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잡식동물이오,라고 말하고 다닌다. 물론 <사육과 육식>을 읽기 전에도 나는 그랬다. 나는 잡식동물, 그 가운데도 육식동물이라 밝힌다. 부끄럽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불편한 진실이라고 했던가, 죽을 때까지 몸뚱이 살아갈 동안은 어쩔 수 없어라 나는 고기를 어금니로 꽉 깨물어 뜯어먹고 살고 싶다, 내가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다고 변명을 하리. 그것이 현실이라 말을 한다. <사육과 육식> 나의 육신은 내것이 처음부터 아니었다. 그렇게 합리화할까, 자본주의가 즐겨 품안던 논리를 나는 편승한다. 시류에 편승한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잘할 수 있고 만족을 느끼는가, 그것이 자아 실현이라고 한다. 즉 자존심이라 한다. 충격이다. <사육과 육식>은 단순히 '채식주의' 권장의 의미를 넘어서서 '나'의 위치에 대한 통시적 고찰이다. 그 노정 뒤에 나는 변할 수 있을까. 확신하라, 장담하라, 약속하라... 아니 <사육과 육식>은 강요하지 않는다. 두꺼운 책술 그 속 가득 담긴 이야기는 논리적이지만 절대 강요하지 않는다. 하나의 도식을 만들고 그 틀에서, 프레임에서 역사를 말한다. 단순한 인간의 역사, 침범과 약탈과 자멸의 역사가 아니라 대자대비 자연과의 공생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다시 나는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잘하고 만족을 느끼는가. 그것이 자아실현이라 하던데 그러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어금니에는 닭 살코기가 걸려 있다. 나는 육식동물이다. 그리고 나는 괴로워한다. 사육되는 생명의 처절함과 불편한 현실에 대해서 나는 지독히도 괴로워하면서 육식 부드러운 살코기를 뜯어갈기며 야금야금 저작활동을 열댓 번 하면서 살아남기 위해서 삼킨다. 그리고 연민의 정을 느낀다고, 때때로 채식주의를 강조한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강요하지 않는다.
<사육과 육식>에서는 새로운 역사관을 만난다. 여태 역사는 인간의 것이었다. 그리고 산업혁명과 계몽주의, 합리성에 나는 철저히 '새'가 되었다만 새는 결코 우리가 말하는 것처럼 무식하지 않다는 사실. 그들의 고통을 느낄 새가 없다. 그리하여 <사육과 육식>을 읽는 동안 무심한 듯, 나는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다. <사육과 육식>은 하늘 아래 같은 생명을 지닌 동물, 그러나 밥상에 오를 운명을 지닌 그들을 가볍게 동정하는 수준을 벗어나 있다. 사육시대 전후로 역사를 구분하면서 새로운 관점의 열어주고 있다. 굵직한 뼈대 아래에서 우리는 협소한 사고에 벗어나 진정한 생명사상을 만날 수 있다.
여기서 끝날 이야기 아니다. <사육과 육식> 내가 먹는 것이 곧 나이라는 생각을 다시금 다진다. 나는 갈대가 아니다. 생각하는 갈대는 더더욱 아니었다. 나는 단순히 하늘 아래에 생명 얻어 살아가고 있는 개체일 뿐이다. 내가 '누구'인가를, 그러한 생각에 심도를 더할 수 있는 기회를 <사육과 육식>이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해답을 쉽사리 도출해낼 수 있을까. 여전히 나는 연한 살코기를 씹어갈기면서 '채식'을 주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