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전에 꼭 알아야 할 101가지
시드니 J. 스미스 지음, 나선숙 옮김 / 큰나무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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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시드니 J. 스미스 (지음)/ 나선숙 (옮김)

(큰나무, 2007, 총248쪽)

 

결혼 전에 알아야 할 101가지

 

 

 

 


  함께 산다는 것은 생활을 공유하는 것이다. 지극한 이해 없이는 그 생활이 순탄하기를 바라는 것은 무모한 기대이다. 자취하면서 잠시 동거(?)를 했었다. 학교 후배녀석이었는데 동거 3개월은 그냥 술자리에서 잠시 죽이 잘 맞아 웃으며 이야기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악몽이었다. 아, 정말 악몽, 말 그대로 악몽이었다.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것이 예삿일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20대 초반에 가졌던 누군가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망상은 무참히 깨지고 말았다. 그것은 혁명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그 후로는 누군가와 함께 방을 쓰는 것에 대해서 신중하고자 매사에 주의를 하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 당시의 참혹한 기억에 시달렸다. ^^;;  

 

  "결혼 전에 알아야 할 101가지"는 현실적인 질문들로 채워져 있다. 그리고 "MUST HAVE"를 각 질문과 본문 아래에 배치함으로써 다시금 생각할 여지를 남기고 있다. 미래에 대한 질문(기대)/ 가정환경(가족력)/ 재혼/ 대화방법/ 취향, 성격/ 가치관, 윤리의식/ 일, 직업/ 사랑과 성(SEX)/ 돈, 경제력/ 자녀문제/ 종교문제/ 가족, 친구/ 취미생활/ 습관. 크게 이러한 내용들을 분류하고 각 장에서는 세부적인 이야기, 우리가 맞닥뜨리게 될 사항들에 대해서 삽화 형식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 삽화 형식을 빌려 쓴 글이라 해서 결코 내용이 부실하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간단명료한 글로써 독자가 깊은 사고를 하도록 세심한 배려를 하고 있다는 것이 더 옳을 성 싶다.

 

  각 장의 머리에는 인용글과 함께 내용을 요약하는 저자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 그 목소리에는 잘 살아달라,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 달라는 요구가 담겨 있다. 결혼은 환상이기도 하지만 현실에 뿌리는 둔 설렘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한 가정의 평화가 사회 전체, 나아가서는 인류의 평화에 이바지할 수 있다는 거창한 말은 말자. 하지만 우리가, 내가 편안할 때에 바깥에 관심을 가질 수 있다. 휴식처가 되는 가정이 마치 사타구니에 가시가 박힌 속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불편한 상황이라면, 우리의 일상은 어떻게 될까. 신중하라. 그리고 상대를 인정할 줄 아는 다원적 사고를 지녀라. "결혼 전에 알아야 할 101가지"는 그렇게 강조한다.

 

  결혼가정을 보면 참으로 별별 생각을 다하게 된다.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부부도 많지만, 하루하루가 지옥인, 어떤 경우에는 지옥을 즐기는 듯 다툼이 끊이지 않는 가정을 지켜보기도 한다. 그러한 사람들은 결혼하면서 상상하지 않았을까. 지금 혼자일 때는 힘들지만 내 너와 함께라면 더 나은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이다. 미래에 대한 부푼 생각들에 설레며 예식장을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삶이 상상일 수 없다. 지금 '나'는 '나'의 문제에 대해서 회피하지만 무지하지는 않다. 그것을 상대에게 숨기면서, 그것은 사기다. 사기를 치면서 멀쩡히 잘 살고 있는 사람까지 함께 나락을 고꾸라지기를 선택하겠느냐, 아니면 진정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가정을 꾸리겠느냐의 질문을 "결혼하기 전에 알아야 할 101가지"는 101가지, 그 이상의 질문으로 거듭거듭 묻고 있다.

 

  결혼을 하면서 사기치지 말자. 당사자 부부뿐 아니라 태어날 아이들에게 얼마나 큰 죄악인가. 잊지 말아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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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만나다
김형민 지음 / 집사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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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김형민

(집사재, 2007, 총301쪽)

삶을 만나다

 

 




“건강하세요”라는 말에 담긴 뜻이 무엇일까.

 <삶을 만나다>는 짧은 삽화(일화)들이 엮여서 만들어진 산문집이다. 마지막에 수록된 일화의 제목은 “할머니 비빔밥엔 무엇이 들어 있을까”이다. 이 일화는 제목에서처럼 비빔밥 집 할머니의 이야기다. 비빔밥에 어떠어떠한 것이 들어갔는지 묻는 저자의 질문에,

 

“비빔밥에 정해져 있는 것이 어디 있당가요. 그때그때 젤로 맛있는 거 골라서 넣으면 되는 거제. 본시 비빔밥이란 말이여, 집마다 다르고 철마다 따로인 벱이여.”

 

라고 할머니는 딱하다는 듯이 대답한다. 그리고 할머니는 입버릇처럼 말을 한다. 밥그릇마다 참기름을 한 숟갈씩 퍼넣으면서도 같은 말을 반복한다.

 

“건강허시오.”

 

이 짧고 진정한 인사를 통해 글쓴이는 삶을 성찰한다.

 

‘누구에게 보이기 위해 뭘 하는 것도 꺼림칙한 일이지만, 누구 눈에 띄지 않는다고 해서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은 나쁜 짓이다…….’

이 마지막편의 일화를 통해서 글쓴이 김형민 씨는 <삶을 만나다>를 엮은 이유를 밝히고 있는 셈이다.

 

‘건강허시오’라는 말은 일면 사람됨을 다하기 위해서 잘 먹고 활동하라는 뜻은 아닐까. 그리고 그 말에 감명 받은 글쓴이의 사고는 일면 자기고백적 성격을 지닌다. 요즘 시대에 흔하디흔한 것이 일화모음집이다. 하지만 <삶을 만나다>는 그들과는 차별화를 꾀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읽는 이로 하여금 책을 쉬이 놓지 못하게 하는 마력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평상시처럼 11시에 집에 들어와 이 책을 받아들었을 때는 짤막한 이야기들의 묶음집이구나, 생각하고 더운 날 찬물에 몸을 닦았다. 그러고 잠시 책상 앞에 앉아서 책을 펼쳤다. 저자의 머리글만 읽고 밝을 날 버스 칸에서 읽을 요량이었다. 그러나 곧 나는 알게 되었다. 쉽게 읽고 덮어둘 책이 아니라는 것을. <삶을 만나다>를 자정을 몇 십분 앞둔 시간에 진지하게 읽기 시작해서 새벽 쓰레기차가 찾아들 때 나는 책을 덮었다. 그리고 며칠 동안 <삶을 만나다>를 생각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삶을 만나다>에서 얻은 감동을 전할 수 있을까, 쉽게 풀리지 않는 매듭은 생각하면 할수록 내 뜻과는 달리 엉키고 말았다.

 

  <삶을 만나다>는 일면 평범한 이야기들이다. 우리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그러나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들'이 책 면면이 살아 숨 쉬고 있다. 그들은 김형민 씨의 눈을 거치면서 글로 담겼고, 다시 태어났다. 방송제작자(PD)인 김형민 씨가 만나는 사람들은 각계각층을 총망라하고 있다. 방송 프로그램마다 그가 만났을 위인들이 얼마나 많았을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사람을 만나다>에는 그가 만난 사람들의 삶을 추리고 추려서 엮을 것이다. 소시민적인 시각으로 사람을 바라보는 글쓴이 김형민 씨의 따뜻한 마음이 진정으로 전달되어, 책을 읽는 동안 내 마음은 서서히 따스해졌다. 지금 나는 <삶을 만나다>에 수록된 여러 이야기들을 일일이 거론하며 소개할 수 없는 것이 진정으로 안타깝다.

 

  <삶을 만나다>는 말한다.

 

“건강허시오.”

 

  그리고 그 뒤에 담겨 있는 의미심장한 뜻을 나는 느낀다. 밥을 함께 먹는다는 것은 믿음이다. 생존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음식, 현대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장사치에 의존해서 생을 이어간다. 그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까지 확인해볼 여유가 없고, 때때로 기만을 당한 채 극약을 먹을 때도 있다. 하지만, 비빔밥 할머니처럼 그래도 믿고 의지할 사람이 있음에 희망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것.

 

“건강허시오.”

 

라는 말 한 마디로 비빕밥 할머니는 장사치가 아니라 진정한 사람으로서의 자격을 부여받는다. 그리고 그 말에 담긴 당부. 사람으로 도리를 잊지 마시오. 나는 그 말을 <삶을 만나다>의 모든 이야기들에서 느꼈다. 그렇기 때문에 <삶을 만나다>는 내게는 특별한 책이다. 종종 내 자신에게 무뎌질 때 읽어야 할 책으로, 책장 제일 윗머리에 꽂아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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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렁이가 밟고 간 길은 뜨겁다 - 시사랑시인선 30
전종대 지음 / 북랜드 / 2003년 10월
평점 :
절판



전종대 시집

(북랜드, 2003)

 

 

지렁이가 밟고 간 길은 뜨겁다

 

 

 

 

1.

 

  전종대 시인은 <지렁이가 밟고 간 길은 뜨겁다>의 서문에 이 시집을 내기까지 감사해야 할 대상으로 '하늘과 바람과땅과 이슬 ......'를 언급하고 있다. <지렁이가 밟고 간 길은 뜨겁다>를 읽으면서 왜 시인이 그들에게 감사하는지 이유를 알 수 있다.

 

  시집 뒤에 첨부된 해설에서 시인 권국명 씨는 전종대 시인의 시세계를 일컫기를 "대지적 상상력(자연)"이라 한다.  본디 인간은 자연과 친화적인 관계에서 시작했다. 즉 자연과 하나였고, 대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며 삶을 펼쳤다. 그리고 지금은 생존을 위해 발전시켰던 문명이 편이를 위해서 고도화됨에 따라 인간과 자연은 동질관계에서 멀찍이 벗어나 있다. 자연에 순응하며 하늘을 보며 소원을 빌던 삶은 기계에 의지하며 물신만능으로 퇴색하였고, 인간은 더없이 도도해졌다. 문명이 극도로 발달할수록 자연을 훼손하는 일은 비일비재, 이제는 신작로는 내기 위해서 산을 밀고 강을 메우면서도 죄스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 길 아래에 깔리고 뭉개지고 스러진 생명들을 생각하지 않는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생명 경시와 물질만능은 일상화되어간다. 많은 지식인들이 그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다.  전종대 시인의 시집 <지렁이가 밟고 간길은 뜨겁다> 역시 그와 동일한 선상에 있다. 그가 지향하고자 하는 원형은 자연이다.

 

                                                     바다가 왜 저렇듯 육지를 향해 몸부리치는가를 이제 알겠네

                                                     -구룡포 앞, 용궁횟집

                                                       접시 위에 놓인 한 조각 네 간을 나는지금 씹고 있다

                                                                                                                                      - <바다>

 

   대지는 땅만을 일컫는 것이 아니다. 대자연이다. 시 <바다>에서 왜 바다가 육지를 향해 몸부림치는지를, 용궁횟집에 앉은 시적화자는 '이제' 알겠다고 말하고 있다. 이전에 몰랐던 그것은 무엇일까. 들여다본다. 어지럽다.

 

  처음 이 시를 읽었을때는 당최 무슨 소린가 몰랐다. 어려웠다. 아니, 생각하기를 싫어했는지도 모르겠다. 자판기에 익숙해져 있으니 잠시 기다릴 줄 모르고, 생각 역시 단편적이다. <지렁이가 밟고 간 길은 뜨겁다>의 시편들을 다 읽고 난 뒤에서야, 전종대 시인의 시를 다 읽고 난 뒤에야 비로소 시<바다>는 읽히기 시작했다. 

 

  시 <바다>에서는 바다, 육지, 그리고 '나'의 관계가 명확히 드러났다. 각기 존재로서 세 개의 점을 찍어놓는다. 몸부림치는 바다가 향해 있는 육지를 두 개의 점으로 그리고 그 아래, 선상에 '나'를 붉은색으로 표시했다. '나'는 '횟집'에 앉아 있고, 생선회를 먹고 있다. 생선회는 '바다의 간'이다.

 

  도시. 도시(문명)는 거대한 모래의 성이다. 육지는, 그러니까 본연의 육지가 아니라는 뜻일 될 것이다. 해서 바다가 육지의 본모습을 깨우치려, 갱생을 위해서 그토록 몸부림 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제서야 '나'는 횟집에서 그 사실을 깨우친다. '횟집'이란 바다의 끝이면서, 동시에 바다의 시작이기도 하다. 바다의 몸부림이 멎고 마는 곳(바다의 한계점)에서 '나'는 바다의 간을 씹어서 섭취하고 있다. '먹는다'는 행위는 곧 활동하기 위함을 전제로 하고 있다. 바다의 간을 씹어 먹고 '나'는 깨우친 바를 실천하고자 하는 뜻으로 시 <바다>가 읽힌다.

 

  이러한 자연친화, 인간 본연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의지적인 시편들이 시집<지렁이가 지나간 길은 뜨겁다>의 전편에 수록되어 있다. <옹이>, <비 갠 오후>, <파도>, <이팝나무>, <우포 늪에서> 등 역시 <바다>가 전하고자 하는 바를 잘 드러내고 있다.

 

<옹이>

  나무에 낫질을 하다 낫이 부러지는 때가 있다/ 나무를 만져본다/ 반질반질한 것이 수정처럼 단단하다/ 나무가 쇠를 부러뜨리다니, 갑자기 섬뜩하다/ 상처를 건드렸구나, 누구나 상처를건드리면/ 고슴도치처럼 몸을 움츠리는법이지/ 상처가 안으로 다져져 쇠보다 더 강함을 본다/ 복사뼈처럼 도도록이 맺혀있는 나무의 상처/ 아문 세월의 상흔/ 옹이는 나무의 자존심이다/ 옹이는 나무의 오랜 침묵이고 나무의 사리다/ 어느누구도 옹이를 향해 활을 쏘아서는 안 된다/ 옹이는 결코 박힌 화살을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파도>

  밤바다 앞에서/ 나는 시를 쓰네 알몸인 채로,/ 스러져 엉키고 곤두박질쳐 치솟고/ 흰 거품 내뿜으며 어깨를 짚고 오는/ 내 희망과 절망이여,/ 웃고 떠들고 부대끼고 깔깔거리던 나의 철없음/ 부표 위에 새겨지던 괭이갈매기의 울음소리/ 아무리 몸부림쳐도 벗어날 수 없는 파도/ 그 파도 속으로 이제 다시/ 돌아가야 하리

 

 시 <파도>에서 시적화자는 '나'이다. '나'는 밤바다 앞에서 있다. '밤바다'를 부정적인 대상으로 인정할 경우와 전종대 시인이 말하는 '자연'으로 칭할 경우 전혀 다른 감상이 되는 시가 <파도> 이다. 관습적인 의미-해, 등불는 희망 등-로 읽히지 않는 시어들이 몇몇 시편에 들어 있다. <연잎에 내리는 비>가 그렇다.

 

  비 내리는 날 연잎을 봅니다/ (...) 대궁 하나 의지한 채/ 공중에 떠 흔들리는 호수/ 벅찬 연잎은 마침내 몸을 살짝 기우려/ 그 작은호수를 비웁니다/ 연잎은 제 자리로 돌아가고/ 기울어진 쪽으로 흘러내린 빗물/ 연밭의 초록 물풀들 흩어놓습니다/ 흩어진 물풀들 다시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기울어지는 연잎 위로 장대비가 쏟아지는데/ 연잎 위에 앉은 호수, 또 고요히 내려앉습니다  

 

  하지만 전종대 시인의 시집에서는 이러한 역전적 대치보다는 '자연으로의 회귀, 즉 인간성 회복'에 대한 지극한 갈망으로써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 그의 길은 다시 '과거로 돌아감'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강에 발을 딛고>에서는 난처?한 시대와 함께 지사적인 강한 결의를 '언 강'과 '터진 발바닥'을 통해서 내보이고 있다.

  (...) 물위를 걷고 싶은자, 걸어라/ 네 다문 입술 위로/ 언 강에 발을 딛고/ 걸어가는 자의 터진 발바닥을 보고 싶다

 

  이와 같은 의지는 현실인식을 보이는 시편으로는 <사순절>, <무좀에 대하여> 등이 있다. <사순절>과 자기성찰적인 시편 <무좀에 대하여> ('먼길을 걸으면서 어둡고 낮은 곳을 돌아보게 한...')등에서 우리는 앞에 놓인 길과 그에 대하는 시적화자의 '태도'를 확인할 수 있다. 즉, 자연으로 돌아가서, 인간성의 원천을 되찾으려는 부푼 희망만이 시집 <지렁이가 밟고 간 길은 뜨겁다>에 수록되어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폐교에서>(공룡 알처럼 먼지의 화석으로 덮여 있는데/ 나 돌아갈 수 있을까? 가슴 적시지 않고)처럼 앞길에 대해 회의를 갖기도 한다. 하지만 <청동구리거울>(북소리 같기도 한(...) 징소리 같기도 한 /청동빛 바람소리가 내안에서 잠들 줄을 몰랐다)는 내재된 가능성을 자각하는 것으로 보인다. 고행의 시편이기도 하고 성찰의 시집이기도 한 <지렁이가 발고 간 길은 뜨겁다>. 우리는 이 시집에서 부드럽고 따뜻한, 그리고 날카로운 선각자를 만날 수 있다.

 

  이 시집에서 아쉬운 점. 마지막 시의 제목 <내일이면 아프리카로 가리라>, 즉 도피가 아닌지. 도저히 이 땅에서는 참된 사람(나)을 만날 수 없음에 절망하고 도피하려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들엇다. <잘린 손가락 하나>에서 비록 본연의 모습을 절단되었지만 그 존재에 대한 기억이 환상통으로 남아 있음을, 잊지 못함을 말했지만, <내일이면 아프리카로 가리라>는 여태 시인이 노래한 사실과 반대극점에 서 있는 제목이 아닌가. 하지만,

 

                                나, 문명의 이기 다 던져버리고 아프리카로 가리라

                                비행기도 타지 않고고 기차도 타지 않고

                                걸어서 오직 걸어서 가리라

                                가다가 옷이 바래지면 남루한 나의 옷

                                나뭇가지에 걸어놓고 가리라

                                신발이 닳아 떨어지면 남루한 나의 신발

                                묻어두고 가리라

                                버려야 할 건 다 버리고 떠나리라

                                자식도 오만도 미움도 그 빛나던 맹세도

                                대평원의 대지에선 필요 없으리라

                                나를 만나러 가는길

                                바오밥나무 그늘 아래 비스듬히앉아

                                밀림에서 밀림으로 걸어가는 코끼리 떼를 보리라

                                밤이 되면 난 고독을 꿈꾸는 돌이 되리라

                                아침이오면 난 온몸으로 세상을 보는 한알 이슬이 되리라

                                사람 곁에서 진정 사람이 그리운 한 마리 짐승이 되어

                                내일이면 나 아프리카로 가리라

 

  시 <내일이면 아프리카로 가리라>는 곧, 희망가이다.

  닳은 신발, 더 이상 신을 수 없는 신발을 땅에 묻어두고 간다는 것은, 시집 <지렁이가 밟고 간 길은 뜨겁다>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더욱 뚜렷이 해준다. 아프리카는, 문명의 침략에 지구상 어느 곳보다 피해가 적었기 때문에 '아프리카'를, 그리고 머지 않아 가닿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에 '내일이면'이라고 가정을 두지않았을까.

 

  문명은 꼭 필요한 데에만, 그러나 넘치지 않게 사용해야 하는 절제가 필요하다. 문명의 톱니에 잘 숙련된 현대인에게는 이 시집 자체가 '가치의 유무'로 판단될지 모른다. 내가 살고 네(자연)가 있는 거다, 내가 죽고 네가 살겠느냐, 그래서 나의 안위를 위해서 네가 당하는 고통(훼손)은 나와는 무관하다라는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결국 다 죽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시집 <지렁이가 밟고 간 길은 뜨겁다>는 아름답다. '자연으로의 회귀'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전원으로 귀향하는 것과는 다른 것임을 알 때에 이 시집 <지렁이가 밟고 간 길은 뜨겁다>는 그 아름다운 빛을 드러낼 것이다. 전종대 시인의 시집이 지나간 내 손바닥은 뜨겁다. 손보다 가슴이 더욱 뜨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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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약국의 딸들 - 나남창작선 29 나남신서 105
박경리 지음 / 나남출판 / 2003년 9월
평점 :
절판


 
박경리

(나남, 총398쪽)

 

김약국의 딸들

 

 

 

 

  김약국의 딸들. 토지 1부를 읽고 나서, 그리고 솔 출판 토지 2부 4권을 도서관에 반납하고 작가 박경리 선생의다른 작품에 처음 눈을 돌리게 된 작품이 <김약국의 딸들>이었다. 나는 토지 1부에 작가의 서문을 읽고 그때의 작가와 만나고 있었다(암 수술 직후의 박경리 선생).  나남출판사 본 <김약국의 딸들>의 책표지에 실린 박경리 선생의 모습을 뵙고 무척이나 낯설어했다. 그런 생경함과 함께 <김약국의 딸들>을 빌려왔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 밤새 읽고 새벽을 뜬 눈으로 밝혔다. 우선 <김약국의 딸들>은 재미있다. 토지1부가 책에서 손 놓지 못하게 만들 듯이, <김약국의 딸들>에는 묘한 매력이 있어서 읽고 있노라면 어느 순간 마지막장에 가닿고 만다.

 

  <김약국의 딸들>의 공간적 배경은 한때 충무였던, 지금의 통영이다. <토지> 때문에 통영을 찾는 사람도 있고, <김약국의 딸들> 때문에 통영을 찾는 사람도 지켜보았다. 그들이 여행한 그곳에는 박경리 선생의 소설에서 살아 움직이는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시간적 배경은 개항 이후 조선말기에서 일제의 강제점령기로 내선일체라는 구호 아래 '민족말살정책'을 일제가 펴던 시기로 추정된다. 김약국의 둘째  딸 용빈이 고향에서 살아남은 용혜를 데리고 배를 타는 순간. 그러니까 더 이상 고향에서 살 수 없는 상황으로 보여진다. 그렇기 때문에 '민족말살정책'으로 조선인들을 대륙침략의 도구로써 일제가 만행을 저지르던 때가 아닌가 미루어본다.

 

 

  김약국은 약국업을 하면서 그렇게 불리어진 것이다. 그의 이름은 김성수. 아버지(봉룡)는 살인을 저지르고 객지에서 비명횡사했는지 김성수 살아생전 한번의 소식도 없다.  어머니(숙정)는 비상을 먹고 자살을 했다. 그렇게 천애고아가 된 김성수는 큰아버지 봉제 영감이 거둔다. 김성수의 친모 숙정과 사이가 좋지 못했던 백모 송씨는 늘 성수를 사갈시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딸 연순에게 화가 미칠까 두려워한 탓이지 송씨의 진심은 성수를 피붙이로 여기고 있었다. 북문고개에서 송씨가 성수를 붙잡고 통곡하는 (61쪽) 모습에서 가슴이 짠해진다.

 

  백부 봉제영감의 삼년상을 벗고 성수는 탁분시(한실댁)와 혼례를 한다. 첫 자식은 돌림병으로 죽고 만다.

  '송씨는 문지방에 머리를 마구 받으며 스스로 죽으려고 했다. 아이르 갖다 버린 후 송씨는 넋빠진 사람처럼 앞뒤뜰을 왔다갔다하면서 시부렁거렸다. 아이를 재우던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그리고 김성수는 김약국이 되고, 딸 다섯을 기른다.

 

  <김약국의 딸들>의 주된 서사는 제목에서처럼 다섯 명의 딸들에 이르러서 서술자의 진술은 보조를 늦춘다. 선대의 이야기는 박차를 가하듯 급하게, 그러나 필요한 부분만 탁탁 집어서 토해낸다. 선대의 이야기에서 <김약국의 딸들>이 지닌 비극적인 운명에 대한 암시가 곳곳에 담겨 있다. 이 소설은 다섯 딸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그들의 불행을 관조할 수밖에 없는 김약국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비명에 간 부모, 병약한 사촌누이 연순, 백부 봉제영감, 백모 송씨의 애한은 곧 김성수, 김약국의 것이었다. 그리고 돌림병에 다 못 살고 간 첫아이, 평탄치 못한 다섯 딸의 인생, 그리고 무참히 살해당하는 한실댁. 김약국의 죽음에 이르러서 소설 <김약국의 딸들>의 비극은 해소되는 모양을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김약국의 장례 후 승선하는 용빈의 모습은 강인한 이미지로 받아들여진다. 김약국의 남성적 이미지에서 용빈의 여성적 이미지로 이전되는 이유는 박경리 선생의 사상에서 추측할 수 있다. 낳아서 기름, 모성이 곧 땅, 가능성으로 상징되고 있다. 그러므로 용빈의 승선은 희망이요 가능성이다.  

 

   이 소설 <김약국의 딸들>에서 유독 눈에 띄는 인물은 '지석원'이다. 김약국의 딸들이 겪는 불운한 삶(주된 서사)의 변두리에서 그는 마치 표류도처럼 수면 위를 솟았다 꺼지는 인물이지만, 그의 이미지는 강렬하고 생동적이다. 작가 역시 '지석원'을 만난 것이 <시장과 전장>에서 만난 '가화'와 마찬가지로 반가웠다고 고백하고 있다. 지석원은 인정 많고 물욕 없으며 있는 그대로에 만족하는 인물로 보여진다. 객줏집 '옥화'가 보여준 안타까움과는 달리 '지석원'은 자유롭다.

 

  <김약국의 딸들>의 '지석원'을 토지에서 만날 수 있다. 그 인물이 누구인지 알게 되면 슬몃 웃음이 나온다. 박경리 선생은 당신의 모든 작품을 <토지>를 위한 습작이었다고 했다. <김약국의 딸들>에서는 토지1부의 서사구조의 모태를 만날 수 있다. 방대한 분량 때문에 <토지>를 읽기가 저어되는 분들께는 읽기 편한, 반드시 읽어보아야 할 귀한 작품이 <김약국의 딸들>이다.

 

   새까맣게 탄 얼굴로 김약국은 임종을 앞두고 있었다. 맑은 눈이다. 의식도 분명한 듯하였다. 그의 눈은 흐느끼고 있는 용혜로 향하고 있었다. 노오란 머리칼이 물결친다. 김약국은 오래오래 용혜를 보고 있었다. 그의 눈은 천천히 이동한다. 시원하게 트인 이마만 보이는 고개 숙인 용빈에게 옮겨간 것이다. 용빈은 김약국의 시선을 느끼자 얼굴을 들었다. 오열과 같은 심한 떨림이 그 눈 속에서 타고 있었다.

 

  "아부지!"

 

  김약국은 눈을 돌렸다. 천장을 응시한다.

 

  "임종입니다."

 

  의사가 용빈을 돌아보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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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의 꿈 -상
윤정모 / 한길사 / 1996년 5월
평점 :
품절


 
윤정모

(한길사, 1996)

 

나비의 꿈 (전2권)

 

 


  "윤정모는 96년 봄 우리 가슴속에 그립고도 슬프게 각인된 윤이상의 삶을 안고 다시 돌아왔다"

 

  소설가 윤정모 님의 이름자를 거론하면 거의 대부분의 독자들이 "고삐"를 떠올리실 겁니다. <나비의 꿈>은 윤정모 님의 대표작 "고삐"와 같은 선상에서 읽힙니다. 저는 이데올로기에 대해서는 모릅니다. 그래서 소설 <나비의 꿈>을 읽기를 이번이 세 번째임에도 불구하고 한때 정부에서 그의 소설을 판금조치한 것에 대해서도, 그 전말에 대해서도 굳이 알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개인적인 독서로 <나비의 꿈>은 거대권력집단의 체제 유지를 위해서 한 개인의 인권이 처참히 무시당하고, 핍박을 받는 모습을 문학적으로, 소설의 기법으로 표현한 작품을 <나비의 꿈>으로 이해합니다.

 

  <나비의 꿈>은 윤이상 작곡가의 일대기를 다루는 방식으로 전기체 소설입니다. 그의 생몰을 다루면서 그와 연관된 인물들, 가까이는 가족과 멀리는 우리 민족 전체. 윤이상 작곡가가 바라던 음악적 세계에 대해서 소설의 양식을 빌어 역전적 구성으로 씌어졌습니다. 소설가 윤정모 님의 대부분의 소설이 그러하듯, 그리고 현대소설의 양식이 그러하듯 <나비의 꿈> 역시 역전적 구성방식으로 총 2권에 나뉘어 집필되었습니다. 소설 이외에 윤정모 님의 글을 대하지 못한 터라 소설가 윤정모 님의 문체에 대해서는 자신감을 갖지 못합니다. 다만 그의 소설 몇 권을 읽었을 따름입니다. 단지 억압받는 소수를 대변하는 그의 글에 경외심을 가질 뿐입니다.

 

  작곡가 윤이상 선생을 알고자 하는 분께, 윤이상 입문서로서 유익하게 학습될 만한 소설입니다. 이 소설 덕분에 저는 윤이상 선생을 알게 되었고, 지금은 평전<윤이상, 경계선상의 음악>을 읽고 있습니다. <나비의 꿈>이 윤이상 선생의 삶을 극적으로 표현한 반면 <윤이상, 경계선상의 음악>은 논문형식으로 선생의 음악을 심도 깊게 다루고 있습니다. 소설과 논문의 표현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두 책 간의 비교는 불필요합니다. 인간 윤이상 선생을 느끼고 싶은 분들께 <나비의 꿈>은 좋은 읽을거리에 그치지 않고, 정치적 술수에 휩쓸려 불운한 삶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민족을 걱정한 우리 동포를 느낄 수 있을 겁니다. 

 

  남한 사회에서는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 선생을  정권이 교체되기 전 동백림 사건의 주모자, 간첩으로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몇몇 치자의 정권 유지를 위해서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들, 지금 우리는 그들을 다시 돌아보아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금 이 땅에서 또다른 윤이상 선생이 생길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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