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그린 그림 - 미술사 최초의 30가지 순간
플로리안 하이네 지음, 최기득 옮김 / 예경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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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읽는 동안 다양한 정보를 얻어 즐거웠다. <거꾸로 그린 그림>은 서양화의 발전을 한눈에 살필 수 있는, 제법 두툼한 책이다. 색인까지 다 포함해서 400쪽에 약간 못 미치는 이 책은 화법의 변천에 대해서 간략하게 알아볼 수 있다. 정치, 종교의 영향력 아래 있을 때 예술의 표현력이 축소될 수밖에 없었던 중세 미술사, 종교의 그늘에서 서서히 벗어나면서 다양한 화법을 구사한 서양사에 대해서 <거꾸로 그린 그림>은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다.

 

  스케치와 수채 물감에만 국한된 개인적 경험이 전부인 나는 속도를 화폭에 옮기게 되는 그 과정이 흥미로웠다. 그리고 후에 석판화가 흥하게 되는 계기가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경제적인 이유였다는 것이 현실과 상상의 경계에서 몹시 절망하는 예술가들의 초상이 일반인과 크게 다를 수 없다는 것에서 사람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어쩌면 예술 역시 필요에 의한 '생산'일 수도 있겠다는 단상을 해 본다.

 

  인간의 활동은 권력의 수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사람은 역치 이상의 자극에서는 둔감해진다. 때릴수록 더 강해진다는 말은 오로지 강철에 한하여 있을 법한 소리이다. <거꾸로 그린 그림>은 '권력'의 경계 밖에서 예술혼을 불태운 사람들에 대해서 간간이 소개하지만, 대부분이 주류에 초점을 두고 있다. <거꾸로 그린 그림>은 그런 측면에서 힘의 논리를 강조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것에 한하여 이 책을 살핀다면, <거꾸로 그린 그림>의 의미가 축소되고 만다. '거꾸로'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 지금 여기 현재를 기준하여 과거의 작품들을 재조명하는 데에 그 의미가 있다.  물질문명에 익숙해지면 그 위대함을 경시할 수가 있다. 늘 감동할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굉장한 피로감을 줄지도 모른다. '거꾸로'에는 이미 익숙해진 그림에 대하여, 현재 사용되고 있는 다양한 표현기법이 어떠한 과정을 거치면서 현재에 이르렀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거꾸로'는 현재를 다지 조명하고 있다. 그래서 이 책에서 제시되고 있는 그림은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한, 나에게도 <해돋이> 이외는 한 번도 보지 못한, 교과서에서도 없었던 상당한 그림들이 제시되고 있다.

 

  명화를 살피고, 안내하는 미술책은 예전에도 얼마든지 많았다. 그러나 <거꾸로 그린 그림>은 그 서술적인 측면에서 새로운 관점을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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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개입니까 사계절 1318 문고 62
창신강 지음, 전수정 옮김 / 사계절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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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서고금 막론하고 동물을 의인화한 이야기가 많다. 사물이나 동물의 의인화는 세태를 풍자하고 인간 본성을 파헤치는 한 방식으로, 그 접근 방식이 재미있으면서 폐부를 울리는 메시지를 담는다. 꾸준히 사랑받고 있는 '구미호'도 동물을 의인화한 대표적 작품 중 하나이다. '구미호'는 단순한 의인화가 아니라 '변신'이라는 매혹적인 소재를 차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타 작품들과 구별된다. 인간이 되고 싶은 강한 소망을 품은 천 년 묵은 여우의 이야기는 무섭기보다는 구슬프다. 인간의 배신으로 사람이 될 기회를 잃고 인간 세상을 떠나는 여우의 이야기는 시사하는 바가 많다. 절대 인간을 믿지 마라. 한 서린 여우의 목소리는 인간의 비열(鄙劣)과 나약(懦弱)을 폭로한다. 그럼에도 인간 삶을 포기하지 못하는 구미호의 미련은 유한한 인간 삶의 귀중함을 일깨워준다. 창신강의 소설 <나는 개입니까>를 읽으면서 내가 '구미호'를 떠올린 것은 우연이 아니다. 지하 배수로에 살던 한 마리의 개가 하늘(맨홀manhole)을 뚫고 나와 인간으로 변신한다는 이 작품 역시 '변신'을 소재로 한 우화이기 때문이다.

 

 

   지하 배수로에 살던 '나'는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마지막 말 '창구'의 존재에 호기심을 품는다. 어린아이의 집요한 호기심으로 마침내 '창구'의 존재가 머리 위 하늘, 맨홀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나'에게 '창구'의 존재와 그 너머 인간 세상에 대해 알려준 것은 '연분홍 지렁이'이다. '창구'가 무엇인지 알게 된 '나'는 그 틈으로 흘러들어오는 소리와 냄새와 빛을 느끼며 지하 너머 세계에 대한 동경을 품게 된다. 가족의 상징인 이빨을 부러뜨리고 사라진 작은형이 자극이 되어 '나'는 마침내 그토록 동경해 마지않던 인간 세상으로 나오게 된다. 인간 세상에 나온 '나'는 개가 아니라 인간의 몸으로 변신해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몸은 인간이지만 여전히 개의 본능과 습성을 간직하고 있는 '나'가 겪어내는 인간 세상은 개의 그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자신보다 약한 자의 것을 약탈하면서 강한 자 앞에서는 굽신거리는 인간의 이중적인 모습은 오히려 개만도 못하다. 그럼에도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남아 있는 '순수함'에서 '나'는 개의 인생과 맞바꾼 인간의 가치를 확인한다. 개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은 달라서 개의 일 년치 시간이 인간의 한 달이라고 알려준 것은 연분홍 지렁이 '류웨'이다. 인간 세상으로 나온 '나'의 앞에 '류웨'는 어느 날 소녀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자신에게 '창구'의 존재를 알려준 소중한 친구를 만난 '나'는 기뻐하지만, 그 기쁨은 잠시, 아버지와 작은형, 그리고 누나의 죽음을 겪고 슬픔에 빠진다. 그리고 그 자신도 빠른 속도로 나이를 먹어가는 것을 발견한다.

 

 

   한 마리의 개가 인간으로 변신한다는 파격적인 이야기는 흥미 위주의 판타지를 겨냥한 것은 아니다. 앞서 언급한 '구미호'가 인간이 되고 싶은 여우의 한(恨)을 통해 인간 세계를 조명하고 있다면, 본 작품은 가족의 품을 벗어나 세상 밖으로 나온 '나'가 하나의 독립된 존재로 성장해 나가는 과정을 그린 성장소설의 요소가 강하다. '지하 세계', '창구(manhole)', '연분홍 지렁이', '창구 너머 세상', 그리고 '변신'이라는 모티브는 '나', 한 소년의 성장을 위한 효과적인 장치로 작용한다. 몸을 날려 가족의 상징인 이빨을 부러뜨리고 창구 너머 세계로 나온다는 설정은 태어나기 위해서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는 데미안의 교훈을 생각나게 한다. 연분홍 지렁이 '류웨'는 개의 본능과 인간의 육체 사이에서 혼란을 느끼는 분열된 자아의 상징으로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사라진 류웨를 찾아나선다는 결말은 결국 '나'의 정체성을 찾는 여행의 시작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개입니까'라는 제목 역시 자신의 정체성을 묻는 소년의 목소리로 들린다. 급격한 정서적, 신체적 변화를 겪는 청소년기는 그야말로 격동의 시기이다. 그 어두운 터널을 지나는 소년의 성장통을 '개'의 변신이라는 환상적 소재로 그려낸 작품 <나는 개입니까>. 쉽고 재미있게 읽히는 매혹적인 성장소설이다. 날로 변신하고 있는 청소년들에게 일종의 '창구'가 되어줄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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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얼굴이 더 빨갛다
김시민 지음, 이상열 그림 / 리잼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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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빠 얼굴이 왜 빨개졌을까. 책 제목은 궁금증을 유발한다. 목차를 훑어보아도 ‘아빠 얼굴이 더 빨갛다’라는 제목이 없다. 잠시 궁금증을 접고 책장을 넘기다 나는 아빠 얼굴이 왜 빨개졌는가를 알게 되었다. ‘아빠 얼굴이 더 빨갛다’는 ‘참 이상해!’라는 시의 일부이다. 좋아하는 여자친구가 생긴 아이가 아빠에게 묻는다. “아빠도 어렸을 때 여자 친구 있었어요?” “당연히 있었지!” 아빠가 아닌 엄마가 냉큼 대답을 한다. 어린 아들과 아내 사이에서 눈치를 살피던 아빠의 얼굴이 빨개지는 것을 아이가 포착한다. “어렵게 말 꺼낸 나보다 아빠 얼굴이 더 빨갛다”라고 한다. 아빠와 엄마, 그리고 아이의 모습이 눈앞에 선연히 그려진다. 아빠와 엄마, 아빠와 아들의 대립구도가 재미있다. 아이는 아빠에게서, 아빠는 아이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는 상황이 정겹다.




   

   어른이 쓴 동시보다는 아이가 직접 쓴 글을 선호하는 편이다. 어른이 쓴 글에는 아무래도 어른의 기교가 끼어들게 마련이다. 그래서 감동이 덜하다. 나는 이 동시집이 어른이 엮은 건 줄 몰랐다. 대부분의 시 안에 아이의 마음과 목소리, 표정이 잘 살아있다. 어른이 쓴 동시도 이처럼 아이의 마음을 잘 반영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세상 모든 어른들도 아이였던 적이 있었다는 새삼스러운 사실을 떠올렸다. 김시민 씨의 동시들은 그 순수의 시절을 되살린다. 아이에게는 공감과 위안을, 그리고 어른에게는 그리움의 정서를 돌려준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아이와 어른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생각이다. 대체 그 경계가 무엇일까. 거뭇거뭇 수염이 나고 회사엘 다닌다고 해서 어른일까. ‘아빠는 어린애’라는 시에서 아이는 아빠 안에 살고 있는 아이의 모습을 본다. 아이의 눈에 비친 아빠는 어린애 같다. ‘나’가 잠자리에 들면 발가락 간질이고 비석치기해서 이기면 두 팔 번쩍 들며 ‘나’를 놀린다. 새 옷을 입으면 좋아 웃고, 게임할 때는 ‘나’보다 더 흥분해서 큰소리를 낸다. 여기까지는 아이가 아빠의 ‘아이다움’을 사랑스럽게 바라본다. 그런데 마지막 연에서 아빠는 ‘나쁜 어린애’라 한다. 술 마시고 담배 피는 나쁜 어린애. 이 시를 읽으면서 나는 절로 웃음이 났다. 두 팔 번쩍 들고 호들갑 떠는 아빠의 모습을 쳐다보는 작은 아이의 그림 때문만은 아니다. 술 마시지 마라, 담배 끊어라. 어머니와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나는 어른이 되어서도 ‘엄마’ 말을 듣지 않아 속을 썩이는 ‘나쁜 어린애’가 아닌가. 하루 금연하고 죽을 것처럼 비실대다 결국 아침 출근길에 담배 한 개비를 태우던 내 모습이 그려졌다. 엄마, 나도 착해지고 싶어요.


 





따뜻한 밥





동생이 태어난 후

엄마도 아빠도

나에게는 

눈길 한번 안 주고




동생에겐

까꿍 까꿍

쪽쪽




서러워

일기장에 

썼던 날




참 따뜻한

저녁밥이 

날 기다리고 있었어


 

   안하던 공부를 해보겠다고, 비싼 문제지를 신청해놓고는 얼마간은 열심히 풀어댔던 것 같다. 그러다 조금씩 게을러지고 미루고 미루면서 새 문제지들이 산을 이루었다. 나의 게으름은 아버지에게 발각되었고, 꾸짖는 아버지에게 잘못했다,하면 되었을 걸, 겁도 나고 화도 나서 집을 뛰쳐나왔다. 그리고 집 담벼락 사이에 몸을 숨기고 앉아 분노를 씹고 있었다. 날이 어둑어둑해지고 우리집은 불이 환하게 켜졌다. 그릇과 그릇, 숟가락과 젓가락이 부딪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와 어머니, 동생들은 나 없이 밥도 잘 먹는구나. 배고프고 서러웠던 그 어린 날의 밤을 기억한다. 그날 나는 개집에 들어가 잠을 잤다. 아침인가 점심인가, 저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개집을 나와 뜨거운 밥을 입안에 밀어넣는데 울음이 났다. ‘따뜻한 밥’은 그때 그 저녁, 아침 혹은 점심이었을지도 모를, 그 시간으로 나를 데려다 주었다. 당시에는 무척 서럽고 외롭고 화가 났을 텐데, 지금 나는 그 시간이 그립다.







   우리 모두의 마음 안에는 아이가 살고 있다. 어른인 척하며 살지만,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아이를 막을 수는 없다. 아이들은 날로 키가 자라고, 더 이상 키가 자라지 않는 어른은 덜 자란 아이를 품고 산다. ‘아빠 얼굴이 빨갛다’에는 아이 안의 어른, 어른 안의 아이의 모습이 교차하며 하나의 정겨운 ‘노래’를 만들어내고 있다. 아이와 어른의 경계가 흐릿해진다. 어른인 나는 마음이 편안해졌다. 어른인 척하며 사는 일에서 잠시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환하게 불켜진 방에서 '참 따뜻한 저녁밥'을 먹고 난 것처럼 편안하다. 아이의 세상에서 위로받은 기분이다. 그렇다면 아이들은 어떨까. 어른이 그려놓은 아이의 세상에서 그들은 무엇을 볼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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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적 글쓰기 전략 - 예비작가를 위한
아델 라메트 지음, 김정희 옮김, 정제원 감수 / 베이직북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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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전략을 쉽게 이해하려면, '방법'이라는 단어가 필요하다. <예비 작가를 위한 창의적 글쓰기>(이하 <예비작가>)는 우선 '작가'를 꿈꾸는 이들에게는 매혹적인 자극제가 될 것이다. <예비작가>는 주로 소설 쓰기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고, 말미에는 작가가 구슬려야 할 사람들에 대한 대처법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표제에 적중하는 내용으로 이 책은 '작가'에 대한 설명이 주를 이룬다.

 

창조적 글쓰기를 꿈꾸는 사람에게 '창의적 글쓰기'는 또 무엇일까. "꿈꾸는 자가 창조한다"는 명문에 한때 혹해서 자기 비관적인 잡문을 끄적이며, 자아도취 그런 몹쓸병이 또 있을까 싶은 자조적 글쓰기에 빠져들었던 시점이 맹목적인 독서에 빠졌던 때와 일치한다. 글쓰기는 낭만과는 거리가 멀지만, 글쓰는 것을 보는 것, 즉 글쓰는 광경, 작가가 가진 이미지는 충분히 낭만적이다. 눈을 가진 생명이라 보이는 것을 탐하는 마음이 자연스럽다. <예비작가>는 그러한 매력을 가진 '작가'가 지녀야 할 덕목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작가라 함은 소설에 준하는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에 이 책 역시 이야기꾼을 중심으로 해서 서술하고 있다. 어떤 묘사가 좋은지, 갈등의 배치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방법론을 제시한다고 할까.

 

특히 part 10에서는 각 장르별 글쓰기, 공모전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예비 작가"에게는 여러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공모전에 대한 일각의 시선이 좋든 아니든 다양한 기회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는 것은 책의 존재 목적, 즉 정보 제공에 투철하고자 한 글쓴이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

 

<예비작가>는 충분히 '글쓰기 방법'에 대해서 제시하고 있지만, 물론 상당 부분 지면을 할애하고 있지만 이 책은 '글쓰기'보다는 '작가'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는 것이 더 옳겠다. <예비작가>는 작가가 되기 위해서 어떻게 어떻게 하는 것이 더 빠르고 쉬운 길입니다, 낮게 소곤대고 있다. 자본 우위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목적과 기회비용에 대해서, 효율성, 효과성에 대해서 민감할 수밖에 없다. <예비 작가>는 이러한 시대 정신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글쓰기 장면에서의 해방감보다는 '작가 입문'을 위한 다양한 방법을,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던 점에서 <예비 작가>는 참으로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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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EIC 레벨순 영단어 2000 - 시험에 자주 나오는
하레야마 요이치 지음 / 제이플러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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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얄밉게 생긴 녀석이 있었다. 중학교 1학년 공부는 못 해도 자존심은 늘 터무니없어서 녀석이 백점 맞는 영단어 시험이라면 나도 못할 것 없다는 용심을 내며 나도 구입한 것이 단어집이었다. 물론 단어집은 며칠 못 가서 내 손을 벗어났다. 집 어느 구석에서 몇 달째 처박혀 곰팡내를 풀풀 풍기다가 아버지 눈에 포착되어 부리나케 도망쳐 나왔던 기억도 있다.

 

   천마총 주변을 걷다가 멀리 노랑머리 여인네들을 발견하고, 흠칫 놀라며 설마설마 혀끝을 차며 앞으로 걸었던 적이 있다. 거리가 좁혀질수록 심박동은 쿵쾅쾅쿵 지축을 뒤흔드는 듯 착각을 일으켰다. 첨성대가 인쇄된 리플릿을 내보이며 어디냐고 묻는 그네들의 말이 아득이 멀어지고, 눈앞은 새하얀 눈밭이었다.

 

   아뿔싸 닥치고 나면 그때서야 준비 못한 것을 탄하는 이런 몹쓸 인생.

 

   제대로 된 외국어 하나 구사할 줄 모른다면, 차라리 우리말이나 잘하자며 국어사전을 독파하던 20대 초반 그 시절은 그래도 도망칠 구석이 어느 정도 있었다. 그런데 이제 30줄에 접어들어 더 이상 피해다닐 명분이 없다. 우리말글에도 영 젬병이라 도무지 잘하는 것은 비아냥이고, 남탓이라 이제는 외국어를 좀 해야 않겠나는 생각에 봉착하고 만다.

 

   이런 난관에서 나는 이 책 <시험에 자주 나오는 TOEIC 레벨순 영단어 2000>을 만나, 몇 날 며칠을 딴에는 공부합네 하면서 지내고 있다. 공부라는 것이 늘 그렇듯 조바심이 가장 큰 적이다. 십수년 동안 낙오와 좌절로 점철된 공부인생을 개선할까 싶어 이 책은 제법 여유를 부리면서 읽어가고 있다. 2000 단어가 수록되었다는 이 책, 과연 2000단어까지 되나 싶을 정도로 행간은 널찍하니 가독성이 높다. 그렇다고 만만하게 읽어갈 수 있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초두에 각기 실력을 점검하고 단계별로 어휘를 점검하고 익힐 수 있도록 안배하고 있는 이 책의 구성은 나처럼 비일관적인 학습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균형적인 어휘를 제공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몹쓸 인생이라고 혀를 끌끌 차면서도, <영단어 2000>을 집어든 것은 아무래도 아직은, 그래도, 의욕이 남았음에 분명하다. 늦었다 생각하는 분들, 그 속에 내가 있다. 그리고 <영단어 2000>이라는 다소 부담이 적은 영단어집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이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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