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가 변해야 아이가 산다 - 자녀교육 전문가 40인과 함께하는 좋은 부모 워크숍
마샬 듀크.사라 듀크 엮음, 모난돌 옮김 / 뜨란 / 2008년 8월
평점 :
절판


 

 


   그 동안 이른바 전문가라는 사람들은 권위적인 이름 아래 수많은 아이들에게 몹쓸 짓을 한 셈이다. 부모없이 자랐거나 또는 과잉 억압, 가족 해체, 교육 기회상실, 관심 부족, 기계적인 수업, 제때 치료 받지 못한 학습 장애 등에서 비롯된 여러 문제들을 아동기 질환으로 치부했으니 말이다. 이와 같은 잘못된 진단 때문에 우리 사회는 아이들을 제대로 기를 책임이 있는 기관들을 개선해야 하는 중요한 의무를 소홀히 했다. 그 대신 모든 잘못의 원인을 아이들에게 떠넘겨왔다.

(109쪽)

 

   나는 이 발문에 동의한다. 전문가들이 말하는 전문가의 권위가 얼마나 위험한지에 대해서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한 일들을 앞으로도 자주 목격할 것이기 때문에 내가 보는 세상은 비관적이고, 암울하다. 그러한 일들을 막을 기회가 얼마든지 있기 때문, 가능성의 시간이 창창하기 때문에 세상은 긍정적이고 밝다. 

   <부모가 변해야 아이가 산다>는 불편과 불안을 기저에 깔고 있다. 

   씌어진 글들은 관련 현장에서 활동중인 다양한 전문가들이 썼다. 부모의 노력에 아이의 목숨이 달려 있다는 이 책제목, 참으로 강렬한 일침이다. 아동관련 분야에서 열성적으로 활동하는 많은전문가들이 쓴 다양한 글들에는 일면 겹치고 중첩되는 내용도 있다. 하지만 어느 하나도 가벼이, 귓등으로 듣고 넘길 일이 아니다. 한 아이의 목숨이 걸려 있는 중대사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지침이다.

 

  아이들은 자기 집안이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집안이라고 느껴야 한다. 아이들에게 가족에 대한 고유하고 특별한 자부심을 심어주자. 배타적인 우월 의식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다른 지역과 다른 문화와의 연대감 속에서 독자성을 간직하게 하라는 것이다.

(90쪽)

 

  이 책에서는 다양한 관점을 볼 수 있다. '아이'에 대한 책을 나는 '루소의 에밀'을 통해서 처음 접했다. 인상 깊었지만 내게는 굉장히 지루했던 책이었다. <에밀> 이전의 세상, 즉 기독교의 성악설로 보는 세상은 온통 죄악뿐이었다. 아이는 죄를 지은 존재요, 그러니 어른들의 축소판 이외의 것이 아닌 하나의 노동력이었다. 노동력의 관점에서 아동은 착취의 대상이었다.

 

  그렇다면 지금이라 다를까. 여느 중산층 이상의 가정의 아동만이 아이라 한다면 분명 달라졌을 것이다. 아이는 환경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중산층 이상, 경제력이 있는 집안만이 사람이라 하면 분명 세상은 바뀌었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들도 '사람대접'을 받고 사는지는 의문이다. 성적의 족쇄, 벗어나려 돌아누울수록 더 죄어드는 족쇄에 걸려 아이들은 살아가고 있다. 신체, 정서, 방임, 성학대 등 수위만 다를 뿐 아이는 어른에게 '적대심'을 품고 살아가고 있다.

 

  내가 속한 가정, 우월의식, 선민의식이 아니라 "독자성"으로 당당해질 수 있기를 바란다. 나 역시 그러한 독자성의 당당함을 누리지 못했으니,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의문이다. 학대는 세대간 전승되게 마련이다. "나는 결코 저렇게 행동하지 않을 것이다."가 안고 있는 위험성을 잊어서는 안 된다.

 

  건강한 가정을 경험하지 못한 부모는 아이에게도 마찬가지 상처를 주게 마련이다. 아이에게 탁월한 양육을 하고자 한다면 뼈를 깎는 노력이 필요하다. 아무리 많은 책, 좋은 책을 읽더라도 아이에게 직방(직효약)은 없다. 아이가 어른의 축소판일 수 없듯이 아이는 책 그대로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가진 단 하나의 희망이다. 그것이 우리의 전부이다.  

 

  정직하고 공평하세요. 우리는 모순을 금방 알아차려요. 우리는 엉터리를 믿지 않아요.

  우리가 자란 뒤에도 계속해서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듣지 않는 것처럼 비칠지 몰라도 우리는 다 듣고 있답니다.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달아가고 있어요.

  약속을 지켜주세요. 우리는 정말 엄마아빠를 믿고 싶어요. 따뜻한 사랑과 보호를 받고 싶어요.

  "너는 정말 너무나도 소중한 사람이란다."라고 말해주세요.

(215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버지도 천재는 아니었다
김상운 지음 / 명진출판사 / 2008년 9월
평점 :
품절


 

 



    <아버지도 천재는 아니었다>는 종합선물세트다. 별의별 것이 다 들어 있고, 이럴 경우 보통은 싸구려 과자가 들어차 있기 일쑤인데 아니다. 어느 하나 버릴 것이 없다. 입에 넣으면 사르르 녹아난다. 굉장하다, 연발 감탄사가 쏟아진다. 더욱이,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작년과 올해 무식하게 읽어왔던 심리학서, 자기계발서를 일차적으로 정리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특별히 새롭지는 않지만, 굉장히 이해가 쉽게 요약 잘 된 책이 <아버지도 천재는 아니었다>이다. 대상은 자녀, 학생 연력의 자녀로 예상되지만 그것은 문체상으로만 효력이 있다. 내용은 전연령이 읽어도 지루하다거나 밋밋하다는 느낌이 전혀 없다.

 

   '너는 너의 뇌를 알고 있니?'로 글머리가 시작한다. 솔직히 나는 이 책을 아버지가, 자신의 무능을 대변하기 위해서 씌어졌을 거라 짐작했다. 그러니 글머리에 들이대는 이 문장은 뜻밖이었다. '뇌'라니, 아버지하고 뇌가, 천재가 아닌 아버지와 뇌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리고 오랜만에 들어보는 '모소대나무', 좀체 자라지 않다가 몇 해가 지난 나중에야 실체를 드러내는 중국산 대나무. 머리글을 읽으면서 아, 이 책은 자기계발서에 가깝겠구나라고 나는 생각했다. 뇌와 모소 대나무, 그리고 천재들의 사례 등은 사실 낯설 것이 없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 책은 전혀 다르게 읽히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

 

  아직 과학으로는 입증하지 않은 일들을, 지금 사람들은 여전히 믿지 않을 만한 일들을 예시로 든 부분도 있다. 믿고 안 믿고는 사실 수용자의 선택적 결정일 뿐이다. 현실에 그러한 일이 있다는 것을 보고도 안 믿고, 보고도 믿을 수 없는 때는 무수히 많다. <아버지도 천재는 아니었다>에는 '긍정적 사고, 심리'가 깔려 있다. 하나의 이미지를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 즉 소원이 노력으로 달성된 뒤의 모습을 끊임없이 생각하며 생활한다는 것은 '시크릿'을 더욱 잘 이해하게 만들어준다. 무조건 긍정적인 생각을 하라는 요구를 받아들고 나는, 내 속에 끓는 원망을 느꼈고, 무시할 수 없어서 괴로웠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동일선상의 내용인데도 <아버지도 천재는 아니었다>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이해가 간다. 김상운 씨가 전달하는 내용에는 수긍할 만한 점이 많다.

 

  '천재'란 무엇일까. 이 책이 과연 천재와 연관이 있을까, 아니면 사람의 조건에 초점을 둔 것일까. 그것에 의구심은 책을 덮고도, 읽는 순간에도 여전했다. 행복론은 여전히 논란거리다. 행복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라, 당신 행복하십니까? 종교인들은 수시로 따져묻고, 비종교인들은 또 행복을 들먹여 사람을 괴롭히는 걸까. 그런데 문제는 '행복'이 무엇인지, 아예 생각조차하지 않는 '나'라는 인간이다. 물론 천재가 되어, 사람으로서의 기능을 전부 발휘한다는 것은 좋을 일이다. <아버지도 천재는 아니었다>는 노력을, 수신을 다루고 있다. 사람이라면 알아둬야 할 이야기들, 한 번 읽어두는 것, 읽는 순간 나중에 또 찾아 읽어야 할 책이라는 것을 직감하게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여자가 꼭 알아야 할 대화법의 모든 것
이정숙 지음 / 눈과마음(스쿨타운) / 2008년 9월
평점 :
품절


 



1.

   <여자가 꼭 알아야 할 대화법의 모든 것>(이하 <대화법>)의 초점은 '여성'이다. 여자로서 어떻게 살아갈까, 고민하는 분들이 참으로 많다. 사람이라는 것이 '잘 살기' 위해 부단히 걱정하고, 걱정하고, 걱정만 하는 동물이다. 짐승이다. 걱정하고 걱정하고 걱정하다가 그래도 잘 안 되면 왜곡된 행동으로 상황을 모면하려 애쓴다. 마치 부나비처럼, 타 죽을 것을 예상치 못하는 듯 불길에 돌격하는 부나비처럼 사람 역시 다를 것이 하나 없다. 미물과 다르다면 사람이 아닐 것이다. 사람 역시 동물이고 그 범쥐에서  거의 대부분의 행동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비관론자인가? 아니다. 나는 현실론자다.

 

   사람은 만물의 영장이 아니다. 다만 사람은 사람일 뿐, 동물의 한 씨[種]일 뿐 달리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즉 엄벙떵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고, 내가 하고자 하는 말뜻 본뜻은 '잘 살고 싶은' 욕망에 따라 사람이 움직인다는 것이다.

 

 

2.

   <대화법>은 여성성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성 구별로 꼭 여자만 읽어야 할 책이라고 단정짓는 데는 너무나 억지스럽다. 

 

   여느 대화법, 의사소통 기술법에서 소개된 말 잘하는 법, 속뜻 제대로 전달하는 법을 <대화법>에서도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다. 참으로 난감한 사례를 먼저 들고, 대책을 마련해주고, 마지막에 글 끄트머리에는 요약을 해준다. 요약부에서는 전문적인 용어가 덧붙여짐으로써 <대화법>은 책의 수준을 한단계 끌어올렸다는 느낌을 받는다. 문장에서도 가볍게, 너무 가벼워 무엇을 읽었나 생각나지 않을 만큼 허술하게 만든 책이 아니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대화법>을 쓴 이정숙 씨의 필력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 그것은 물론 의사소통 기술적인 면에서 그러할 것이라는 것만은 우선 장담할 수 있다.

 

   우리 사회, 문화에 해당하는 각각의 사례와 지금 당장에도 쓰일 만한 대책들이 <대화법>을 가득 채우고 매우고 하면서 읽는 재미를 풍성하게 해주고 있다. 총4부와 부록(후기)의 짜임을 갖춘 <대화법>은 현재 여성들의 입지에서 서술하고 있다. 즉 직장관계, (미혼이든 기혼이든) 가족관계 속에서 여성, 그리고 3부와 4부는 인간 관계와 자기성장을 위해서 지면이 할애되고 있다. 여성적인 의사소통을 알아보는 개론서적인 성격이라고 할까. 그만큼 <대화법>은 여러 장면에서의 대책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누구나 겪어봤을 법한, 누구나 들어봤을 법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는데 그것이 식상하지 않다. 지루하지 않다. <대화법>의 강점이 곧 이것이다.

 

   게다가 줄간격이 널찍하고 글크기 역시 눈에 쏙쏙 들어온다. 며칠 두통을 앓으면서도 이 책을 놓지 않았는데 구성상의 편의 제공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대화법>의 첫인상이 정말 좋았다.

 

 

3.

   <여자가 꼭 알아야 할 대화법의 모든 것>은 제목에서처럼 '여자가 꼭 알아야 할' 이야기이지만, '여자만 꼭 알아야 할' 내용은 아니다. 나는 이 책을 '대화법'에 주목하고 읽기를 시작했고, 마쳤다. 그리고 책 모서리마다 접어둔 부분을 나중에 다시 찾아 읽을 것이 분명하다. 물론 이 책에 의존해서 내 모든 문제를 풀어내려는 아둔한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사실 불가능하다. 책읽는 '나'와 현실 속의 '나'는 너무도 큰 간격을 가지고 있다. 분노 상황에서, 격분하면 책을 짚어 천천히 읽는 것이 오히려 이상행동이다. 하지만 <여자가 꼭 알아야 할 대화법의 모든 것>을 생각하며, 도움을 받은 순간, 읽는 데에 즐거웠던 순간, 책 읽는 동안 내게 있었던 일들을 기억하게 될 것은 틀림없다.

 

   그것이 책이 가진 영향력이다. 사사로이 볼 수 없는 지대한 영향력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남자는 남자를 모른다
김용전 지음 / 바우하우스 / 2008년 9월
평점 :
품절


 

 

 

 


 1.

     제목이 참... "남자는 모른다"이다. 잘 모른다도 아니고 아예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면 여자는 알까? 한데 그것도 아니다. "여자도 모른다"로 귀착되고 만다. 착잡하다. 어쩔 수 없다. 현실이다.

 

2.

     책 읽기 전에 먼저 목차를 살핀다. 백설기에 건포도를 뽑아먹는, 눈 시커먼 아이처럼 책을 한장씩 넘겨가며 대충 훑었다. 그 와중에 내 눈에 콕 들어와 박히는 단어가 있는데... 그것이 그 유명한 "본인은"이었다. 아뿔싸, 또 나의 편견과 선입견이 작동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어느 높으신 분은 "본인을 믿어주세요." 했고, 착한 국민은 정말 믿어줬다는 전설이 있다. 나는 단순히 그러한 지칭에 적이 기분이 상했다. 권위주의를 얄궂다 하는 것은 곧 권위를 탐하는 무의식이라는 얼토당토 않은 말(내가 수용하기에는 너무나도 엄청난 일인지라 부정하고 있다)을 "본인, 필자"에서 끌어내는 분들. 버스 앉은 자리에서 읽어나는 행동이, 노약자에게 자리를 비워주는 행동이 죄의식 때문이라니... 맞댄 자리에서 혀를 찰 수 없어서, 등 돌려 문 닫는 순간에 나는 눈살을 찌푸린다.

    오해 마시라. 이 책은 권위적인 책도 아니요, 강압적으로 설명하고 비난하고 가르치려 드는 책도 아니다. 이 책은 거울 같다. 책 읽는 동안 나는 마치 상담 장면에 앉아 있는 듯 착각을 했다. 나는 마치 골방에 혼자 앉아 나를 돌아보는 작업을 하는 것만 같았다. '본인'이라는 말에 휘둘려 책을 덮어버렸다면 이와 같은 경험, 자기 성찰의 기회를 놓쳐버렸을지도 모른다. 다행이다.

 

3.

     여자가 가장 궁금한 것 : 남자의 속마음//     남자가 가장 궁금한 것 : 여자의 속옷 (63쪽)

 

    보편적으로 수긍되는 내용이다. 하지만 보편은 보편에만 해당될 뿐 모든 사람에게 적용하기는 어렵다. 원칙에는 예외가 있게 마련이다. <남자는 남자를 모른다>는 책은 구성상, 소제목 아래에 사례를 들고 각 내용 말미에는 명문을 실어놓고 있다. 장작이 불길에 튀는 것처럼 탁타다닥 별안간 '나'를 들여다보는 기회를 그 명문에서 얻게 된다. 글쓴이가 제시하고 있는 사례, 주변인들의 이야기와 자신의 일상사에서는 우리는 자기방어의 결계를 풀게 된다. 그리고 명문에서는 나도 그랬지, 동일시, 나와 같은 경험은 글쓴이가 하는구나. 그래 사람일이야 거기서 거기,라며 인정하게 된다. 변화 성정은 인정에서 출발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남자는 남자를 모른다>는 여느 상술적인 심리학서, 쭉정이 같은 자기계발서에 비견할 것이 못된다. 월등하다. 물론 이와 같은 경험을 모든 장면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많은 이유야 있겠지만 우선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아직 내가 경험하지 못한 부분, 그 시간. 하니 그것이 가능성의 시간이다. 예고편을 봤다고 본편의 내용을 모두 아는 것이 아니다. 속독과 정독의 차이가 분명하듯이, 경험과 그렇지 못한 것과의 간격은 참으로 크다.

 

     "남자가 목숨을 거는 것들"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모른다. 하지만 나의 경험에 미루어볼 때 <남자는 남자를 모른다>에서 지적하는 부분은 참으로 명쾌하다. 남자는 자신을 '인정'해 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건다(68쪽). 물론 나는 의심이 특기라서 목숨까지는 걸지 않지만, 안전지대에서 그를 존경하고 위해주려는 마음은 한정이 없을 것이다. 돌이켜보건대, 그렇다. 여러 일들이 찰나처럼 스쳐지나간다.

 

4.

    제목에서 풍기는 분위기, 해서 여성인권해방자들에게는 다소 거부감을 줄 수 있을 만한 여지를 안고 있는 이 책은 사실 남자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지 않다. 심리, 생활양식, 관계, 대화기술법 등 다양한 것을 한데 뭉쳐놓고 말하고 있다. "당신은 예외인가요? 그렇다면 편안하게 대인관계를 누리고 계신가요?"

    나의 주관심사는 '편안'이다. 불편보다 불안이 우선 관심대상이라고 하지만, 사실 불안에까지 면밀하게 신경 써 처리할 수 있는 내적인 힘이 내게는 부족하다. 해서 나는 불안은 잠시 유예하고 불편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왜 이렇게 불편해하는가, 왜 불편한 일을 반복적으로 행동하는가에 대해서 요사이 주로 신경을 쓰고 있다. 물론 엉덩이가 배겨서 지루해 미칠 때에만 하는 생각일 뿐이다. 한군데 열중하는 시간이 지극히 짧은 터라 가끔, 가끔 불편을 대처하는 나의 행동방식에 대해서 생각할 뿐이다.

     <남자는 남자를 모른다>를 나는 '불편'의 관점에서 읽었다. 편안해졌나 묻는다면, 또 눈만 끔벅일 것이다. 이건 편안해질 일이 아니다. 그것을 어렴풋이 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5.

     <남자는 남자를 모른다>는 읽는 자체로 큰 공부가 된다. '나'를 돌아보는 일, 그것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된다. 읽는이가 남자라면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단속하는 데에 관심을 기울일 수 있고, 여자라면 내 행동 어디가 남자를 자극해서 격분하게 되고, 나는 또 그런 상황에 어떻게 반사행동을 해왔는지를 돌아볼 수 있는 값진 기회를 얻을 것이다.

     돌아본다는 것, 과거로 끊임없이 들어가 틀어박히는 것은 부정적인 일면이 있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을 부정적인 영향력을 행세하는 것으로 보았다고 한다. 경험상 과거로 돌아가는 일, 과거를 들추는 일은 혼자서 삭여야 할 것으로 보인다. 과거는 지난 일이다. 어디에 가중치를 두고 있는지 생각해볼 때, 만약 '지금 여기'라면 적어도 과오는 잊지 말고 분석해야 한다. 그것은 철저히 개인적인 작업이어야 한다. 보통 분란은 지금이 아니라 '과거'를 갈아엎는 순간에 발생하게 된다. <남자는 남자를 모른다>에서 내가 얻은 유익은 거울과 '지금'이라는 것이다.

 

     나는 숙련된 생활인이 아니다. 앞으로도 완벽한 인간이 되고자 노력하지는 않을 것이다. 완벽과 나약의 속성이 동일한다. 절대 그러지는 않을 것이다. 스스로 늪으로 들어가는 잘못을 또 자행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지금 여기'에서 '내가 할 수 있는 한'만큼 한다는 것의 의미를 <남자는 남자를 모른다>는 다시금 보여주고 있다. 작은 책 속에 거대한 전신거울이 들어 있었다. 내 몸 구석구석 치부를 드러내준 거울을 닦지도 않고 덮어버렸다는 것에 적잖이 미안타. 그리고 고맙다.

 

     책 읽는 재미는 분명 이런 것일 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 권으로 읽는 중국인의 실체 - 한 권으로 중국인에 대한 모든 것을 샅샅이 파악한다
콩젠 지음, 최선임 옮김 / 지식여행 / 2008년 7월
평점 :
절판


 


    중국론을 읽고 싶었다. 

    제목에서 풍기는 뉘앙스는 분명 중국론이었다.  하지만 내용은 쪽수 많은 두꺼운 책의 지면에 비해 중국에 대해라기보다는 오히려 일본론에 가까웠다.  해서 관련책으로는 박경리 선생의 <문학을 지망하는 젊은이들에게>, 이어령 선생의 <축소지향의 일본론>, 리영희 선생의 <대화>와 함께 읽으면 <중국인의 실체>라는 책을 더 풍성하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중국에게 일본은, 한국의 그것처럼 양가감정을 보인다.  콩첸 씨가 나는 공자의 몇 대 손이라 하는 것에 나는 그저 눈만 끔벅거리다가 휙 책장을 넘겨버렸다.  내게 과거는 중요하지 않지만, 과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지금의 세태는 예삿일이 아니다.  2차 세계대전과 이데올로기의 난장판이 되었던 한국전쟁, 참혹하다.  전쟁 뒤의 현실은 더 참혹하다.

 

     일본 천황을 중국에서는 황제라 부르고 있다. 그래서 약간 순진한 중국인들이 잠깐 넋을 놓은 감이 있다. 1937년 난장에 진입한 일본군들이 20여만 명의 시민과 아녀자들의 배를 갈라 잔혹하게 죽인 역사를 잠시 잊고 황제(천황)라는 드높은 어감에 만감이 교차한 것이다. (208쪽)

 

    난징대학살을 언급한 부분이 <중국인의 실체>를 읽는 동안, 가장 강렬했다.  현대사적 접근으로 중국론에서 일본군국주의, 약탈전쟁이 빠질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동북아, 동남아, 서구 제국주의와의 충돌에서도 일본 군국주의는 침통한 세력이요, 사갈시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일본에 대해서는 한국과 중국이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언제나 동일 감정을 가진다는 사실에서, 나는 그 어떤 희열감을 느꼈다. 이것의 구체적인 원인은 얼핏 짚이는 것 같으면서도 딱 부러지게 뭐라 말할 수 없는 미묘한 감정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한국인 독자에게/ 콩젠)

 

    일본에 대해서 중국, 한국이 동일한 태도를 표명한다, 글쓴이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중국인의 실체>를 읽을 때, 간혹 허방으로 빠지고 있다는 착각을 하게 된다. 이유인즉슨 일본을 보는 글쓴이의 논지가 한국에서의 태도와 유사한 측면을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일하지 않다. 글쓴이가 말했듯이 거기에는 '미묘한 감정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300쪽 넘기면 책이 반토막 날 듯 위태한 <중국인의 실체>는 생각보다 쉽게 읽힌다. 이해도 쉽다. 허나 단순히 읽고 넘길 일만은 아니다.  유구한 역사라고 한족은 자신의 역사를 자랑하고, 장차 미래는 한족이 제패한다는 포부를 스스럼없이 펼치고 있다.  해서 우리 아이들의 가방에는 온통 중국산이 넘쳐나고 있다. 기마민족과 농경민족으로 일본과 중국을 비교했고, 평화주의를 내걸고 있는 <중국인의 실체>에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여럿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주의해야 할 것은 중국의 울타리에 한민족을 껴안고 있다는 것이다. 중일 전쟁 이후, 다시 우리와는 무관한 전쟁을 벌였던 한국전쟁, 중국인들은 한국전쟁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그리고 왜 동북공정에 열을 올리며 고대 한민족의 역사를 파괴하고 있는지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중국인의 실체>는 기실 중국론이라기보다는 일본론에 가깝다. 일본론보다는 오히려 국제정세를 다룬 경수필이라 할 만하다. 중국의 역사, 현대중국사회의 경제 등 다양한 것을 다루고 있지만, 그 반대편에는 늘 일본이 있다. 우리의 주적은 북한이라는 엉뚱한 발상도 걷어야 할 것이다. 일본만이 한민족을 침탈한 것은 아니다. <중국인의 실체>는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의 한민족의 입지를 다시 생각해보는 좋은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여전히 사대주의를 선호하는 기득권과 일반인들이 어떻게 다른 행동을 보일지, 동경하면서 경멸하는 양가감정은 하늘이 어느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내린 선물인 것만 같다. '미래는 중국의 것이다.'로 끝마치는 <중국인의 실체>. 다시 패권주의로 꿈틀대는 중국의 미래상을 보는 듯, 착각을 하게 된다. 착각이기를 바라지만, 오로지 변방 소수민족의 바람일 뿐이다.

 

     세계적으로 장기 불황의 조짐과 한치도 예측할 수 없는 변화의 세기를 맞고 있다. 어려운 경제 상황에서도 중국만이 잘나가는 것처럼 알려져 부러움을 사는 이면에는 일찍이 젊어보지 못한 늙은 대국, 중국이 비로소 고목나무에 싹이 나는 것처럼 회생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는 것이다.

(554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