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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 현대시 100년, 사상 최고의 시인
김소월 지음, 백시나 엮음 / 천케이(구 티알씨)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김소월
(백시나 / 천케이 2007 / 총 247쪽)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소월의 시 더 이상 새롭지 않다. 소월의 시를 새롭게 읽기 위해서는 더 오래 들여다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김소월 시집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는 새롭다. 오래 들여다보려 했지만 쫓기는 마음이라 그러지 못한 것이 아쉽다. 어느 때고 언젠가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를 윤동주 시인이 들여다 본 우물로 여길 날이 분명 있을 것이다. 하늘 구름이 담긴 우물을 들여다보는 시인의 마음은 때때로 가엾고 때때로 부럽다. 그의 마음을 흉내낼 수 없음에 부럽고, 그 마음이 스스로를 옥죄는 참극이 가엾고 안타깝다. 그냥 수용하고 살 수도 있으련만은 그는 그러지 않는다. 수용이 곧 패배, 죽음이기 때문이다.
백시나 씨는 왜 시집의 제목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라고 했을까. 몰랐다. 그러면 지금은 알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는 소월의 시집을 묶으면서 무엇을 깨달았을까. 그의 시에 대해서? 아니면 그의 죽음의 진상 파악? 적어도 나는 소월의 긴 이야기를 시의 여백에서 만났다. 만날 수 있었다. 모두 백시나 씨의 수고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백시나 씨 덕분에 나는 시의 여백에서 소월의 수다를 느낀다. 절망의 수다를 느낀다. '이상'의 시 오감도에서 도망치는 아해들과는 다른 공포를 느낀다.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봄 가을 없이 밤마다 돋는 달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렇게 사무치게 그리울 줄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달이 암만 밝아도 쳐다볼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제금 저 달이 설움인 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달, 그리움, 서러움...
봄 가을 밤마다 돋는 달을 시적화자는 몰랐었다고 한다. 그것이 그리움이고, 설움인 것을 몰랐다고 고백한다. 아무리 밝아도 쳐다볼 줄을 몰랐다고 한다. 김소월의 시를 수동적으로 자주 접해왔기 때문에 진실로 다가가지 못한 나를 꼬집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백시나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나는 나의 방식대로 소월 시의 수다를 만나고자 한다. 아마 에움길을 걷는 형상을 보이리라. 그렇지만 시의 행간에 난 길을 따라 간다.
<초혼>, <산유화>, <접동새> 등 익히 아는 시는 시를 해부하지 않아도 좋다. 시험지에서 틀린 답을 적어도 괜찮다. 이미 내 것으로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바라건대 우리에게 우리의 보섭 대일 땅이 있었드면>을 만날 때에는 여린 감성의 시적화자를 자주 창조해낸 소월의 시에서 사람냄새를 맡고서 놀라기도 한다. 슬픔을 즐겨야 하는 시적화자와는 달리 한숨을 손에 움켜쥔 시적화자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가을 저녁에
물은 희고 길구나, 하늘보다도.
구름은 붉구나, 해보다도.
서럽다, 높아 가는 긴 들 끝에
나는 떠돌며 울며 생각한다, 그대를.
그늘 깊이 오르는 발 앞으로
끝없이 나아가는 길은 앞으로.
키 높은 나무 아래로, 물 마을은
성긋한 가지가지 새로 떠오른다.
그 누가 온다고 한 언약도 없건마는!
기다려 볼 사람도 없건마는!
나는 오히려 못 물가를 싸고 떠돈다.
그 못물로는 놀이 잦을 때.
만 사람에게 만 가지 고통과 애한이 있다. 물과 구름이 서럽다고 시적화자는 말한다. '떠돌며 울며 생각한다, 그대를' 그리고 마침표를 꾹 눌러찍었다. 언약이 없다고, 기다릴 사람도 없다고 느낌표를 친다. 그리고 다시금 마침표를 행마다 찍어둔다. 못물에 놀이 잦아진다는 것은 달리 생각하면 어둠이 가까워졌음을 말한다. 시적화자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있다. 어차피 노을은, 자연현상은 반복되며 순간적인 것이다. 그러한 속성을 빌려 시적화자는 스스로를 노래한다. 떠돌며 울며 생각한다. 물가를 벗어나지 못하고 떠돈다. 소월 시의 전부라고 해도 그릇되지 않을 것이다. 잊지 못하는, 버리지 못하는 마음. 그것은 집착일 수도 있고 절대순수일 수도 있다. 나는 그냥 진실함이라 부르고 싶다.
낙천
살기에 이러한 세상이라고
맘을 그렇게나 먹어야지,
살기에 이러한 세상이라고,
꽃이 지고 잎 진 가지에 바람이 운다.
시인은 시적화자를 통해서 절망스러운 상황에도 빛을 남기고 있다. 절망적 이미지 강한 시를 읽어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속에는 삶에 대한 희망이 웅송그리고 있다. 그것을 발견해주기를 바라면서 시인은 시적화자를 내세워 우리에게 감흥을 주는 것이리라.
너무 익숙해서, 가볍게 자주(교과서, 텔레비전, 여타 문학, 비문학) 만나왔던 터라 소월의 시에 심드렁해져 있는 상태에서 백시나 씨가 묶은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는 참으로 귀한 선물이다. 게다가 이북에서 돌아가신 소월의 전생애에 대한 명확한 정보를 전달하고 있다. 소월의 삶에 대해서 자제분이 지니고 있었던 자료를 통해서 새로운 김소월 평전을 백시나 씨는 만들어냈다. 시집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는 우리가 가진 귀한 시인과 시를 다시금 돌아보게 하고 아울러 지금 우리 시대에 살고 있는 김소월과 같은 시인을 찾아내기를 바라는 마음도 담겨 있다. 2000년대 한국에는 또다른 소월이 있거나 성장하고 있을 것이다. 그를 알아볼 눈을 키워야겠다.
* 이번에 소월 시를 읽으면서 느낀 것은
유난히 쉼표, 느낌표가 많다는 것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