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크 재패니즘을 논하다
하야사카 다카시 지음, 남애리 옮김 / 북돋움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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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유머를 사람들은 희한하게 말한다는 것을 최근 알았다. 이 책 덕분이라 하면 과장 심하다 말씀을 하실까. 그러면 어쩌랴, 그렇게 느끼셨다면 그 감정 역시 실재하는 것이고, 나 역시 '유머'를 농담인가, 그 적합한 명칭에 대해서 고심했으니 진실일 터. 사람들은 유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나는 추정을 하고 있었다. <재패니즘을 논하다>(이하 <일본 통찰>)을 읽으면서 의식적 엿보기를 했다. 남은 것은 무엇이냐, 없습니다. 말할까. 아니 웃음이 남았다. 양껏 웃었고 재미있었다. 하지만 단순히 웃어넘기고 '재미있다'는 식으로 기억하기에는 뭔가 미심쩍은, 아쉬운 건덕지가 남아 있다. 건덕지는 목울대, 과한 술을 마시고 토한 구토물이 걸린 목울대처럼 껄끄럽고, 불편한다.

 

    유머, 농담에 대해서 생각한다. 그것은 강한 자만의 특권인가. 그럴 수 있다 생각한다. 유머, 각박한 현실을 우스개로 넘길 수 있는 것은 현실을 다른 관점으로, 고통이지만 심각하지 않다고 여기는 사고의 차이에서 기인할 것이다. 유머, 웃어 넘기기고자 만들어낸 화법이 아닐 터, 그것은 세상은 결국 농담, 너무 심각해 말라. 눈 가까이 종이를 들이대면 숲도, 나무도 보지 못한다. 그 우려를 뛰어넘고자 유머, 농담이 있잖겠나. 물론 <일본 통찰>은 미국편보다는 수위가 낮다. 아무래도 글쓴이의 국적이 일본이기 때문일 것이라는 추측을 해보지만, 확실치는 않다.

 

     자신이 국적을 두고 있는 나라(조국이라는 말은 삼가자)를 우스갯거리로 만들고자 한 의도는, 목적이 과연 무엇일까. '일본'이 우스갯거리로 쓰인다는 것에 글쓴이는 적잖이 자부심을 느끼는 듯한 어조가 책 곳곳에서 느껴진다. 왜일까. 강대국, 선진국이라는 허울이 이제 일본에도 허락된다는 것 때문일까. 한데 글쓴이가 보는 일본의 현실은 그닥 문문하지가 않다. 때때로 안타까워하면서 또 때때로 혐오를 드러내기도 한다. 하지만 미국편과는 달리 애정, 애국심이 느껴진다. 그렇게 읽혔다는 것은 아무래도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다른 국가에 침략 전쟁을 벌이지 않았다는 데에서 비롯되는 듯, 나는 오해를 한다. 오해가 착각을 부르기도 한다. 글쓴이의 국적 때문에 나는 이 책의 우스개가 썩 내키지 않기도 했고, 과연 미국편과 일본편의 서술방식이 썩 다르지 않음에도 오히려 미국편이 더 면밀한 느낌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알고 있는 정보가 전부 사실이라는 오만은 일찌감치 버렸다. 그것이야말로 바로 소시민의 특권일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사실, 진실을 찾기 위해 굳이 노력할 필요가 있을까. 조선조에 천민이었을 '나'가 지금 구태여 역사를 살피고, 국제정세를 살피고, 국가간의 협약, 의정서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을까. 주는 대로 먹고, 부당해도 끽소리 말고 먹을 밥이라도 있으니 참말로 고맙고 황송하다고 엎드려 절해야 하지 않을까. 모르겠다. 하지만  ...

 

    유머, 농담은 강자의 이야기 방식이다.  강자란, 역시 고위직 재벌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삶을 살필 여력이 있는, 융통성 있는 사람이다. 융통성은 남을 위함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행동하는 것을 뜻한다. <재패니즘을 논하다> 즉 농담으로 일본을 바라보는 시각, 그 의도가 무엇인지 간파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충분히 이 책에서 원하는 바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농담으로 일본을 이해하고 말기에 일본은 한국에 위협적인 국가이다.  이어령 씨, 박경리 선생님의 일본론을 함께 살펴 읽는다면 <재패니즘>은 더욱 윤택한 글읽기로 기억될 것이다.  재미는 관심을 유발하고 여러 책으로 손을 뻗힐수록 결국 처음 읽은 책을 두드러지게 만드는 효과를 획득한다. <재패니즘>은 일본을 알고 싶어하는 한국인들에게 유용한 책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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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한 설득학 - 실전에서 배우는 전설의 설득기술
제이 하인리히 지음, 하윤숙 옮김 / 세계사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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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마음을 상대방에게 전달하고자 할 때, 복장 터지는 경우가 다반사다.  왜 복장이 터지나 곰곰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표현 탓이다.  내 마음은 안 그런데, 상대가 오해를 할 경우... 복장이 터지다 천불이 난다.  이럴 경우에는 표현, 말이 중요하다.  왜 우리는 속마음을 그대로 전달하기에 이렇게 힘들어할까.  두려움 때문일까, 혹은 지나친 배려 때문, 그것도 아니면 지나친 기대감에 억눌려 생각는 위축된 행동일까.  나 자신에게 스스로 물어본다. 모든 문제는 '나'에서부터 시작되었고, 결국 해결은 '나'에서 이루어진다는 것.  그것이 삶이다.  내가 지각하는 세계.

 

     <유쾌한 설득학>은 말 그대로 말하는 법을 소개하고 있다.  이 책은 단순 지식에 그치는 실용서가 아니다.  하나하나 세부사항을 친절하게 지시하고, 함께해보기를 권장하고 있다.  이 책을 읽기 전 몇몇 화술책을 읽었고, 사물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심리학도 가깝게 끼고 살았다.  한데 무엇인가 명확히 잡히지 않는 그 무엇이 있었다는 것.  솔직히 모든 문제는, '나'에서 비롯되는 것일터... 해서 나는 무작정 유사한 책을 여러 권 읽기를 즐겼고, 그러던 가운데 <유쾌한 설득학>을 만났다.  말, 표층적인 형상에 중심을 두지 않고 말, 하는 법 그 자체에 조명을 두고 있다.  해서 당장 쓰임이 있는 책으로 <유쾌한 설득학>은 큰 강점을 지니고 있다.  약점은 무엇일까.  굳이 그것을 찾으려 용쓸 필요야 있을까.  이 책은 다양한 수사학을 제시하며 아울러 사례를 쉽게 쉽게 설명, 더 나아가 말하는 법에 관해 각 장마다 간명한 요약을 한 지면을 제공하고 있다.

 

     글쓴이는 '수사학'을 중점으로 해서 <유쾌한 설득학>을 기술하고 있다.  요즘 읽고 배우는 "현실치료"에서도 유사한 관점이 보인다.  즉 내가 무엇을 바라는가,를 분명히 하고 그것을 위해서 전력을 다하는 것이다.  '설득' 다른 사람에게 나의 생각, 내가 바라는 행동을 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 기반이야 물론 개개인의 가치관에 근거할 것은 당연하다.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고 이득을 누릴 수 있는 상황을 조성하는 방법은 <유쾌한 설득학>의 기조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얻고자 한다면, 누군가를 설득하고자 바란다면 이렇게 말하라는 법을, 체계를 구조화하고 있다.  글이 칼로 쓰여 무수한 사람을 학살하는 경우가 역사상 많았다. 말도 마찬가지.  말은 도구다.  도구는 쓰는 사람의 생각에 따라 유용할 수도, 폐해를 만들 수도 있다.  <유쾌한 설득학>은 말하는 능력 배양에 큰 도움을 줄 만한 책이다.  한데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쓰느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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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인열전 - 파격과 열정이 살아 숨쉬는 조선의 뒷골목 히스토리
이수광 지음 / 바우하우스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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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전은 여럿을 한데 모은 것이겠고, 잡인은 달리 말하면 쓰레기라는 뜻일 게다.   누가 쓰레기라 불렀나, 그것부터 차근차근 살펴보는 것이 우선이겠지만 그 생각도 잠시, <잡인열전> 그 재미난 이야기 속으로 금세 빠져들고 만다.   통속적이라 할까, 물론 통속도 있고 기담도 있고 구구절절 애달픈 이야기도 <잡인열전>에 서려도 있다.  귀기 어리다.  <잡인열전>은 그들을 쓰레기라 부른 인간이 누구인지를 먼저 밝히는 것이 우선이고, 그들의 삶에서 귀기를 느끼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살피는 것이 그 다음일 것이다.

 

     <잡인열전> 그 첫이야기는 '협객'이다. 이수광 씨는 조선사에 대해서 해박하다.  먼젓번에 읽었던 책뿐 아니라 이수광 씨 저서는 조선사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다.  <잡인열전>도 같은 맥락이다.  협객 장복선에서 여검객 검녀로 끝나는 <잡인열전>은 단순히 재미로만 읽히기에는 얼개가 튼실하다.  무엇을 전달하고자 이수광 씨는 그들을 잡인으로 부르면 애환을 담아내야 했을까. 

 

     잡인들에 대한 관심은 민초에 대한 관심이다.  교조적인 성리학의 시대를 넘어 18세기로 들어서면서 이용후생학이 발전하고 여항문학이 꽃피운 것은 이러한 민초들의 끊임없는 자각에 의해서다.

     잡인은 잡스러운 사람이 아니다.  조선시대 뒷골목이나 저잣거리에서 파격적이고 열정적인 인생을 살았던 사람들이다. (머리말,에서)

 

     '민초'에 대한 관심으로 이수광 씨는 잡인을 표명하고 있다.  잡인은 잡스러운 사람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잡인의 한자표기와 잡스럽다의 '잡'은 같은 한자다.  우리가 아니라 주장한다고 해서 그들이 잡인이 아닐 수 있을까.  의문이다.  여전히 야사보다는 정사를, 야인보다는 위정자를 경외하는 세태이다.  나는 잡인을 시대에 적응한 천재라 부르는 것이 어떨까,  처음 책을 읽으면서 그러한 생각을 했다.  한데 아니다.  그들은 위대한 천재가 아니라는 쪽으로 생각이 옮아갔다.  그들은 결국 우리 모두이기 때문이다.

 

     각설이타령을 누가 지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단순하게 양반들이나 부호들을 풍자하기 위해 타령을 만들었다고 하기에는 가사의 내용이 놀라울 정도로 해학적이고 시적이다.  (...)  양반이나 고관대작의 자제가 아니라고 해서 시경이나 논어맹자를 읽지 말란 법은 없으나 상당히 풍자적이다.  그러나 이 타령을 부르는 사람들의 삶에는 신산함이 있고, 곡조는 신명 높아서 다분히 혁명적이다. (196~ 197쪽)

 

     예끼, 거 잡놈일세. 라는 소리는 사극 보면 양반님네들이 쓰시던 말씀이다.  물론 양인들도 즐겨 사용하는 말이다. (양반도 큰 범주에는 양인에 속한다고 들었던 것 같다) 결국 <잡인열전>에서 잡인이라 불리는 분들은 존귀하신 양반님네들이 하사한 별칭인 셈이다. 요즘도 영감님, 대감님께서 큰소리 떵떵치면서 없는 수염 대신 자신의 턱살을 쓰다듬고는 "잡것들"이라 혀를 찬다.  기가 차는 세상사 푸념조로 한 마디 한 발언에도 역도로 내몰리는 세상은 비단 조선조에만 해당하는 고리타분한, 옛적 이야기라고만 치부할까. <잡인열전>에서 귀기를 느끼는 것은, 그 본질적인 이유는 결국 지금이 그 당시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는 현실 인식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너무 염세적인가.  각설이타령이나 신명나게 불러나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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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한양이 서울이야? - 이용재 선생님과 함께 떠나는 600년 서울 역사 여행 토토 생각날개 3
이용재 지음, 김이랑 그림 / 토토북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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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146쪽)

 

 



     서울? 아 서울... 그래 서울... 그래서?

 

     한때 서울은 동경, 그 자체였다.  서울 지역말씨가 얼마나 감미롭던가.  아니 나는 서울 지역말을 감미롭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버스 뒷자리에서 서울말로 간밤에 있었던 애정행각을 방송하는 젊은이, 전화통화를 엿들으면서도 나는 간들어지는 서울말씨에 뭐 마려운 뭐처럼 위태위태했다.  서울이 서울인가? 아무래도 서울은 있는 그 자체보다 내가 만들어낸 환상에 젖어 왜곡된 채로 기억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2004년 8주 동안의 서울 연수는 참으로 참담했다.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먹는 대로 쭉쭉 쏟아버리는 통에 아니 다짐한 체중감량으로 기뻐한 것이 기억난다.  내가 알고 있는 서울은 실제 서울이 아니다. 

 

     <아빠, 한양이 서울이야?>는 읽으면서 내가 만화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  왜? 물론 그림체가 좀 있기는 하지만, 참고 사진이 많기도 하지만 딸아이와 아빠의 대화와 임금과 신하 간의 대화가 제대로 융합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딸 아이의 대화인가 싶었는데 어느새 신하와 임금의 대화가 불거져나오곤 한다.  처음에는 어색했다.  한데 읽을수록, 특히나 나처럼 한데 집중하지 못하는 사람이 읽기에는 집중도를 높이는 효과를 거둔다.  해서 나는 단박에 이 책을 읽고는 눈만 멀뚱멀뚱, 끔뻑이고 있다.  서울? 서울이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런 뜬금없는, 황당한 생각을 한다. 

 

     서울은 신라의 서라벌이 변해 된 말이라고 한다.  해서 서울은 지금의 서울일 수도 있고, 다른 곳이 서울이 될 수도 있다. 서울의 다른 이름은 해서 다양하게 쓰일 수 있는 것이다.  쿠데타, 반역으로 나라이름만 바꾼 조선, 지배계급이 바뀌면서 나라는 새롭게 정비된다.  즉 <아빠 한양이 서울이야>는 결국 역성혁명? 이성계의 구데타로 말미암아 왕조가 바뀌고 난 뒤의 상황에 대해서 알려주고 있는 것이 전반부이다.  그리고 왕조가 바뀜에 따라 분위기 쇄신?으로 여러 건축물을 축조, 그 역사성을 소개하고 있다.  어떠한 건물이 생기고, 무너지고, 보수되고, 복원되는 것, 그것이 곧 역사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조선 500년, 그 역사의 물결 속에서 살아남은 건물, 다시 살아난 건물들을 <아빠 한양이 서울이야>에서 우리는 찾아볼 수 있다.  그것뿐이 아니다.  조선조의 역사물 이외에도 당시의 정치, 경제에 대해서도 간단간단하게 언급함으로써 일제의 강제점령기 이전의 우리 땅에 대해서 살피도록 배려하고 있다.  진정 우리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찰까지 가닿지는 못하지만, 이 책을 통해서 아이들과 함께 이야기할 구실,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고, 그러한 이점 때문에 이 책은 가치가 있는 것이다.

 

     서울,은 왕성(王城)이 있는 곳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서울,은 청와대가 있기 때문에 서울이 아니다.  서울,이라는 말에 대한 적절한 정의는 <아빠, 한양이 서울이야?>를 읽는 우리가 직접 표현해야 할 과제이다.  아이에게, 아니 우리 자신에게 한 번 물어보자.  서울은 어디입니까?  서울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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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육과 육식 - 사육동물과 인간의 불편한 동거
리처드 W. 불리엣 지음, 임옥희 옮김 / 알마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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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잡식동물이오,라고 말하고 다닌다. 물론 <사육과 육식>을 읽기 전에도 나는 그랬다. 나는 잡식동물, 그 가운데도 육식동물이라 밝힌다. 부끄럽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불편한 진실이라고 했던가, 죽을 때까지 몸뚱이 살아갈 동안은 어쩔 수 없어라 나는 고기를 어금니로 꽉 깨물어 뜯어먹고 살고 싶다, 내가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다고 변명을 하리. 그것이 현실이라 말을 한다. <사육과 육식> 나의 육신은 내것이 처음부터 아니었다. 그렇게 합리화할까, 자본주의가 즐겨 품안던 논리를 나는 편승한다. 시류에 편승한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잘할 수 있고 만족을 느끼는가, 그것이 자아 실현이라고 한다. 즉 자존심이라 한다. 충격이다. <사육과 육식>은 단순히 '채식주의' 권장의 의미를 넘어서서 '나'의 위치에 대한 통시적 고찰이다. 그 노정 뒤에 나는 변할 수 있을까. 확신하라, 장담하라, 약속하라... 아니 <사육과 육식>은 강요하지 않는다. 두꺼운 책술 그 속 가득 담긴 이야기는 논리적이지만 절대 강요하지 않는다. 하나의 도식을 만들고 그 틀에서, 프레임에서 역사를 말한다. 단순한 인간의 역사, 침범과 약탈과 자멸의 역사가 아니라 대자대비 자연과의 공생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다시 나는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잘하고 만족을 느끼는가. 그것이 자아실현이라 하던데 그러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어금니에는 닭 살코기가 걸려 있다. 나는 육식동물이다. 그리고 나는 괴로워한다. 사육되는 생명의 처절함과 불편한 현실에 대해서 나는 지독히도 괴로워하면서 육식 부드러운 살코기를 뜯어갈기며 야금야금 저작활동을 열댓 번 하면서 살아남기 위해서 삼킨다. 그리고 연민의 정을 느낀다고, 때때로 채식주의를 강조한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강요하지 않는다.

 

    <사육과 육식>에서는 새로운 역사관을 만난다. 여태 역사는 인간의 것이었다. 그리고 산업혁명과 계몽주의, 합리성에 나는 철저히 '새'가 되었다만 새는 결코 우리가 말하는 것처럼 무식하지 않다는 사실. 그들의 고통을 느낄 새가 없다. 그리하여 <사육과 육식>을 읽는 동안 무심한 듯, 나는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다. <사육과 육식>은 하늘 아래 같은 생명을 지닌 동물, 그러나 밥상에 오를 운명을 지닌 그들을 가볍게 동정하는 수준을 벗어나 있다. 사육시대 전후로 역사를 구분하면서 새로운 관점의 열어주고 있다. 굵직한 뼈대 아래에서 우리는 협소한 사고에 벗어나 진정한 생명사상을 만날 수 있다.

 

    여기서 끝날 이야기 아니다. <사육과 육식> 내가 먹는 것이 곧 나이라는 생각을 다시금 다진다. 나는 갈대가 아니다. 생각하는 갈대는 더더욱 아니었다. 나는 단순히 하늘 아래에 생명 얻어 살아가고 있는 개체일 뿐이다. 내가 '누구'인가를, 그러한 생각에 심도를 더할 수 있는 기회를 <사육과 육식>이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해답을 쉽사리 도출해낼 수 있을까. 여전히 나는 연한 살코기를 씹어갈기면서 '채식'을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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