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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개입니까 ㅣ 사계절 1318 문고 62
창신강 지음, 전수정 옮김 / 사계절 / 2010년 4월
평점 :
동서고금 막론하고 동물을 의인화한 이야기가 많다. 사물이나 동물의 의인화는 세태를 풍자하고 인간 본성을 파헤치는 한 방식으로, 그 접근 방식이 재미있으면서 폐부를 울리는 메시지를 담는다. 꾸준히 사랑받고 있는 '구미호'도 동물을 의인화한 대표적 작품 중 하나이다. '구미호'는 단순한 의인화가 아니라 '변신'이라는 매혹적인 소재를 차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타 작품들과 구별된다. 인간이 되고 싶은 강한 소망을 품은 천 년 묵은 여우의 이야기는 무섭기보다는 구슬프다. 인간의 배신으로 사람이 될 기회를 잃고 인간 세상을 떠나는 여우의 이야기는 시사하는 바가 많다. 절대 인간을 믿지 마라. 한 서린 여우의 목소리는 인간의 비열(鄙劣)과 나약(懦弱)을 폭로한다. 그럼에도 인간 삶을 포기하지 못하는 구미호의 미련은 유한한 인간 삶의 귀중함을 일깨워준다. 창신강의 소설 <나는 개입니까>를 읽으면서 내가 '구미호'를 떠올린 것은 우연이 아니다. 지하 배수로에 살던 한 마리의 개가 하늘(맨홀manhole)을 뚫고 나와 인간으로 변신한다는 이 작품 역시 '변신'을 소재로 한 우화이기 때문이다.
지하 배수로에 살던 '나'는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마지막 말 '창구'의 존재에 호기심을 품는다. 어린아이의 집요한 호기심으로 마침내 '창구'의 존재가 머리 위 하늘, 맨홀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나'에게 '창구'의 존재와 그 너머 인간 세상에 대해 알려준 것은 '연분홍 지렁이'이다. '창구'가 무엇인지 알게 된 '나'는 그 틈으로 흘러들어오는 소리와 냄새와 빛을 느끼며 지하 너머 세계에 대한 동경을 품게 된다. 가족의 상징인 이빨을 부러뜨리고 사라진 작은형이 자극이 되어 '나'는 마침내 그토록 동경해 마지않던 인간 세상으로 나오게 된다. 인간 세상에 나온 '나'는 개가 아니라 인간의 몸으로 변신해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몸은 인간이지만 여전히 개의 본능과 습성을 간직하고 있는 '나'가 겪어내는 인간 세상은 개의 그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자신보다 약한 자의 것을 약탈하면서 강한 자 앞에서는 굽신거리는 인간의 이중적인 모습은 오히려 개만도 못하다. 그럼에도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남아 있는 '순수함'에서 '나'는 개의 인생과 맞바꾼 인간의 가치를 확인한다. 개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은 달라서 개의 일 년치 시간이 인간의 한 달이라고 알려준 것은 연분홍 지렁이 '류웨'이다. 인간 세상으로 나온 '나'의 앞에 '류웨'는 어느 날 소녀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자신에게 '창구'의 존재를 알려준 소중한 친구를 만난 '나'는 기뻐하지만, 그 기쁨은 잠시, 아버지와 작은형, 그리고 누나의 죽음을 겪고 슬픔에 빠진다. 그리고 그 자신도 빠른 속도로 나이를 먹어가는 것을 발견한다.
한 마리의 개가 인간으로 변신한다는 파격적인 이야기는 흥미 위주의 판타지를 겨냥한 것은 아니다. 앞서 언급한 '구미호'가 인간이 되고 싶은 여우의 한(恨)을 통해 인간 세계를 조명하고 있다면, 본 작품은 가족의 품을 벗어나 세상 밖으로 나온 '나'가 하나의 독립된 존재로 성장해 나가는 과정을 그린 성장소설의 요소가 강하다. '지하 세계', '창구(manhole)', '연분홍 지렁이', '창구 너머 세상', 그리고 '변신'이라는 모티브는 '나', 한 소년의 성장을 위한 효과적인 장치로 작용한다. 몸을 날려 가족의 상징인 이빨을 부러뜨리고 창구 너머 세계로 나온다는 설정은 태어나기 위해서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는 데미안의 교훈을 생각나게 한다. 연분홍 지렁이 '류웨'는 개의 본능과 인간의 육체 사이에서 혼란을 느끼는 분열된 자아의 상징으로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사라진 류웨를 찾아나선다는 결말은 결국 '나'의 정체성을 찾는 여행의 시작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개입니까'라는 제목 역시 자신의 정체성을 묻는 소년의 목소리로 들린다. 급격한 정서적, 신체적 변화를 겪는 청소년기는 그야말로 격동의 시기이다. 그 어두운 터널을 지나는 소년의 성장통을 '개'의 변신이라는 환상적 소재로 그려낸 작품 <나는 개입니까>. 쉽고 재미있게 읽히는 매혹적인 성장소설이다. 날로 변신하고 있는 청소년들에게 일종의 '창구'가 되어줄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