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접 프레젠테이션 완전정복 - 1%만 아는 취업비밀 50
하영목.최은석 지음 / 팜파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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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정작 필요한 책, 실생활에 쓰일 만한 책은 미루다 미루다 다 늦게 읽는다. 몹쓸 늑장이다. <면접 프레젠테이션>(이하 <면접>)은 남, 특정인 앞에서 말할 때 벌거벗은 듯 긴장하는, 때로는 수치심까지 느끼는 병적인 소심증에서 벗어나는 데에 도움 얻지 않을까 해서 읽었다. 만족한다. 2008년 봄학기부터 야간강좌, 토요일 아침강좌를 돈 내고 듣고 있다. 유사한 수업인지라 강의 도중에 몇 차례 심리검사가 있었다. 지극한 소심증에 도덕적 결벽증까지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런, 어째 이렇게 잘 맞히는지. 물론 아닌 부분, 도덕적 결벽증은 아무래도 내게 해당될 사항은 전찌 아니다. 심리검사, 적성검사가 다 그렇듯이 일면 좀 얼렁뚱땅, 두루뭉술한 것이 늘 꺼림칙?하기도 하다. 하지만 결과로 미루어보면 평상시 내 단점, 흠결이라고 할까, 잘 짚어내고 있다. 발표를 두려워한다, 발표를 앞두고 긴장을 많이 한다는 것, 그것은 사실이다. 그래 고칠 수 없을까, 감정받기도 전에 스스로 먼저 안된다는 말은 말자.

 

     머리말을 읽다가 시간 없으면 2장, 3장부터 읽으라, 친절히 안내하는 부분을 읽고는 나는 또 충실히 지정해준 이정표대로 손을 놀렸다. 아마도 그 순간 내 눈은 반짝거렸을 것이다. 2장 읽고, 3장 읽고 그렇게 읽는 법을 평상시 즐겼기 때문에 <면접>은 우선 글읽기의 강박증에서 비켜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하고 있다. 나는 그래셔 편하게 읽을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무엇보다 실용서의 성격이 우세하기 때문에 <면접>은 직접적 서술, 즉 단문과 간략한 설명, 말하는 방법을 서술하고 있다. 그래서 이해 역시 쉽다. 전문적으로 깊이 파고들지 않지만 필히 익혀두고 체화해야 할 기술들을 명쾌하게 서술하고 있다. 말할 때 어디 어느 순간부터 실타래가 뒤꼬이고 눈앞이 허옇게 되는지, 그것부터 명약관화, 시원스럽게 짚어내고 있으면 문제에 대해서, 해결책까지 제시하고 있다.

 

     전반부는 말하기, 즉 면접에서 필요한 제반의 사항을 언급, 2장과 3장은 실제 말하는 방법, 면접에서 유용한 기초적 기술들을 언급하고 있으며 마자믹 5장에서는 면접에서 나의 가치를 특화할 수 있는 법을 소개하고 있다. 그러니까 1장은 책 전반을 다루는 것이고 2장, 3장은 방법론적인 측면을 언급, 5장에서는 앞서 소개한 내용을 살을 붙이고 있다는 느낌이다. <면접>에서 무엇보다 살갑게 다가온 내용은 4장이었다. 긴장감. 말하기 앞서 누구나 강약은 있겠지만 긴강한다. 그에 대한 대처법이 무엇인지, 그것이야말로  이 책 <면접>이 가진 큰 매력이다. 정확하게 똑똑하게, 또렷이 말하는 법, 그리고 신뢰를 줄 수 있는 자세, 한 문장을 말할 때 쉬어야 할 때와 의미 문장으로 묶어 말하는 법, 그 모든 수단이 익숙하게 몸에 익혔다 하더라도 듣는 사람, 즉 면접관 앞에서 긴장하면 만사 도루묵이 되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4장을 읽을 때에 나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고, 또 이 책은 한 번 읽고 덮어둬서는 안되겠다, 경전처럼 귀히 대하고 연습지처럼 많은 메모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면접>은 '상품으로서의 나의 가치를 증명하는 방법'이지만 결국은 '당당하게 말하기'에 다름아니다. 정작 필요한 책 <면접>은 내게 꼭 필요했던 책인지라 읽기 편했다. 무엇보다 문체를  읽기 쉽게 써놓은 글쓴이의 배려 덕분일 것이다. 읽기와 쓰기에는 어느 정도, 면무식을 면할 정도이지만 말하는 측면에서 나를 관찰하면 참으로 낯부끄럽다. 나를 위한 책, 말하는 방법, 그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을 <면접>은 친절하게 안내하고 있다. 생각이 행동으로 옮겨질 때, 그때에는 책임을 져야 하지만 경험이야말로 생활을 더 윤택하게 한다는 것, 인정해야 할 것이다. 야간 강좌 수업시간에, 요즘 들어 말 아닌 소리를 발표하는 나를 확인한다. 내가 나아졌나, 갸우뚱하지만 아무래도 살아남기 위한 한 방편으로 철면피 되어 횡설수설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돌아보게 된다. 이제는 <면접>에서 제공해준 기술법을 평소 배우며, 그렇게 말하도록 노력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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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날의 선택
유호종 지음 / 사피엔스21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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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    음, 그것에 대한 책이다.  <살아 있는 날의 선택>은 죽음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를 다루고 있다.  아니 죽음을 준비하는 우리들의 자세, 아니 그것도 아니라 죽음을 준비하는 '나'의 자세,를 진지하게 그러나 무겁지 않게, 더불어 착실하게 안내하고 있다.  처음에는 철학서적인가 했는데 후반부로 접어들수록 실용서에 가깝다.  막연히 '죽음'을 연상하는 것 아니라 구체적으로 체감할 수 있도록 한 <살아 있는 날의 선택>은 씁쓸하면서도, 피해서는 안 될, 여태 관심밖에 있던 그것, 죽음을 실물처럼 느끼게 해준다.  

 

     돌연사, 그 경우의 수가 생각보다 높다는 것은 충격일까.  나는 왜 죽음을 아득할 내일이라 여기고만 있는 것일까. 초 등학교 동창 중에 죽은 사람이 이제 주위에서도 심심찮게 듣는다.  그 자식 요즘 뭐하냐?  죽었다.  그리고 밀물처럼 밀려드는 소름.  왜?  그 이유가 너무도 허망하다.  그러한 죽음이 우리 주변에 산재해 있다.  <살아 있는 날의 선택>은 일침을 가한다.  '나'에게 죽음이란 여태 무엇이었나, 늙어죽는 것, 그것이야말로 최고의 분복이라는 것.  하지만 그와 같은 영예는 평등하지 않다.  <살아 있는 날의 선택>.  누구에게나 있을, 그러나 아무도 장담 못할 그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서 참으로 다양한 시각으로, 덤덤한 어조로, 친절하게 서술하고 있는 책이다.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인 죽음의 정체를 밝히려면 먼저 우리는 어떻게, 그리고 왜 이 세상에 오게 되었는지부터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일단 왔으면 그냥 계속 있지 굳이 다시 떠나는 이유가 무엇인지도 알 필요가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떠난 후에는 어디로 가는지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죽음의 정체가 드러났을 때 죽음으로 끝나는 삶은 또 어떤 모습을 드러낼지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28쪽)

 

     전반부에는 이렇게 형이상학적인 내용들, 문장들이 지배적이다.  여하튼 나의 예상은 제대로 틀려먹었다.  빗나갔다.

 

     (...) 현대학이 추구하는 가치가 최대한의 생명연장이기 때문(...) (124쪽)

 

     처음에 <살아 있는 날의 선택>을 읽는 며칠 동안은 또 죽음에 대한 철학적 고찰을 이어가겠구나.  앞서 읽은 친절한 철학책들의 연장선상에 <살아 있는 날의 선택>을 올려놓았지만, 부랴부랴 이건 그런 철학책과는 다른, 오히려 실용서에 가깝다.  일면 내용들이 소름 끼치기도 하지만, 글쓴이의 태도가 중립적이라 읽기에는 무리가 없다.  글쓴이는 절대 안락사에 대해서 자신의 태도를 노골적으로 표명하고 있지 않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중립적인 태도를 견지했는지 느낄 수 있다.  물론 특정 종교인들의 비난을 살 만한 느낌은 이 책에도 녹아있다.  하지만 <살아 있는 날의 선택>은, 그러니까 단지 '죽음'에 대한 고찰에 그치지 않고 '죽음'을 대비하는 '나'의 준비들에 대해서까지 상세히 언급하여 이 세상에 살아남은, 그러나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살아남은(식물인간 등) 동안에 내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서, 의지력이 남아 있는 지금, 즉 지금 내가 '죽음 가까운 날'을 위해서 해야 할 일들을 언급하고 있다.  본문에서 게재한 법 양식들이 부록에 다시 정리 수록함으로써 <살아 있는 날의 선택>의 기본 취지가 무엇인지 확연히 부각된다.

 

     폭음 뒤 숙취로 뒤집힌 속을 달래느라 죽집에 앉았다.  <살아 있는 날의 선택>을 읽었다.  죽과 죽음은 무슨 연관이 있을까, 한참 생각하다가 헛구역질을 한다.  과연 나는 의사 무능력 상태에 처했을 때 누구를 대리인으로 세울 수 있을까.  나는 때때로 너이기도 하지만 너는 결코 나일 수 없는 현실, 그 현실에서 누군가를 대리인으로 세울 수 있을 때 나는 비로소 여기 이 땅, 하늘 아래서 잘살았다는 충족감을 느낄 것이다.  살아 있는 날, 나는 <살아 있는 날의 선택>을 읽고, 또 어느 누구의, 나와는 전혀 무관한 누군가의 죽음을 듣고, 건성으로 슬퍼만 한다.  내게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내게도 결국 일어날 그 일, <살아 있는 날의 선택>은 현실을 직시하도록 해준 고마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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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산공동체학교 -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살아있는 교육 17
윤구병.김미선 지음 / 보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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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텔레비전 다큐 프로그램에서 잠깐 보았을까.  기억은 믿을 수 없으니, 어쨌든 대안학교의 모습을 텔레비전에서 본 듯하다. 굴절된 기억과 함께 나는 <변산공동체학교>를 만났다.  참으로 고마운 시간이었다.  문학 동호인 가운데 한 분이 대안학교에 종사를 하고 있다.  나 그런 일 하요, 하면 우리들은 입 모아 힘드시겠습니다.  어려운 일 하십니다.  그러면 눈 동그랗게 뜨고 그분은 대답한다.  아뇨. 아이들이 힘든 게 아니라 사회가, 사람들이 힘들죠.  보람을 느낀다던 그 말씀, 당시 나는 뭔 말인지 몰랐다.  아이들이, 학생보다는 주변 사람들의 모멸찬 시선과 경직된 반응, 과도한 거부행동이 그 분, 선생님을 힘들게 하고, 아이들을 힘들게 하는 것이다.  어렴풋이 지금은 느낀다.  물론 지금의 이 감정 역시 그다지 신뢰할 만한 것은 아니다.  그렇게 느낄 뿐이다.

 

     <변산공동체학교>를 읽으면서 비틀어진 교육현실에 내가 무슨 도움될 것 없을까 얄팍한 걱정을 또 한다.   책장이 넘어가면서, 그렇게 나는 또 생각에 덜미를 잡혀 잠시 잠깐, 또 괴로워했다.  이것도 병이라 남에게 도움되기를 바라는 마음, 그것으로써 내 존재의 가치를 만끽하고 싶은가.  문제는 문제다.  고질병이다.  지독한 소심증에 결국 생각은 행동을 제약하고 제풀에 포기한 행동은 후회를 자아낸다.  <변산공동체학교>는 정말 좋은 책이지만, 현실은 지독히 가슴 아프다.  그것을  깨우치고 있는 책이 <변산공동체학교>다.

 

     <변산공동체학교>는 교육이라는 것, 그것에 대한 생각을 재정립해주고 있다.  지금 학교 교육 자체가 어디서 기원했고, 무엇 때문에 실생활과 무관한 교육 과정을 '필히' 수료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 대안점은 무엇인지를 <변산공동체학교>는 실제 교육현장에서 생활하고 경험하며 느낀 점, 그리고 아이들의 목소리를 다각적으로 수렴하여 엮은 내용이다.  지엄하신 분들만이 아니라 소수 - 학생은 분명 다수이면서 소수의 위치에 있는 것이 현 교육의 실정이다-의 목소리를 가지치지 않고 생생하게 옮겨담은 내용들, 그리고 선생님들의 대화는 여느 책에서 만나기 어려운 귀한 자료이다. 자료로 정의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지만, 연필 무딘 내 어휘 사용에 한계를 절멸히 느낄 뿐이다. 어떻게 아이를 가르칠 것인가, 그리고 아이들에게서 배울 것인가 <변산공동체학교>는 그 과정에 놓여 있다. 결론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단정적으로 결론짓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주의해야 한다.

 

     노동자 생산을 위해서 교육이 있다는 말, 그 말은 충격적이었다.  순순히 말 잘 듣는 노동자 사육이 교육의 본 목적이었다는 것. 물론 극단적인 주장이기는 하지만 한편으로 수긍이 간다.  교육, 우리가 알고 있는 교육은 기계를 만드는 것이 아님이 분명할진대 앞으로 우리가 만들어갈 교육은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는, 속엣말로만 남겨둘 것이 아니라는 것.   양방향 교육으로서 변산공동체학교는 참으로 아름답다.  멀리서 보니 아름다워 보이는 것이라는 것,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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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의 숲에서 사랑을 만나다 - 신화 속에 감추어진 기이한 사랑의 이야기들
최복현 지음 / 이른아침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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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의 대부분 일상은 평지에서 이루어진다. 높이에의 갈망, 그것은 평지와는 달리 많은 것을 볼 수 있게 하기 때문이라 우선은 생각한다. 앉은자리가 바닥일 때와 의자에서 자신의 공간을 볼 때 느낌은 확연히 차이가 난다. 어디서 기인하는 것일까. 우선은, 우선은 시야가 넓어졌기 때문이라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신화의 숲에서 사랑을 만나다> (이하 <신화의 숲>)을 읽으면서 그리스, 로마 신화를 무척이나 어렵게 여겼던 나인지라, 읽을수록 친근해지는 느낌. <신화의 숲>은 낯선, 그러나 익히 들어온 서양의 신화와 친해질 수 있는 장을 마련해주고 있다. 이윤기 선생의 그리스, 로마 신화를 먼저 떠올리게 마련. 그러나 최복현 씨의 글쓰기 역시 무난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신화의 이야기, 그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느낄 수 있고, 더 나아가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 고찰하는 것이 먼저가 아닐까. 그리고 나는 이 책을 통해서 무엇을 얻었는지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창밖에는 비, 내 마음에는 침묵이다. 이런 시간에 신화의 숲을 거닐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며 숙연해진다. 신화 속 신들은, 특히 그리스신화의 그들은 사람과 다르지 않는 습성을 지니고 있다. 중학교 때 무턱으로 읽어라 해서 읽었던 지루한 신화가 아니라 이제는 그들 신들이 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강요는 불만과 회피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닐까. 자의로 읽는 책과 어린 중학생이 읽던 책의 내용은 크게 다르지 않은데, 더 많은 것을 보고 있다는 자각을 하게 된다. 신은 곧 사람이다. 사람은 또한 신이기도 하다. 동화 속 인물들은 사람이든 동물이든, 혹은 사물이든 상징성을 갖게 마련이다. 너무 편협적인 시각이 아니라면 동화 속의 풍부한 상징성으로 인물들을 살피는 것 또한 이해를 높이고, 시야를 넓히는 한 방편이 아닐지 생각하게 된다. 나는 동화와 신화,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 아무래도 내가 그 두 갈래의 작품들을 '상징성'으로 받아들이고, '사람을 이해하는 내용'이라 미루어 짐작하며 책을 읽기 때문일 것이다. 좀더 넓은 시야, 그것을 위해서 사람들은 등산을 한다지만, 책을 읽으며 욕심내는 넓은 시야를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 다채로운 글읽기 이외에 또 다른 방법은 없을까, 고민해야겠다.

 

    <신화의 숲>에는 '사랑'을 큰 기준으로 이야기를, 새롭게 엮었다. 그 이야기는 당연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사람같은 신, 신같은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모든 독서는 이기적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얻을 수 있는 것, 내가 바라는 것을 얻기를 바라는 것, 그것이 책읽기의 기저에 포진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신화의 숲>에서는 재구성된 그리스, 로마 신화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나는 이 책을 통해, 이미 알고 있었으나 미처 깊이를 갖지 못한 여러 이야기를 다시금 만나는 것 그것만으로도 큰 의미를 두고 싶다. 신화, 특히 신들의 이름뿐 아니라 글쓴이의 이름도 돌아서면 잊고 마는 불성실이 나인지라, 그리스, 로마 신화의 다양한 이야기들은 자주, 많은 책을 통해 만나야 할 것 같다. <신화의 숲>을 읽으며 나는 자의, 혹은 타의에 의해서 형성되었을 '나'를 다시금 돌아보는 기회를 얻었다. 앞으로도 '신화' 관련 책은 비록 내가 모든 이야기를 오래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찾아 읽을 것이다. 삶은 숫자로도 정의될 수 없고, 더욱이 지금 이 순간으로 규정하고 마는 것은 너무 갑갑하다.

 

     *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사랑을 주제로 삼아 관련된 신화들을 재구성한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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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계속 가라
조셉 M.마셜 지음, 유향란 옮김 / 조화로운삶(위즈덤하우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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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과 죽음에 대한 고찰. 성찰. 통찰이 <그래도 계속 가라>에 들어 있다. 아메리카 원주민의 사고를 서구적 시각에서 살피고 있는 듯한 인상이다. <그래도 계속 가라> 제목에서부터 나는 느낀다. 희망서가 아닐까. 읽는다. 희망서였다. 삶과 죽음, 단순한 이분법이 아니라 삶을 바라보는 긍정적인 시각을 책 전반에 가득 들어차 있다. 무엇을 느꼈는가. 그것은 한마디로 장담할 수 없다. 단언해서는 안 될 문제, 인간 평생의 화두가 삶과 죽음이 아닐까. 나이 몇 안 되지만 살수록 삶은 극단적인 성격과는 거리가 멀다는 느낌이 든다. <그래도 계속 가라>는 내가 겪는 부정적인 감정들, 그러나 '그래도' 삶이란 그것뿐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어조는 덤덤하지만, 안타까워하지는 않는 느낌이 든다. 심리 상담자의 자세처럼 <그래도 계속 가라>는 '괜찮다, 괜찮다' 그렇게 말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심도 있는 명상을 하고 난 뒤, 계획적으로 단식을 한 뒤에 느끼는 그 느낌. 정화된 듯하다. 그러나 사람은 유리병과 같아서 가라앉은 침전물은 병을 흔들면 곧 어수선, 당혹해하게 마련인 듯 싶다. 하지만 얼마나 많이, 자주 정화를 경험했느냐에 따라 내성이 강화되고, 다음번의 당혹감, 외적 자극은 이전과는 달리 견디기가 조금은 수월해지는 것 같다.

 

     <그래도 계속 가라>를 읽기 전 나는 아프리카인이 쓴 <은총>을 읽었다. 그리고 <은총>을 읽기 전 <동학> 관련 책을 2007년 통째로 채우고 있었다. 물론 깊이 있는 책읽기가 아니라 훑어 있기 지나보기로 그 책들을 접했기 때문에 한마디로 정의하라, 하면 꿀먹은 벙어리, 닭 잡아 먹고 오리발 내미는 희한한 소리만 늘어놓는 것이 나이다. 웅얼웅얼, 그러나 느낌만은 허위와는 다소 거리를 두고 있는 듯, 자신한다. <그래도 계속 가라>는 그렇게 사람과 가까운, 자연과 가까운, 공동체 의식을 내포하고 있는 책이다. 이러한 책은 달리 갈래를 나눌 수 없다. 잠언서이기도, 명상서이기도, 자기계발서이기도, 문장 아름다운 문학책일 수도 있다. 결국 '삶'을 다루는 책은 딱히 갈래를 구분해서 이렇다 저렇다 논쟁을 벌이는 것 자체가 부질없는 듯하다. <그래도 계속 가라>는 현실과 가까이 서 있는, 우리의 맨몸을 담아내는 욕실의 거울과도 같다.

 

     <그래도 계속 가라>는 이야기체로 이루어져 있다. 아버지를 읽은 '나(제레미)'와 아들을 잃은 할아버와의 대화체로 이루어지는 내용이다. 그들이 경험한 죽음에 대해서 진솔한 이야기를 펼치고 있다. 할아버지는 '늙은매'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아메라카 원주민들의 이름 붙이기 방식을 엿볼 수 있다. 이제 우리에게는 익숙한 그들의 이름. 반갑다. 사람의 자기상 그대로를 풀어 말하는 것은 비경제적이지만, 오히려 그래서 인간적이고, 자연과 가까운 것은 아닐까. 그럴 것이다. 마음 답답하고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을 견뎌야 할 때, 아니 그런 때를 대비해서 <그래도 계속 가라>를 읽어두는 것은 약았지만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다. <그래도 계속 가라>를 읽는 첫번째 이유는 그렇게 이기적이다. 그러나 삶을 느끼는 자세를 학습하는 것으로, 함께 어울리는 사회를 만들려는 노력을 배우는 것, 그것이 <그래도 계속 가라>의 두 번째 이유가 될 것이다. 첫번째와는 달리 이기적이하는 혐의, 비판에서는 다소 피하겠지만, 집단이기주의라 몰아대면 수긍할 수밖에 없다. 결국 사람은 개인이든, 집단이든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도 계속 가라>는 그렇게 이전에 읽어온 책들의 연장선상에 있고, 나는 계속해서 이러한 책을 찾아 읽을 것이다. 아직도 나는 왜 내가 사는가에 대해서, 명확히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다만 다행히 오늘도 나는 살아간다,는 것 그 과정의 연속에 고마워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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