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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의 풍경 - 정약용 시 선집 ㅣ 돌베개 우리고전 100선 10
정약용 지음, 최지녀 편역 / 돌베개 / 2008년 1월
평점 :
(총 246쪽)
귀한 책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글들을 이렇게 만난다. 다산 선생의 유명세?에 비해 나는 아는 것이 별로 없다. 우리 문학, 비문학 전반에 다산 선생을 언급하는 문장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애써 다산 선생의 글을 찾아 읽지 않고는 게으름을 즐겨 피워댔다. 그러던 와중에 우연히 만나게 된 <다산의 풍경>은 내게는 귀한 책이고, 다산 선생과의 첫 만남이며 또한 느긋이 읽을 수 있는 시집이기 때문에 책 읽는 동안 내내 마음은 고요했다. 그렇다. 이 책은 심각하게 읽을 책이 아니다. 음미하고 시절 좋은(시국이 좋다는 소리는 절대 아니다) 봄바람을 벗삼아 책장을 넘겨도 좋을, 게다가 한시를 옮겨놓은 각각의 시편들은 우리말의 윤택한 사용을 보여주고 있어서 문장에 행복하고, 내용에서는 다산 선생의 진솔한 면모를 십분 누릴 수 있다.
읽기에 앞서 <다산의 풍경>이 배려한 "정약용 연보"를 먼저 읽어보기를 권한다. 다산 선생의 생몰연대와 동시대 인물들, 그리고 다산 선생이 겪어야 했던 세파가 간략하게 소개되어 책 읽기를 도와주고 있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시집의 해설을 먼저 읽어보시라 또 부탁드리고 싶다. <다산의 풍경>은 단순한 서정시가 아님은 물론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절차가 필요하지 않을까 나름 판단을 해서 그렇게 나는 읽고 우리말로 번역된 다산 선생의 시를 하나 한 편씩 읽기 시작했다. 색인, 연보, 해설 등 그렇게 <다산의 풍경>은 읽는이에게 많은 부분 세심한 배려를 쏟고 있다. 배려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말로 옮긴 시편 각각에서도 알아볼 수 있다. 먼저 시제(詩題)를 우리말로 풀어 쓴 것이 보기가 좋다. 달콤한 우리말, 문장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은 오염된 언어생활에 기갈 든 사람에게 해갈의 기회를 준다. 시제뿐 아니라 보디 다산 선생이 썼을 한시를 우리말로 풀어쓴 시편 아래에 그대로 옮겨놓은 점 또한 좋다. 원작을 제대로 해석하고 이해할 능력이 없지만 그러나 우리에게는 가능성의 시간, 언젠가,가 있다. 누구든 언젠가는 그러한 한시를 읽어낼 능력을 함양하여 다시 <다산의 풍경>을 집어들 때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시편의 말미에는 왜 이러한 시가 씌어졌고, 또 당시에 무슨 일이 있어는가, 또 옮겨쓴이의 감상까지 부연되고 있어서 다양한 책읽기를 누릴 수 있다.
사람은 누구도 단독자가 될 수 없다. 다산 선생의 시편은 그러한 정황을 보여주고 있다 생각한다. 미시적으로는 한 가족 내에서 역할이 성장과정을 거치면서 다양하게 체감하게 된다. 아이였고 보호받아야 할 때가 있는가 하면 양육하며 이끌어줄 때가 있는 것, 그것이 한울타리 가정이다. 가정이 확장되고 각 개개인이 모여 사회를 이루고 나라를 만든다. 그 속에서 '나'는 누구인가. 더 나아가 '대자연 속의 나'는 또 무엇인가. 그 속에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고, 해야 하는지. 그러한 관계를 깨달아가는 것이 삶이 아닐까.
하늘이 있어 내 머리를 들 수 있고
땅이 있어 발 디딜 수 있으며
물 있고 곡식 있어
그냥 배는 채울 수 있네.
("노래로 근심을 푸노라" 가운데서/ 56쪽)
어렴풋이 이 시편은 정치적이겠구나, 다산 선생이 겪은 정치적 역경을 미루어 가며 읽어낸 시편이 <다산의 풍경> 전반부를 차지하는가 하면 후반부에서는 인간적인 면모를 느낄 수 있다. <다산의 풍경>은 제목에서 은근히 예상되듯이 다산 선생의 생활을 훔쳐보는, 그러면서 '나'와 연관해서 무엇을 얻어낼 수 있는가를 보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글읽기란 내 일 아닌 것도 역시 내 일처럼 간절히 읽을 때 비로소 진정성을 얻지 않을까 싶다. <다산의 풍경>이 지금 내게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를 곰곰이 생각해 볼 일이다.
영광과 굴욕이 한 그라로 결판나 (과거에 낙방하고/ 34쪽)
사관의 붓은 모름지기 사실을 밝히나니/ 어찌 맑고 흐림만 기록하겠나 (승정원에서/ 38쪽)
사물을 살필 때는 지극히 맑게/ 마음을 지킬 때는 지극히 공정하게 (과거 보는 선비들에게/ 40쪽]
내 스스로 바람을 따르지 않은 것이지 [사공의 탄식/ 96쪽)
처음 베를 짠 가난한 여인의 집엔/ 베틀 북에 넣을 실 한 가닥 남지 않았건만 (장인과 지녀/ 102쪽)
굶주림에 착한 마음을 잃어 (굶주리는 백성/ 108쪽)
귀한 양반 댁 부엌에서 술안주로 만드는데/(...)/ 캐려다간 솜씨 좋은 사람도 죽고 만다오 (해녀/ 111쪽)
땔나무 아끼려 찬밥을 먹기도 하고 (소나무 없애는 승려/ 120쪽)
다산 선생의 시선은 세태풍자에서 우선 빛을 발한다고 일컫고 있다. 물론 그러한 시편들 역시 사회성을 짙게 띄고 있고, 전제해서 읽게 되는 것은 그가 정치인이라는 이유 때문일 것이다. 삼정의 문란과 가혹한 착취로 당시대 민중이 겪었던, 자식 목숨을 없애 고생 좀 덜자는 말이 당시대 상황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지금은 어떤가, 얼마나 바뀌고 나아졌는가. 비교해 가며 읽어 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나는 <다산의 풍경>은 그것도 그러하겠거니와 무엇보다 인간적인 면모를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하늘끝에 홀로 앉아"에서부터 마지막까지는 다산 선생의 시편들은 시각을 일상 다반사로 옮겨간다.
생김새는 내 자식 같은데
수염이 나서 딴사람 같애.
집에서 보낸 편지를 갖고 오긴 했지만
틀림없는 진짜인진 의심스러워
(8년 만에 아들을 만나/ 210쪽)
가혹하다. 사형제도 역시 겨우 몇 백년 전 이전 사회에서는 빈번히 자행되었고, 지금도 사형수는 있다. 그러나 생살을 도려내듯 가족과의 관계를 끊어버리는 것 그것이 옳을까. 사람 도리를 저버리는 지독한 범죄자가 물론 하늘 아래 함께 우리들과생활한다. 그들과의 생활 자체가 일상성에서 지극히 벗어난, 도무지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경우도 물론 있다. 사회적 격리로 그들의 병적인 범죄행각을 교화시킬 제도를 만드는 것이 생명을 앗아 문제를 사전에 예방하려는 처단, 어느 것이 더 경제적일까. 그것은 계속해서 논란거리로 말싸움이 빈번하게 발생하는 쟁점이기도 하다. 그런데 다산 선생은 시국상 정치범?에 해당될 것이다. 정치범으로서 다산 선생의 집필은 사실 무모하기까지 하다. 다양한 분야의 심오한 사상을 반영한 책들이 지금에서야 비로소 빛을 발하고 있지만, 선생의 필적은 당시에는 허망한 걸음이었을 것을 짐작하기 어렵잖다. <다산의 풍경> 후반부에 읽히는 소박하고, 그래서 아름다운 시편들은 유배지에서의 심정을 잘 반영하고 있다.
머뭇거린들 무슨 소용 있나/ 끝내 피할 수 없는 이별인걸 (사평의 이별/ 137쪽)
나이 들어 총명 줄어드니 어찌 책을 읽으랴/(...)/ 보내기 전 (책을) 만져보며 또 잠깐 정을 주네 (책 판 뒤에/ 180쪽)
물고기 뻐끔대는 소리만 이따금 들리네 (밤에 부용당에 앉아서/ 185쪽)
흰 구름에 가을바람이 불어/(...)/ 표연히 이 세상 떠나고 싶어 (흰구름처럼/ 187쪽)
노오란 단풍잎은 꽃보다 예뻐라 (못가에서/ 191쪽)
다른 꽃들이 다투어 핀 뒤에야/ 나를 보고 방긋 웃어 주겠지 (연꽃/ 193쪽)
휴우, 그래도 순순히 받아들여야지/ 세상 건너기란 본래 어려운 거니까 (집에서 온 편지/ 199쪽)
하루가 다른 새소리 이상하다 싶었지 (새해 집에서 온 편지를 받고/ 204쪽)
그리워 않노라/ 그리워 않노라 슬픈 꿈속의 얼굴을 (아내에게/ 209쪽)
생이별과 사별(死別)이 늙음을 재촉하나/(...)/술잔 두 개 남겨 두었다 자손에게 물려주려네 (결혼 60주년을 기념하며/ 211쪽)
다산 선생의 적적함은 단순한 고독과는 좀 달리 읽힌다. 불운한 시국 때문일까, 그렇다면 지금은 불운하지 않은 시국일까. 그것 역시 <다산의 풍경>을 통해서 다시금 생각해 볼 일이다. 단순히 한시를 옮겨놓은 번역서로만 읽는다면 <다산의 풍경>은 정치색이 있구나, 가족이 그립겠구나 그렇게 표피적으로만 읽고 말 우려가 있다. 단순히 지적 쾌감을 위해서 읽는다는 것은 <다산의 풍경>을 모독하는 것은 아닐까. 이제 나는 다산 선생을 처음 만났고, 선생을 조금씩 알아갈 터이다. 너무 거창하게 처음을 열었는가 우려 역시 있지만 지금 여기에서 몇 백 년 전의 거기를 들여다보는 눈은 이래야 하지 않을까. 다시금 "8년 만에 아들을 만나"를 읊조린다. 나는 아들이 없는데, 그러면서 우스갯소리를 하다가 금세 숙연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