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벗겨줘 - 빨간 미니스커트와 뱀피 부츠 그리고 노팬티 속에 숨은 당신의 욕망
까뜨린느 쥬베르 외 지음, 이승우 옮김 / 은행나무 / 2008년 1월
평점 :
절판


(독서일 : 2008년 2월 ? ~2월 19일)

(총 215쪽)

 

 



    <나를 벗겨줘>는 '항상부족함을 느끼'는 현대인의 이야기이다. 여성의 옷 취향을 중점적으로 다루지만 비단 성별의 문제가 아니다. 달리 생각하면 우리가 집착하는 모든 것을 상징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인간의 욕망이 굴절되면 어떠한 형태로 발현되는지, <나를 벗겨줘>는 이야기글과 함께 정신분석학적 해석을 덧붙여 읽는이의 재미를 배가시키고 있다.  시중에 발행되는 일반독자를 대상으로 한 거의 대부분의 심리학서가 그러하듯이 <나를 벗겨줘> 역시 친절한 글읽기를 제공하고 있다. 재미난 이야기들, 소설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이야기들은 소일거리로 읽기에도 충분한 재미를 안겨준다.  어쩌면 단순할지도 모를 이야기 속에는 인간의 근원적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것이 욕망이다.  지금 내가 입고 있는 옷, 옷장에 아무렇게 쟁여놓은 옷들을, 그 옷가지들에 깃들이고 있는 나의 무의식을 곰곰이 생각해본다.

 

    <나를 벗겨줘>는 철저히 정신분석학을 따르고 있다.

 

    요즘은 아기일지라도 성에 대한 환상을 먼저 채우기를 원하는 시대라고 본다. (...) 내가 가지고 있는 무의식적 자아는 어떤 이미지일까. (옮긴이의 말/ 212~213쪽)

 

    그렇다.  정신분석은 '무의식적 자아'를 찾아 탐구하는 학문이다.  일면 색다른 학문으로 신비감을 느낄지도 모르지만 정신분석학 역시, 프로이드 심리학 역시 사람이 무엇인가,데 대한 학문이다. 두말할 나위가 없다.  동일 심리학에서도 그랬듯이 다른 학문, 일반대중에게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은 인간을 성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성기, 성행위, 성적 쾌락의 만족도로 인간은 성취감을 느낀다고 정의를 한다면 편협한 정의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욕구 중 많은 부분이 성적으로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은 사실 놀랍다.  당시대 프로이트의 등장으로 받은 충격은 도덕과 관습, 사회적 규준을 준수하며 사람좋은 웃음을 만면에 띄는, 만물의 영장이라 추어올린 인간이 짐승과 하나 다를 것 없다는 청천벽력이었을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대부분의 인간 행동이 프로이트 심리학이 구축한 틀에 들어맞는다는 사실.  관점을 달리 한다면 모든 생명은 동일한 선상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말일 것이다.  <나를 벗겨줘>는 그렇게 프로이트 심리학의 틀 위에서 우리의 모습을, 특히나 '옷'에 대해서 재미나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 재미난 이야기 속에서 나는 나의 모습, 더 나아가 우리를 발견한다.

 

    다양한 질문들이 옷 속에 숨어 있다. (....) 첫번째 필수품이기 때문이다. (지속적으로 동일한 스타일의 옷을 입음으로써 우리는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스스로에 대해 많은 것을 드러내 보인다. (...) 옷에 대한 무의식적인 습관은 (...) 사회적 위치와 인간관계에서 내적, 외적으로 우리의 모든 것을 드러내는가 하면, 동시에 우리의 내적 세계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 옷을 입는 방식은 개인의 역사에 의해 지배를 받는다. (들어가는 말/ 4~5쪽)

 

   <나를 벗겨줘>는 19개의 이야기와 심리해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 구성은 인간의 노화에 맞추어 짜여져 있다. 부모의 품에서 보호 받는 순간, 사회화 순간, 청장년기의 독립된 순간, 자녀를 낳아 기르는 순간, 자녀를 떠나보내는 순간... 각각의 순간에 우리의 반응을 옷에 대한 취향, 선호를 주시하면서 무엇이 문제이고, 왜 우리가 그러한 반응(증상)을 드러내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각 이야기에는 내가 있기도 하고, 나와는 전혀 무관한 이야기가 있기도 하지만 나라고 그 이야기에서 절대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은 여태 조금씩 살아오면서 실감한다.  답답해서 벗고 싶지만 함부로 벗어서는 안되는 옷, 그것은 속박인 동시에 위안이다. 상황에 맞는 옷, 그 틀 속에서 벗어나기 힘든 개개인의 심리를 만날 수 있는 <나를 벗겨줘>.  참으로 경쾌?한 책읽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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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토 2008.2 - 제6호
대한황토협회 엮음 / 대한황토협회(잡지) / 2008년 1월
평점 :
품절



    삶의 가치를 높여 주는 월간 생활문화 잡지. 황토는 그렇게 스스로를 소개하고 있다. <황토> 2월호는 역시 우리 문화 곳곳을 들여다보며 미처 알지 못한 우리것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2008년 2월호 황토, 나는 어느새 황토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번 포토에세이는 임진강을 찾았다. 저무는 해를 바라보며 임진각에서 바라본 이북의 하늘은 형용하지 못할 무엇이 있음을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느끼지 않을까. 그 무엇을 <황토>는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철책선의 날 선 못을 잡고 쓸데없이 강의 안부를 걱정하다가

(...)

시대의 변방이 이러했을까

증오도 시대를 벗어나면 진정한

사랑이 된다는 믿음은 모순이다.

(...)

현실은 화해를 거부하고 버림받고 있었다.

(...)

막막한 세상 어디 한 번이라도 맨발로

저 흐르는 강물을 건너 본 적 있는가.

신발창에 달라붙어 따라온 질퍽한 삶을

강가에 부려 놓는다.

겨울 끝에서.

(5~9쪽)


 

    역사산책, 손자병법 이야기, 오시환의 세상구경(여주 고달사지), 마음의 창을 열고(조선통신사와 한일문화교류)등 <황토>는 역사에도 진중한 태도를 보이며, 단순히 역사에 그치지 않고 "한국대나무박물관"처럼 지금 우리 주변에 면면히 이어오고 있는 형상까지 자세히 그려보이고 있다.  미처 관심을 갖지 못한 이야기들이 우리 주변에 그 모습을 간직한 채 남아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외침과 우리들의 무심함으로 말미암아 소실된 문화재들, 그러나 고달사지와 같은 터가 우리 땅에서 3천 곳이나 된다는 사실은 실로 놀랍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문화재를 잊지 않고 찾아드는 사람들, 그들이 선각자이다.  <황토>는 그들을 조명하며 유심히 관찰하고, 간결하게 소개하고 있다.  우리 주변, 생활공간 어디에간는 분명 누백년을 살아남은 역사물이 있을 것이다.  일상에 쫓겨 무심할 수밖에 없었으나 한 번 찾아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황토>는 함께 가자 손내밀고 있다.

 

    <황토>는 테마기행을 통해서 현재 진행중인 역사를 타루고 있다.  2월호는 '종로'다.  종로 지하철역에서 사람멀미를 처음 경험했다.  세상세상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서울에 밀집해 있나, 나는 직접 목도하고 서울이 거대한 쓰레기장, 분뇨처리장으로 묘사한 어느 작가의 말이 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껴 지상으로 올라간 적이 있다.  그곳에서 횡보 염상섭의 조형물을 만났다.  뜻하지 않은 계획하지 않은 대면이라 반가웠다.  횡보의 동상을 만나면서 무심히 돌아다녀도 반가운 무언가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황토> 2월호는 '종로' 일대를 굵직하게 다루고 있다. 모두 내가 다녔던 길이라는 것, 그래서 참 반가웠다. 다시 종로를 찾는다면 <황토> 2월호를 찾아 읽고 상경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 수첩에 <황토2월호> = 종로,라고 메모를 해둔다.

 

    <황토>가 많은 사랑을 받기를,  그리고 이렇게 읽는 <황토>가,  자본주의와 독단적 이기주의에서 안온한 내게 검소가 무엇이고, 진정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쳐주는 <황토>가 많은 사랑을 받아 좋은 소식을 오래오래 전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욕심을 가져본다. 

 






대숲으로 간다

대숲으로 간다

한사코 성근 대숲으로 간다

자욱한 밤안개에 벌레소리 젖어 흐르고

벌레소리에 푸른 달빛이 배어 흐르고

대숲은 좋더라

성글어 좋더라

한사코 서러워 대숲은 좋더라

꽃가루 날리듯 흥건히 드는 달빛에

기적 없이 서서 나도 대같이 살거나



신석정 <대숲에 서서>

(박물관의 재발견/ 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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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위대하지 않다 (양장)
크리스토퍼 히친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마 / 2008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양장본이고 책술이 제법 두껍다.  그러나 무게는 다행히도 가볍다.  거의 보름 동안 가방을 지키며 운반?된, 그러면서조금씩 읽어나간 <신은 위대하지 않다>는 글쓴이의 명철한 사고와 성실한 연구의 결과물이라 확신이 든다. 유익했다.  다시금 종교를 살필 기회를 얻었다.  글쓴이, 그의 일상은 어떠할까, 비문학 저자에 이러한 관심 발생하는 것은 아무래도 '종교' 이야기이기 때문이라 미루어본다.  어느 구도자보다 더 인간적인 모습, 행동습관을 지닌 인물이 아닐까 짐작도 해본다.  그의 자료 수집에의 성실함과 논리적인 글쓰기는 참으로 매력적이다. 

    <신은 위대하지 않다>는 종교가 인류에게 끼치는 영향을 역사적으로 다루며, 모든 서술의 중심은 '지금 여기', 현대사회이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종교서적이다, 종교 비판하고 있다고만 단정짓기에는 석연찮다.  이 책이 오히려 실용서가 아닐까.  종교는 우리 일상에 곳곳에 뿌리를 박고 있고, 사람은 종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무신론자, 신을 믿지 않는다는 사람도 역시 종교가 둘러친 울타리 속에서 자각하지 못하고 생활하고 있는 것이 실정이다.  어항 속 금붕어와 물의 관계처럼 우리는 종교를 잘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이기 때문일까, 이제 종교는 우리의 일상을 사사건건 간섭하지 못하리라 확신하고 있다.  그러나 집단, 구조의 비합리성은 수시로 반복되고 있고 여전히 종교는 맹신되고 있다.  세계 각처에서는 종교 때문에 인간 목숨을 난도질하는 경우도 많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이 정말 사람 살기 좋은 곳인지, 왜 그러한 착각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착하다'와 같은 심리일 것이다.  가족이 신봉하는 종교를 강요받으며 성장했다.  고등학교 때는 종교를 강요하는 사람들을 자주 버스 정류장에서 만나기도 했고, 다시 버스를 교통수단으로 쓰는 지금 또 그러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내가 믿고 있는 종교가 정말 내가 믿는 것처럼 신뢰할 만한가, 우리는 그러한 질문을 간과하고 있지 않은지 따져볼 일이다.

   <신은 위대하지 않다>는 종교에 대해서, 단순히 그리스도교뿐 아니라 이슬람교까지 논리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우리가 종교를 막연히 '믿는다'는 식이 아니라 '실체'를 보게끔 안개를 걷어내는 책이다.  단순히 종교를 파헤쳐 비판하기 보다는,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니라  조목조목 무엇이 문제이고 어떻게 해야 인류 공영에 이바지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신은 위대하지 않다>는 관심을 갖고 있다.  인류 공영, 거창하고 낯부끄러운 말처럼 들릴지 모르나 <신은 위대하지 않다>는 사람의 도리를 말하고, 우리가 종교를 믿은 처음을 말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의 안녕이면서도 동시에 인류 공영의 길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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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토 2008.1 - 제45
대한황토협회 엮음 / 대한황토협회(잡지) / 2008년 1월
평점 :
품절


 




    월간지 <황토>는 어울림이다.   <황토>는 만물의 영장으로서 인간을 바라보지 않고 대자연 속에 속한, 미생물까지도 동등하게 여기며 품을 줄 아는 자연을 담고 있다.  사람으로서의 도리가 무엇인지 우리는 <황토>를 읽으면서 곰곰이 생각하게 된다. 
   <황토>를 펼치면 제일 먼저 읽는 부분은 뒷장 "황토논단"이다. 이번호는 '온돌 구들'을 다루고 있다. 부여, 고구려 훨씬 이전부터 사용한 온돌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다. 며칠 전 '칠불암 아자방 온돌'이 혀끝에서 맴만 돌아 답답한 적이 있었는데, <황토> 1월호에서 언급되고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게다가 옹기의 사용까지 간단하게 소개하고 있다. "황토 논단"에서는 구들 구조, 아궁이에 따른 분류를 그림으로 설명하고 있어서 온돌을 모르는 세대에게도 이해가 쉽도록 배려하고 있다. 온돌과 탕이 주류를 이루는 식단 때문에 한반도로 활동범위가 축소되었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그렇지만 온돌 폄하의 발원지가 식민사관이었다. 쓴웃음만 짓게 된다. 해방 이후 반세기가 훨씬 지났지만 35년 일본제국주의의 강제점령기 여파는 여전히 잔존하고 있다는 사실에 안타깝다. 
    <황토> 1월호는 벌써 5번째 이야기이다. 그래서인지 처음 <황토>를 읽었을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비록 3권만 읽었지만 이번 호는 이전에 읽었던 것보다 훨씬 안정적인 구성이라 여겨진다. 거의 100쪽의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 <황토>에는 다양한 이야기가 읽기 쉽게 수록되어 있다. 포토에세이, 이달에 만난 사람, 기업탐방, 테마기행, 서평 등은 이전에 읽었던 <황토>의 형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그리고 계절에 맞게 동백꽃(카메라 속의 자연)을 소개하고 있는데, 동백에 대한 정보를 간략하지만 굵직하게 언급하고 있다. <황토>의 또다른 특징은 우리 땅에 애정을 갖고 매달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이번 호는 '한강'이다. 한강의 발원지인 검룡소를 찾아가면서 우리 땅 지리가 어떻게 짜여져 있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한 번쯤은 찾아보고 싶은, 한 번쯤 아니 몇 번은 찾게 될 명소라는 것을 느낀다. 
    매달 소개되는 "내 손으로 황토집 짓기"는 읽을 때마다 부럽기 그지없다. 손원모 씨의 집짓기를 소개하고 있다. 나도 훗날 지어야겠다는 욕심이, 아니 꿈이다. 꿈을 꾼다. 아침 첫 눈을 떠서 황토벽을 본다면 얼마나 좋을까. 행복한 꿈을 꾼다. 꿈꾸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 집에 갇혀서 노예가 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집이 사람에게 이로워서 가치를 줄 수 있어야 한다. (....) (집을 짓는 데에 있어서) 자연과의 어울림과실용성과 연고성, 유지 관리의 편리성과 마을 주민들과의 조화에 가장 역점을 두었다. (내 손으로 황토집 짓기/ 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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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언제 이 숲에 오시렵니까 - 도종환의 산에서 보내는 편지
도종환 지음 / 좋은생각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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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총 327쪽)

 

 



    도종환 시인, 우리는 그를 시인이라 부른다.  산문집 <그대 언제 이 숲에 오시렵니까>는 도종환 시인이 오랜 침묵을 깨고 4년만에 낸 책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작년 나는 도종환 시인의 시집 몇 권을 얻어 읽은 적이 있다.  그래서 <그대 언제 이 숲에 오시렵니까>는 오랜만에 도종환 시인의 글을 만나는 것이라기보다는 작년 책읽기의 연장선에서 읽게 되었다는 편이 옳을 성싶다.  그럼에도 반가웠다.  더욱이 여태 도종환 시인의 시집만 몇 권 읽은 터이기 때문에 산문집은 더없이 값지다.  산문이야말로 글쓴이의 일상사를 진솔하게 엿볼 수 있고 더 나아가 그의 작품까지 다시금 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 때문에, 그래서 나는 기쁘게 이 책을 읽었나 보다.

 

    <그대 언제 이 숲에 오시렵니까>는 책이름에서부터 큰 상징성이 있지 않을까, 시인의 산문집, 도종환 시인이 제목 선정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않았을까 지레짐작으로 제목이 갖는 상징성을 책 읽는 내도록 생각을 했다.  물론 책 읽다가 곧잘 잊기도 했다.  어쨌든 숲은, 이 책에서 서술되는 내용에 미루어보건대 숲의 대립항은 도시, 경쟁사회이다.  현대사회는 도시 아니라 농산어촌까지 경쟁으로 덧칠되어 있다는 사실은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도시의 대립항으로 '숲'을 그리고 있다.  황토로 지은 산방에서 생활하면서 도시에서 받은 상처를 치유하는 동안을 시인 특유의 미려한 문장으로 그려보이고 있다.  문장이 참으로 아름답다.  그러나 문장보다 시인의 시선이 따습다.  이는 시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이 크기 대문일 것이라 여긴다.  

 

    최근 농산어촌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을 일컬어 도피라고 칭하는 사람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그들은 도시에서 막강한 재력을 지닌, 또는 정치적, 사회적으로 굳건한 지위를 차지하신 분님들이다.  십여 년 전이라면 옳다꾸나,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들이 달리보이다.  여기서 그들이란 자연으로 돌아간 분들이 아니라 그들을 비난하는 분들이다.  그분들은 자연에서의 생활에 겁을 먹고 있는 것이 아닐까.  사실 나도 땅을 일구며 바람을 맞으며 살 자신이 없다.  잠깐 다녀오는 것, 여행 수준에 머물러 있다.  진정 도피라 비난을 받아야 할 인물을 잠시잠깐 자연으로 갔다가 쓰레기만 부려놓고 못 살겠네, 궁시렁대며 돌아오는 '나'같은 사람이 아닐까.  사람이 싫어 사람을 떠난다고 '자연 본연으로 돌아간 분들'을 욕하는 것은 진정 그들의 참모습에는 관심이 없다.

 

    <그대 언제 이 숲에 오시렵니까>는 사람의 이야기이다.  도종환 시인이 아름다운 문장으로 흙을 노래하고, 그 숲을 살고 있는 만물을 이야기하는 것은 곧 사람을 뜻하고 있다.  뜰에 앉은 새와 눈을 마주치며 도종환 시인은 말한다. "사람의 눈동자가 자기와 크게 다르지 않더라는 걸 다른 새들에게도 이야기해주기를 바라며"(111쪽)  새가 날아간 투명한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이 문장은 기실 사람에게 하는 따끔한 충고라 읽힌다.  산방에 사는 도종환 시인, 우리는 사람을 떠나 자연만물과의 교감으로 그가 살아가지 않겠나 생각한다.  그러나 아니다.  산속의 생활, 그것 역시 끊임없이 사람들과의 관계로 채워진다는 것을 <그대 언제 이 숲에 오시렵니까>를 만나는 동안 깨닫게 된다.  도종환 시인이 숲으로 간 것은 사람을 더 깊이 껴안기 위함이 아닐까.   해서 이 책은 자연 예찬의 문장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도종환 시인의 인생관, 세계관, 생명 사상까지 다양한 모습을 대면하게 된다.

 

    산문집이다.  시인이 쓰고 묶었지만 지나치게 비약되거나 미사여구로 채우지 않은, 그래서 많은 생각을 안겨주는 책 <그대 언제 이 숲에 오시렵니까>. '그대'는 누구이고, '숲'이 갖는 진정한 의미는 또 무엇이냐, 왜 '오라' 하는가에 대해서는 우선 묻지 말고 그저 글쓴이 도종환 시인이 펼치는 글줄을 무심히 읽어보자. 그러면 도종환 시인이 "청안하시길 바랍니다."라고 한 뜻을, 정말 책을 읽는 동안 "청안"함을 느끼게 된다.  토막토막 읽고 다시 처음부터 차례대로 읽고 그리고 읽었으니 또 글줄로 흔적을 남긴다.  밑줄을 많이 그은 책은 내가 갖고 선물로 한 권 드릴까 해서 주문한 책 <그대 언제 이 숲에 오시렵니까>, 참으로 고마운 책이다. 내 유년으로 끌어가주고, 청년기를 회상하게 하며 그리고 지금 모래사막 같은 사회에 대해서도 곰곰이 생각에 잠기게 하는 책 <그대 언제 이 숲에 오시렵니까>, 저도 갈 수 있을까요... 그리고 긴 말줄임표를 새긴다.  

 

    잘 익은 것들의 빛깔 (...) 우리는 그런 것을 먹으며 목숨을 이어갑니다. (...) 자연 속에서 드러나는 얼굴빛과 표정 그리고 눈빛과 행동거지를 보면 그가 얼마나 익은 사람인지를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잘 익은 빛깔/1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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