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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렁이가 밟고 간 길은 뜨겁다 - 시사랑시인선 30
전종대 지음 / 북랜드 / 2003년 10월
평점 :
절판
전종대 시집
(북랜드, 2003)
지렁이가 밟고 간 길은 뜨겁다
1.
전종대 시인은 <지렁이가 밟고 간 길은 뜨겁다>의 서문에 이 시집을 내기까지 감사해야 할 대상으로 '하늘과 바람과땅과 이슬 ......'를 언급하고 있다. <지렁이가 밟고 간 길은 뜨겁다>를 읽으면서 왜 시인이 그들에게 감사하는지 이유를 알 수 있다.
시집 뒤에 첨부된 해설에서 시인 권국명 씨는 전종대 시인의 시세계를 일컫기를 "대지적 상상력(자연)"이라 한다. 본디 인간은 자연과 친화적인 관계에서 시작했다. 즉 자연과 하나였고, 대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며 삶을 펼쳤다. 그리고 지금은 생존을 위해 발전시켰던 문명이 편이를 위해서 고도화됨에 따라 인간과 자연은 동질관계에서 멀찍이 벗어나 있다. 자연에 순응하며 하늘을 보며 소원을 빌던 삶은 기계에 의지하며 물신만능으로 퇴색하였고, 인간은 더없이 도도해졌다. 문명이 극도로 발달할수록 자연을 훼손하는 일은 비일비재, 이제는 신작로는 내기 위해서 산을 밀고 강을 메우면서도 죄스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 길 아래에 깔리고 뭉개지고 스러진 생명들을 생각하지 않는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생명 경시와 물질만능은 일상화되어간다. 많은 지식인들이 그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다. 전종대 시인의 시집 <지렁이가 밟고 간길은 뜨겁다> 역시 그와 동일한 선상에 있다. 그가 지향하고자 하는 원형은 자연이다.
바다가 왜 저렇듯 육지를 향해 몸부리치는가를 이제 알겠네
-구룡포 앞, 용궁횟집
접시 위에 놓인 한 조각 네 간을 나는지금 씹고 있다
- <바다>
대지는 땅만을 일컫는 것이 아니다. 대자연이다. 시 <바다>에서 왜 바다가 육지를 향해 몸부림치는지를, 용궁횟집에 앉은 시적화자는 '이제' 알겠다고 말하고 있다. 이전에 몰랐던 그것은 무엇일까. 들여다본다. 어지럽다.
처음 이 시를 읽었을때는 당최 무슨 소린가 몰랐다. 어려웠다. 아니, 생각하기를 싫어했는지도 모르겠다. 자판기에 익숙해져 있으니 잠시 기다릴 줄 모르고, 생각 역시 단편적이다. <지렁이가 밟고 간 길은 뜨겁다>의 시편들을 다 읽고 난 뒤에서야, 전종대 시인의 시를 다 읽고 난 뒤에야 비로소 시<바다>는 읽히기 시작했다.
시 <바다>에서는 바다, 육지, 그리고 '나'의 관계가 명확히 드러났다. 각기 존재로서 세 개의 점을 찍어놓는다. 몸부림치는 바다가 향해 있는 육지를 두 개의 점으로 그리고 그 아래, 선상에 '나'를 붉은색으로 표시했다. '나'는 '횟집'에 앉아 있고, 생선회를 먹고 있다. 생선회는 '바다의 간'이다.
도시. 도시(문명)는 거대한 모래의 성이다. 육지는, 그러니까 본연의 육지가 아니라는 뜻일 될 것이다. 해서 바다가 육지의 본모습을 깨우치려, 갱생을 위해서 그토록 몸부림 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제서야 '나'는 횟집에서 그 사실을 깨우친다. '횟집'이란 바다의 끝이면서, 동시에 바다의 시작이기도 하다. 바다의 몸부림이 멎고 마는 곳(바다의 한계점)에서 '나'는 바다의 간을 씹어서 섭취하고 있다. '먹는다'는 행위는 곧 활동하기 위함을 전제로 하고 있다. 바다의 간을 씹어 먹고 '나'는 깨우친 바를 실천하고자 하는 뜻으로 시 <바다>가 읽힌다.
이러한 자연친화, 인간 본연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의지적인 시편들이 시집<지렁이가 지나간 길은 뜨겁다>의 전편에 수록되어 있다. <옹이>, <비 갠 오후>, <파도>, <이팝나무>, <우포 늪에서> 등 역시 <바다>가 전하고자 하는 바를 잘 드러내고 있다.
<옹이>
나무에 낫질을 하다 낫이 부러지는 때가 있다/ 나무를 만져본다/ 반질반질한 것이 수정처럼 단단하다/ 나무가 쇠를 부러뜨리다니, 갑자기 섬뜩하다/ 상처를 건드렸구나, 누구나 상처를건드리면/ 고슴도치처럼 몸을 움츠리는법이지/ 상처가 안으로 다져져 쇠보다 더 강함을 본다/ 복사뼈처럼 도도록이 맺혀있는 나무의 상처/ 아문 세월의 상흔/ 옹이는 나무의 자존심이다/ 옹이는 나무의 오랜 침묵이고 나무의 사리다/ 어느누구도 옹이를 향해 활을 쏘아서는 안 된다/ 옹이는 결코 박힌 화살을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파도>
밤바다 앞에서/ 나는 시를 쓰네 알몸인 채로,/ 스러져 엉키고 곤두박질쳐 치솟고/ 흰 거품 내뿜으며 어깨를 짚고 오는/ 내 희망과 절망이여,/ 웃고 떠들고 부대끼고 깔깔거리던 나의 철없음/ 부표 위에 새겨지던 괭이갈매기의 울음소리/ 아무리 몸부림쳐도 벗어날 수 없는 파도/ 그 파도 속으로 이제 다시/ 돌아가야 하리
시 <파도>에서 시적화자는 '나'이다. '나'는 밤바다 앞에서 있다. '밤바다'를 부정적인 대상으로 인정할 경우와 전종대 시인이 말하는 '자연'으로 칭할 경우 전혀 다른 감상이 되는 시가 <파도> 이다. 관습적인 의미-해, 등불는 희망 등-로 읽히지 않는 시어들이 몇몇 시편에 들어 있다. <연잎에 내리는 비>가 그렇다.
비 내리는 날 연잎을 봅니다/ (...) 대궁 하나 의지한 채/ 공중에 떠 흔들리는 호수/ 벅찬 연잎은 마침내 몸을 살짝 기우려/ 그 작은호수를 비웁니다/ 연잎은 제 자리로 돌아가고/ 기울어진 쪽으로 흘러내린 빗물/ 연밭의 초록 물풀들 흩어놓습니다/ 흩어진 물풀들 다시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기울어지는 연잎 위로 장대비가 쏟아지는데/ 연잎 위에 앉은 호수, 또 고요히 내려앉습니다
하지만 전종대 시인의 시집에서는 이러한 역전적 대치보다는 '자연으로의 회귀, 즉 인간성 회복'에 대한 지극한 갈망으로써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 그의 길은 다시 '과거로 돌아감'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강에 발을 딛고>에서는 난처?한 시대와 함께 지사적인 강한 결의를 '언 강'과 '터진 발바닥'을 통해서 내보이고 있다.
(...) 물위를 걷고 싶은자, 걸어라/ 네 다문 입술 위로/ 언 강에 발을 딛고/ 걸어가는 자의 터진 발바닥을 보고 싶다
이와 같은 의지는 현실인식을 보이는 시편으로는 <사순절>, <무좀에 대하여> 등이 있다. <사순절>과 자기성찰적인 시편 <무좀에 대하여> ('먼길을 걸으면서 어둡고 낮은 곳을 돌아보게 한...')등에서 우리는 앞에 놓인 길과 그에 대하는 시적화자의 '태도'를 확인할 수 있다. 즉, 자연으로 돌아가서, 인간성의 원천을 되찾으려는 부푼 희망만이 시집 <지렁이가 밟고 간 길은 뜨겁다>에 수록되어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폐교에서>(공룡 알처럼 먼지의 화석으로 덮여 있는데/ 나 돌아갈 수 있을까? 가슴 적시지 않고)처럼 앞길에 대해 회의를 갖기도 한다. 하지만 <청동구리거울>(북소리 같기도 한(...) 징소리 같기도 한 /청동빛 바람소리가 내안에서 잠들 줄을 몰랐다)는 내재된 가능성을 자각하는 것으로 보인다. 고행의 시편이기도 하고 성찰의 시집이기도 한 <지렁이가 발고 간 길은 뜨겁다>. 우리는 이 시집에서 부드럽고 따뜻한, 그리고 날카로운 선각자를 만날 수 있다.
이 시집에서 아쉬운 점. 마지막 시의 제목 <내일이면 아프리카로 가리라>, 즉 도피가 아닌지. 도저히 이 땅에서는 참된 사람(나)을 만날 수 없음에 절망하고 도피하려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들엇다. <잘린 손가락 하나>에서 비록 본연의 모습을 절단되었지만 그 존재에 대한 기억이 환상통으로 남아 있음을, 잊지 못함을 말했지만, <내일이면 아프리카로 가리라>는 여태 시인이 노래한 사실과 반대극점에 서 있는 제목이 아닌가. 하지만,
나, 문명의 이기 다 던져버리고 아프리카로 가리라
비행기도 타지 않고고 기차도 타지 않고
걸어서 오직 걸어서 가리라
가다가 옷이 바래지면 남루한 나의 옷
나뭇가지에 걸어놓고 가리라
신발이 닳아 떨어지면 남루한 나의 신발
묻어두고 가리라
버려야 할 건 다 버리고 떠나리라
자식도 오만도 미움도 그 빛나던 맹세도
대평원의 대지에선 필요 없으리라
나를 만나러 가는길
바오밥나무 그늘 아래 비스듬히앉아
밀림에서 밀림으로 걸어가는 코끼리 떼를 보리라
밤이 되면 난 고독을 꿈꾸는 돌이 되리라
아침이오면 난 온몸으로 세상을 보는 한알 이슬이 되리라
사람 곁에서 진정 사람이 그리운 한 마리 짐승이 되어
내일이면 나 아프리카로 가리라
시 <내일이면 아프리카로 가리라>는 곧, 희망가이다.
닳은 신발, 더 이상 신을 수 없는 신발을 땅에 묻어두고 간다는 것은, 시집 <지렁이가 밟고 간 길은 뜨겁다>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더욱 뚜렷이 해준다. 아프리카는, 문명의 침략에 지구상 어느 곳보다 피해가 적었기 때문에 '아프리카'를, 그리고 머지 않아 가닿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에 '내일이면'이라고 가정을 두지않았을까.
문명은 꼭 필요한 데에만, 그러나 넘치지 않게 사용해야 하는 절제가 필요하다. 문명의 톱니에 잘 숙련된 현대인에게는 이 시집 자체가 '가치의 유무'로 판단될지 모른다. 내가 살고 네(자연)가 있는 거다, 내가 죽고 네가 살겠느냐, 그래서 나의 안위를 위해서 네가 당하는 고통(훼손)은 나와는 무관하다라는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결국 다 죽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시집 <지렁이가 밟고 간 길은 뜨겁다>는 아름답다. '자연으로의 회귀'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전원으로 귀향하는 것과는 다른 것임을 알 때에 이 시집 <지렁이가 밟고 간 길은 뜨겁다>는 그 아름다운 빛을 드러낼 것이다. 전종대 시인의 시집이 지나간 내 손바닥은 뜨겁다. 손보다 가슴이 더욱 뜨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