 그들에게 슬픈 것이 아니라 편협한 관광객에게나 슬프다. 변변한 일거리 하나 갖지 못한 그들의 삶을 바라보는 여행자에게나 슬픈 해다.(...) 부자의 여행자가 되기보다 긴 여정의 여행자이기를 선택한 나는 한 번도 나의 가난이 창피한 적이 없었다. 모두 함께 가난하면 가난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가난으로 지는 해는 슬프다. (...) 그들은 자신의 가난이 위험하다는 것을 모르고 웃는다. (...) 경제의 풍요가 만들어 낸 우습지도 않은 아이러니다. (...) 해가 지기 전에 (...) 동네를 나와야 했으므로, 버리고 떠날 수 없는 여행자의 가련함이다. 허나 그들에게는 나도 부자였다.(...)"

 

  아프리카를 여행하면서 저자는 이러한 감상을 털어놓는다. 아프리카 사람들의 생활을 자연스럽게 묘사하고 있으면서 그들과의 거리를 알맞게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러브 인 아프리카>를 자연스럽게 소개한다.

 

  "영화 <러브 인 아프리카>가 고마운 것은 아프리카를 전혀 미화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 그저 바라볼 뿐이다. (...) 문제가 (...) 무겁지만 섣부른 결론을 도출하려 하지도 않는다. 모든 갈등의 화해는 초원이 대신해 준다."

 

  이제는 <러브 인 아프리카>의 내용도 가물가물한 내게 이렇게 상세하고 정확한 영화평으로 짚어주고 있었다. 그래서 몇 번이고 안홍기 씨의 약력을 살피게 되었다. 책표지에 있는 그의 사진, 아 이것이 그의 사진이구나. 어느 영화의 한 장면을 옮겨 놓았다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사진의 주인공이 안홍기 씨이다. 그에를 선망하며 자주 이 책 <여행 저편>을 찾을 것 같다. 그리고 <영화 저편>에서 소개해준 영화를 시간 나면 짬짬이 찾아봐야겠다. 그리고 안홍기 씨의 영화평을 따라하며 정리를 해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된다.

 

  "사람들이 왜 자꾸 떠나느냐고 묻는다. (...) 정말로 나는 대답할 말이 없다. 그저 여행이 좋아서 간다는 말밖에는 할 말이 없다."

- 머리말 <타인의 기억으로 남기> 서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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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남겨진 생이 3일밖에 없다면
구효서 외 지음 / 생각하는백성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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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효서 외 17인

(구효서, 김지룡, 김영수, 박기현, 신현림, 이경기, 이기현, 이재운, 이평재, 임동헌, 원재훈, 장우현, 장석주, 정관용, 정우영, 정희성, 황필호, 현길언) 

나에게  남겨진  生이  3일밖에  없다면
(생각하는백성, 2003)

  뭐하겠다는 특정한 생각은 없습니다. 우선은 눈앞이 캄캄하겠죠. 막막하겠죠. 온갖 회한들이 밀려들겠죠. 속으로 비통해하다가 결국에는 남은 시간 동안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곰곰이 살펴보게 될 겁니다. 아마도 그럴 겁니다. 사흘 동안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요. 마지막,은 사람을 궁지로 내모는 습성이 있습니다. 마지막,은 때때로 앞뒤 생각도 없이 무모해지게도 합니다. 마지막(종말)을 올곧게 대처하지 못해서 때때로 한 존재가 낙락으로까지 몰락해가는 모습을 안쓰럽게 목격하기도 합니다. 


  <나에게 남겨진 生이 3일밖에 없다면>(이하 <3일>)은 3일의 시한부 삶을 제시하고 그에 따라 문학, 비문학에 종사하는 내로라하는 분들이 쓴 짧은 수필을 묶은 책입니다. 형식적으로는 동일 주제를 다른 방면으로 모색하는 형식으로 볼 때 피카레스크식 구성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구성은 장단점이 있게 마련입니다. 우열로써 글쓴이의 감성을 저울질하는 단점이 있는 반면에 여러 관점을 통해 한 주제를 심층적으로 파고드는 이점도 있습니다. 

  쉽게 읽히는 부분이 있는가 하면 솔직히 읽고 있으면 글쓴이의 문장이나 맞춤법 표기가 안쓰럽기도 한 부분이 없지 않습니다. 하지만  글쓴이들의 죽음을 고찰하는 모습을 대하게 되면 진정성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글에서 나와는 전혀 다른 삶의 자세를 배우게 됩니다. 내가 하지 못한 생각을 그들의 글에서 만나고 삶에 대한 자세를 배우게 됩니다.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며 사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모든 사람이 죽음을 알고 있지만, 숨쉬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럽게 잊고 삽니다. 다른 사람의 죽음을 접하게 될 경우, 그가 자신과 가깝거나 가까웠거나 오랫동안 잊고 지냈거나 그렇지 않았더라도 부음을 전하게 되면 충격에 휩싸이게 됩니다. 아직 살아남아 있는 나에게만은 언제나 먼 훗날의 일로만 여겨지는 죽음에 대해서 <3일>은 말합니다. 우리의 피 속에는 우리 조상의 숨결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조상의 숨결, 그들의 삶이 훈습으로 이어져오는 오늘을 우리는 자각하지 못하고 살고 있습니다. '돌아가셨다' 그곳으로 우리도 '돌아갈' 것이다. 

  한민족의 사상을 현세지향적이라고 요약을 하는 책을 자주 접하게 됩니다. 그러한 책들을 접할 때마다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서양종교가 급물을 타고 밀려들었을 때 한민족의 절반 이상이 동학교도였다는 사실은 당시 현세지향적인 우리의 민족성을 잘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동학은 현세구복적 신앙입니다. 지금에서야 어떻게 굴절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게으른 탓에 면밀히 파악하지는 못하지만 그 뜻에 있어서만은 어렴풋이 보게 됩니다. <3일>의 내용도 남은 며칠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서술되고 있지만 그 내용은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시한부로 제시된 사흘이 끝이 아니라는 주제의식이 잘 드러나는 책이 <3일>입니다. 

  <3일>을 사흘도 안 되어 다 읽고는 남은 삶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한참 뒤에는 지금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글쓴이 여럿인 책을 읽을 때는 각기 다른 서술 - 문체와 주제를 다루는 표현방식에 곧잘 맥을 끊기게 되는 단점이 있지만 <3일>은 기갈 든 마음을 촉촉히 적셔줄 만한 내용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마음이 한 자리 못 앉아(박재삼 시인의 행^^;;- 요즘 자주 인용하게 되는군요 )' 있을 때 읽어 보시면 좋을 것이라 여깁니다. 그래서 어느 지루한 날을 위한 준비로 이 책 <3일>을 권하고 싶습니다. 가볍게 읽고 진중하게 생각해보실 수 있는 책이 <3일>입니다. 도서관 한켠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책이 많다는 것을 다시금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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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 미술관 마로니에북스 세계미술관 기행 1
파올라 라펠리 지음, 하지은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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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올라 라펠리 (하지은 옮김):

 

 

반 고흐 미술관

 

(마로니에북스/ 총 160쪽)


 

  중학교 미술시간이었다. 내가 처음 고흐를 알게 된 것이 폐지했던 교복 입기가 다시금 실시되던  시대였다. 볕이 부드럽고 졸음이 오는 시간, 괴팍한 미술선생은 체육선생과의 염문을 뿌리며 봄날을 보내고 있었다. 아는지 모르는지 알면서 모른체하는지, 아니면 근거없는 이야기인지. 나는 고흐의 그림을 보면 그 미술선생이 먼저 생각난다. 손끝이 매워서 자주 매를 들던 미술선생은 고흐의 생애에 대해서 더없이 맛깔나는 수업을 해주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고흐처럼 살고 싶다'

라는 생각 없는 생각을 했었다.

 

  고흐같은 사람이 옆에 있다면 아마 주위사람들  갑갑증에 못 견뎌 혀를 내두를 것이다. 하지만, 그의 열정과 날카로운 눈매는 무섭지만 본받을 만하다. 그의 그림이 얼마나 훌륭한지는 짚어낼 안목과 식견은 없지만, 그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나는 붓자국 하나하나가 주는 독특한 개성에 눈이 빨려들어가는 황홀을 경험하게 된다. 나를 보라, 내게로 오라. 고흐의 그림은 온몸으로 부르는 것 같다. 그러는 것 같다. 그의 작품에는 고흐는 없고 그림만이 존재한다. 그림을 모르는 터라 고흐의 여느 작품을 보더라도 고흐가 그렸겠다 추정하지 않고 그냥 말한다.

 

  '참 신기한 그림이다. 날카로우면서, 둔탁한 느낌. 마치 붓자국 하나하나가 존엄성을 지닌 것 같다.'

  '좋다.'

 

  반 고흐 미술관은 마로니에북스의 세계미술관 기행 중 하나이다. 다른 미술관은 지명을 따 붙인 듯한데 반 고흐 미술관은 화가의 이름을 전면에 내세웠다. 미술관의 연역, 고흐의 생애, 고흐의 손에서 벗어난 작품들, <반 고흐 미술관>에 소장된 그림들을 우선으로 서술되고 있다. 그림 한편에 담긴 사연과 그림 내적인 설명에서 역사성까지. 아, 그래서 그렇구나. 익히 봐왔던 낯익은 그림들에 담긴 사연들과 그림 보는 법을 <반 고흐 미술관>에서 만날 수 있다. 왜 고흐의 작품들이 작가 사후 그토록 각광받는지, 고흐의 고뇌가 무엇이었는지 우리는 세계미술관기행 <반 고흐 미술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반 고흐 미술관>은 서문,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작품들, 미술관 안내, 화가 및 작품색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고흐의 작품을 소장한 미술관에 대한 현재와 과거, 그리고 미래를 조망하는 책이다. 미술관은 작품에 의해 위엄이 좌우된다. 그런 면에서 '반 고흐 미술관'은 다른 미술관에 고흐의 작품을 많이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고흐의 대부분의 작품은 이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책에서 우리는 미술관에 대해서 알아서 좋지만 일차적인 관심은 고흐와 그의 작품에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테오에게(고흐의 동생). 지금 내 작품이 팔리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언젠가는 내 그림들이 거기에 사용된 물감보다, 그리고 내 인생보다 더 가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현재 웃돈으로도 구입할 수 없는 많은 미술작품들의 주인공들 대부분은 삶이 평온하지 못했다. 고흐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고흐의 삶이 순탄치 못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예술가들의 삶이 대개 그러하듯 그의 고뇌는 단지 경제적인 문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왜 그렇게 힘들었을까. 왜 그는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나갔을까. 그것은, 그것이 고흐의 진실성이었기 때문은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고흐의 모든 작품이 속물적인 잣대에 걸려 고가로 팔리고 있지만 과연 그의 그림을 소장한 사람들은 얼마나 고흐를 이해하고 있을지 의문이다.

  강인한 고흐의 갸날픈 감정이, 삶에 대한 애착이 드러나는 작품 "꽃이 핀 아몬드 나뭇가지"가 <반 고흐 미술관>을 읽으면서 내게는 가슴 저미게 읽혔다. 귀를 자른 고흐로만, 괴팍한 예술가로만 기억되던 그에게서 인간적인 면모를 발견한 것이다. 동생 테오의 아들을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해 그렸던 이 작품은 고흐의 다음 말이 있었기 때문에 더욱 가치롭다.

  "(...) 너희 부부 침실에 걸 수 있는 그림을 하나 그리기 시작했어.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곷이 핀 굵은 아몬드 나뭇가지가 있는 그림이지... 평온한 마음과 안정적인 터치로 그랬어." 조카가 태어난 기쁨에서 고흐는 이 작품을 그랬다. 고흐는 이 작품을 연작으로 그리려고 했으나 실현되지 못했다.

  "테오에게. 아몬드 나무의 꽃을 그리는 동안 몸이 안 좋았단다. 그림을 게속 그릴 수 있었다면 꽃이 피는 다른 나무도 그렸을 텐데. 이제 더 이상 꽃을 피우고 있는 나무는 없어. 나는 정말 운이 없다."

  붓이 내동댕이쳐졌을 광경이 눈 앞에 선하다. 아니 붓에 앉았을 먼지가, 그 먼지 앉은 붓을 보는 힘없는 고흐의 눈이, 누운 그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눈 감는 순간까지도 고흐에게는 회한으로 남지 않았을까.

  고흐의 많은 작품중에서 나는 새로이 "꽃이 핀 아몬드 나뭇가지"를 만났다. 분명 어느 책자에서 보았을 그림이다. 그렇지만 마로니에북스의 <반 고흐 미술관>에서 이 작품은 내게로 왔고, 생명을 얻었다. 이름을 불러 주기 위해서, 나는 이 작품과 고흐의 눈물 사이에 붉은 밑줄을 그었다.  

   

 

 

 

  수업 절반 이상을 고흐에 할애한 그 여선생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의 그림은 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새삼스레 그 사실이 그 여선생의 근황보다 더 궁금하다. 어째서, 그는 자신의 그림을 제자에게 보여주지 않았을까.

  그에게 "꽃이 핀 아몬드 나뭇가지"를 보여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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