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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남자를 모른다
김용전 지음 / 바우하우스 / 2008년 9월
평점 :
품절
1.
제목이 참... "남자는 모른다"이다. 잘 모른다도 아니고 아예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면 여자는 알까? 한데 그것도 아니다. "여자도 모른다"로 귀착되고 만다. 착잡하다. 어쩔 수 없다. 현실이다.
2.
책 읽기 전에 먼저 목차를 살핀다. 백설기에 건포도를 뽑아먹는, 눈 시커먼 아이처럼 책을 한장씩 넘겨가며 대충 훑었다. 그 와중에 내 눈에 콕 들어와 박히는 단어가 있는데... 그것이 그 유명한 "본인은"이었다. 아뿔싸, 또 나의 편견과 선입견이 작동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어느 높으신 분은 "본인을 믿어주세요." 했고, 착한 국민은 정말 믿어줬다는 전설이 있다. 나는 단순히 그러한 지칭에 적이 기분이 상했다. 권위주의를 얄궂다 하는 것은 곧 권위를 탐하는 무의식이라는 얼토당토 않은 말(내가 수용하기에는 너무나도 엄청난 일인지라 부정하고 있다)을 "본인, 필자"에서 끌어내는 분들. 버스 앉은 자리에서 읽어나는 행동이, 노약자에게 자리를 비워주는 행동이 죄의식 때문이라니... 맞댄 자리에서 혀를 찰 수 없어서, 등 돌려 문 닫는 순간에 나는 눈살을 찌푸린다.
오해 마시라. 이 책은 권위적인 책도 아니요, 강압적으로 설명하고 비난하고 가르치려 드는 책도 아니다. 이 책은 거울 같다. 책 읽는 동안 나는 마치 상담 장면에 앉아 있는 듯 착각을 했다. 나는 마치 골방에 혼자 앉아 나를 돌아보는 작업을 하는 것만 같았다. '본인'이라는 말에 휘둘려 책을 덮어버렸다면 이와 같은 경험, 자기 성찰의 기회를 놓쳐버렸을지도 모른다. 다행이다.
3.
여자가 가장 궁금한 것 : 남자의 속마음// 남자가 가장 궁금한 것 : 여자의 속옷 (63쪽)
보편적으로 수긍되는 내용이다. 하지만 보편은 보편에만 해당될 뿐 모든 사람에게 적용하기는 어렵다. 원칙에는 예외가 있게 마련이다. <남자는 남자를 모른다>는 책은 구성상, 소제목 아래에 사례를 들고 각 내용 말미에는 명문을 실어놓고 있다. 장작이 불길에 튀는 것처럼 탁타다닥 별안간 '나'를 들여다보는 기회를 그 명문에서 얻게 된다. 글쓴이가 제시하고 있는 사례, 주변인들의 이야기와 자신의 일상사에서는 우리는 자기방어의 결계를 풀게 된다. 그리고 명문에서는 나도 그랬지, 동일시, 나와 같은 경험은 글쓴이가 하는구나. 그래 사람일이야 거기서 거기,라며 인정하게 된다. 변화 성정은 인정에서 출발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남자는 남자를 모른다>는 여느 상술적인 심리학서, 쭉정이 같은 자기계발서에 비견할 것이 못된다. 월등하다. 물론 이와 같은 경험을 모든 장면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많은 이유야 있겠지만 우선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아직 내가 경험하지 못한 부분, 그 시간. 하니 그것이 가능성의 시간이다. 예고편을 봤다고 본편의 내용을 모두 아는 것이 아니다. 속독과 정독의 차이가 분명하듯이, 경험과 그렇지 못한 것과의 간격은 참으로 크다.
"남자가 목숨을 거는 것들"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모른다. 하지만 나의 경험에 미루어볼 때 <남자는 남자를 모른다>에서 지적하는 부분은 참으로 명쾌하다. 남자는 자신을 '인정'해 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건다(68쪽). 물론 나는 의심이 특기라서 목숨까지는 걸지 않지만, 안전지대에서 그를 존경하고 위해주려는 마음은 한정이 없을 것이다. 돌이켜보건대, 그렇다. 여러 일들이 찰나처럼 스쳐지나간다.
4.
제목에서 풍기는 분위기, 해서 여성인권해방자들에게는 다소 거부감을 줄 수 있을 만한 여지를 안고 있는 이 책은 사실 남자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지 않다. 심리, 생활양식, 관계, 대화기술법 등 다양한 것을 한데 뭉쳐놓고 말하고 있다. "당신은 예외인가요? 그렇다면 편안하게 대인관계를 누리고 계신가요?"
나의 주관심사는 '편안'이다. 불편보다 불안이 우선 관심대상이라고 하지만, 사실 불안에까지 면밀하게 신경 써 처리할 수 있는 내적인 힘이 내게는 부족하다. 해서 나는 불안은 잠시 유예하고 불편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왜 이렇게 불편해하는가, 왜 불편한 일을 반복적으로 행동하는가에 대해서 요사이 주로 신경을 쓰고 있다. 물론 엉덩이가 배겨서 지루해 미칠 때에만 하는 생각일 뿐이다. 한군데 열중하는 시간이 지극히 짧은 터라 가끔, 가끔 불편을 대처하는 나의 행동방식에 대해서 생각할 뿐이다.
<남자는 남자를 모른다>를 나는 '불편'의 관점에서 읽었다. 편안해졌나 묻는다면, 또 눈만 끔벅일 것이다. 이건 편안해질 일이 아니다. 그것을 어렴풋이 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5.
<남자는 남자를 모른다>는 읽는 자체로 큰 공부가 된다. '나'를 돌아보는 일, 그것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된다. 읽는이가 남자라면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단속하는 데에 관심을 기울일 수 있고, 여자라면 내 행동 어디가 남자를 자극해서 격분하게 되고, 나는 또 그런 상황에 어떻게 반사행동을 해왔는지를 돌아볼 수 있는 값진 기회를 얻을 것이다.
돌아본다는 것, 과거로 끊임없이 들어가 틀어박히는 것은 부정적인 일면이 있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을 부정적인 영향력을 행세하는 것으로 보았다고 한다. 경험상 과거로 돌아가는 일, 과거를 들추는 일은 혼자서 삭여야 할 것으로 보인다. 과거는 지난 일이다. 어디에 가중치를 두고 있는지 생각해볼 때, 만약 '지금 여기'라면 적어도 과오는 잊지 말고 분석해야 한다. 그것은 철저히 개인적인 작업이어야 한다. 보통 분란은 지금이 아니라 '과거'를 갈아엎는 순간에 발생하게 된다. <남자는 남자를 모른다>에서 내가 얻은 유익은 거울과 '지금'이라는 것이다.
나는 숙련된 생활인이 아니다. 앞으로도 완벽한 인간이 되고자 노력하지는 않을 것이다. 완벽과 나약의 속성이 동일한다. 절대 그러지는 않을 것이다. 스스로 늪으로 들어가는 잘못을 또 자행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지금 여기'에서 '내가 할 수 있는 한'만큼 한다는 것의 의미를 <남자는 남자를 모른다>는 다시금 보여주고 있다. 작은 책 속에 거대한 전신거울이 들어 있었다. 내 몸 구석구석 치부를 드러내준 거울을 닦지도 않고 덮어버렸다는 것에 적잖이 미안타. 그리고 고맙다.
책 읽는 재미는 분명 이런 것일 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