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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약국의 딸들 - 나남창작선 29 ㅣ 나남신서 105
박경리 지음 / 나남출판 / 2003년 9월
평점 :
절판
박경리
(나남, 총398쪽)
김약국의 딸들
김약국의 딸들. 토지 1부를 읽고 나서, 그리고 솔 출판 토지 2부 4권을 도서관에 반납하고 작가 박경리 선생의다른 작품에 처음 눈을 돌리게 된 작품이 <김약국의 딸들>이었다. 나는 토지 1부에 작가의 서문을 읽고 그때의 작가와 만나고 있었다(암 수술 직후의 박경리 선생). 나남출판사 본 <김약국의 딸들>의 책표지에 실린 박경리 선생의 모습을 뵙고 무척이나 낯설어했다. 그런 생경함과 함께 <김약국의 딸들>을 빌려왔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 밤새 읽고 새벽을 뜬 눈으로 밝혔다. 우선 <김약국의 딸들>은 재미있다. 토지1부가 책에서 손 놓지 못하게 만들 듯이, <김약국의 딸들>에는 묘한 매력이 있어서 읽고 있노라면 어느 순간 마지막장에 가닿고 만다.
<김약국의 딸들>의 공간적 배경은 한때 충무였던, 지금의 통영이다. <토지> 때문에 통영을 찾는 사람도 있고, <김약국의 딸들> 때문에 통영을 찾는 사람도 지켜보았다. 그들이 여행한 그곳에는 박경리 선생의 소설에서 살아 움직이는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시간적 배경은 개항 이후 조선말기에서 일제의 강제점령기로 내선일체라는 구호 아래 '민족말살정책'을 일제가 펴던 시기로 추정된다. 김약국의 둘째 딸 용빈이 고향에서 살아남은 용혜를 데리고 배를 타는 순간. 그러니까 더 이상 고향에서 살 수 없는 상황으로 보여진다. 그렇기 때문에 '민족말살정책'으로 조선인들을 대륙침략의 도구로써 일제가 만행을 저지르던 때가 아닌가 미루어본다.
김약국은 약국업을 하면서 그렇게 불리어진 것이다. 그의 이름은 김성수. 아버지(봉룡)는 살인을 저지르고 객지에서 비명횡사했는지 김성수 살아생전 한번의 소식도 없다. 어머니(숙정)는 비상을 먹고 자살을 했다. 그렇게 천애고아가 된 김성수는 큰아버지 봉제 영감이 거둔다. 김성수의 친모 숙정과 사이가 좋지 못했던 백모 송씨는 늘 성수를 사갈시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딸 연순에게 화가 미칠까 두려워한 탓이지 송씨의 진심은 성수를 피붙이로 여기고 있었다. 북문고개에서 송씨가 성수를 붙잡고 통곡하는 (61쪽) 모습에서 가슴이 짠해진다.
백부 봉제영감의 삼년상을 벗고 성수는 탁분시(한실댁)와 혼례를 한다. 첫 자식은 돌림병으로 죽고 만다.
'송씨는 문지방에 머리를 마구 받으며 스스로 죽으려고 했다. 아이르 갖다 버린 후 송씨는 넋빠진 사람처럼 앞뒤뜰을 왔다갔다하면서 시부렁거렸다. 아이를 재우던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그리고 김성수는 김약국이 되고, 딸 다섯을 기른다.
<김약국의 딸들>의 주된 서사는 제목에서처럼 다섯 명의 딸들에 이르러서 서술자의 진술은 보조를 늦춘다. 선대의 이야기는 박차를 가하듯 급하게, 그러나 필요한 부분만 탁탁 집어서 토해낸다. 선대의 이야기에서 <김약국의 딸들>이 지닌 비극적인 운명에 대한 암시가 곳곳에 담겨 있다. 이 소설은 다섯 딸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그들의 불행을 관조할 수밖에 없는 김약국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비명에 간 부모, 병약한 사촌누이 연순, 백부 봉제영감, 백모 송씨의 애한은 곧 김성수, 김약국의 것이었다. 그리고 돌림병에 다 못 살고 간 첫아이, 평탄치 못한 다섯 딸의 인생, 그리고 무참히 살해당하는 한실댁. 김약국의 죽음에 이르러서 소설 <김약국의 딸들>의 비극은 해소되는 모양을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김약국의 장례 후 승선하는 용빈의 모습은 강인한 이미지로 받아들여진다. 김약국의 남성적 이미지에서 용빈의 여성적 이미지로 이전되는 이유는 박경리 선생의 사상에서 추측할 수 있다. 낳아서 기름, 모성이 곧 땅, 가능성으로 상징되고 있다. 그러므로 용빈의 승선은 희망이요 가능성이다.
이 소설 <김약국의 딸들>에서 유독 눈에 띄는 인물은 '지석원'이다. 김약국의 딸들이 겪는 불운한 삶(주된 서사)의 변두리에서 그는 마치 표류도처럼 수면 위를 솟았다 꺼지는 인물이지만, 그의 이미지는 강렬하고 생동적이다. 작가 역시 '지석원'을 만난 것이 <시장과 전장>에서 만난 '가화'와 마찬가지로 반가웠다고 고백하고 있다. 지석원은 인정 많고 물욕 없으며 있는 그대로에 만족하는 인물로 보여진다. 객줏집 '옥화'가 보여준 안타까움과는 달리 '지석원'은 자유롭다.
<김약국의 딸들>의 '지석원'을 토지에서 만날 수 있다. 그 인물이 누구인지 알게 되면 슬몃 웃음이 나온다. 박경리 선생은 당신의 모든 작품을 <토지>를 위한 습작이었다고 했다. <김약국의 딸들>에서는 토지1부의 서사구조의 모태를 만날 수 있다. 방대한 분량 때문에 <토지>를 읽기가 저어되는 분들께는 읽기 편한, 반드시 읽어보아야 할 귀한 작품이 <김약국의 딸들>이다.
새까맣게 탄 얼굴로 김약국은 임종을 앞두고 있었다. 맑은 눈이다. 의식도 분명한 듯하였다. 그의 눈은 흐느끼고 있는 용혜로 향하고 있었다. 노오란 머리칼이 물결친다. 김약국은 오래오래 용혜를 보고 있었다. 그의 눈은 천천히 이동한다. 시원하게 트인 이마만 보이는 고개 숙인 용빈에게 옮겨간 것이다. 용빈은 김약국의 시선을 느끼자 얼굴을 들었다. 오열과 같은 심한 떨림이 그 눈 속에서 타고 있었다.
"아부지!"
김약국은 눈을 돌렸다. 천장을 응시한다.
"임종입니다."
의사가 용빈을 돌아보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