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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걸인 사무엘 - 세상을 바라보는 눈과 지혜에 관한 우화
브누와 쌩 지롱 지음, 이지연 옮김 / 은행나무 / 2009년 1월
평점 :
절판
그냥 우화겠지, 생각했다. 어린왕자와 비길 만한 책이라 해서, 그냥 상술인 줄, 그럴 거라 생각했다. 책장을 넘겼다. 배를 가르는 칼이 스쳤다. 창자가 뜯겨 나갔다. 나는 쏟아져 나온 물건들을 쓸어담느라 정신이 없다. 낯설지만, 늘 예상한 일이다. 쏟아져 나온 내장과 내가 먹은 것들, 소화되지 않은 채로 창자에 고인 그것들이 내 눈앞에 쏟아져 악취를 풍긴다. 악취가 난다. 내 배를 가를 칼은 <행복한 걸인 사무엘>이었다. 수치심에 눈물이 흐른다.
읽을수록 나는 움츠러들었다. 이래서 나는 책이 싫다. 특히 내가 원하는 책을 만날 때 나는 더 싫다. 책이 싫다. 나는 준비가 안 된 상태, 그런데 책은 문장 하나하나로 파고든다. 이게 너다, 칼을 들이밀고 하는 소리는
"왜 감당을 못해?"
그 소리에 내 대답은,
"아직 위로를 더 받고 싶어서 그래. 나를 좀 봐. 있는 그대로, 그리고 "
1.
두 개의 이야기가 한 공간에 존재하고 있다. 이미 나는 다양한 심리서적을 읽었다. 그리고 많은 기회를 읽어버렸다. 여러 권 책을 읽고도 여전히 사람에게 휘둘려 휘청도 끊임없으니, 비아냥이야 얼마나 당연한가.
두 개의 이야기 속 그 사람들, 주인공의 이름을 나는 기억 못한다. 기억하고 싶지 않다. 나는 주인공보다 주변인을 더 기억한다. 주인공, 그들의 이름은 아예 내 관심 밖 저 멀리였다. 그렇지만 그들이 찾고 있는 것은, 내가 좇아 가다가 잠시 저린 다릴 주무르고 앉아 있는, 만약 앉아 쉬지 않았다면 더 멀리 갔을 그 거리만큼 후회하는 지금의 상황과 너무 맞아떨어지고 있다. 나는 토끼의 가발(!)을 쓴 거북이다.
2.
철학적 세계관을 <행복한 걸인 사무엘>은 표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가진 세계, 그 세계관을 탄탄하게, 소탈하게 정립시켜주고 있다. 걸인 아니면서 걸인행세를 하는 것은 쉽다. 왜냐, 다시 돌아갈 공간을 이미 확보하고 있기 때문에 안정감이 보장되어 있다. 그런데 걸인들은 그 안정감까지 버렸다. <행복한 걸인 사무엘>은 당당하다. 걸인들이 더 당당하다. 그들은 숨쉬고, 호흡한다. 그들은 숨쉬기에 살아 있다. 책이 아쉬운 이유는 내가 질문을 던지고 싶은데, 그들은 대답 안해서다. 그런데, 두 주인공과 걸인에게 하고 싶은 질문을 내가 가졌고, 내가 너무 하고 싶다면, 그 대답은 내 주변인이 해줄 것이다.
"왜 그렇게 생각해요?"
3.
내게는 좋은 책이었다. 나는 이 책을 놓지 않을 것이다.
4.
도서관을 이용한 사람은 안다. 책을 펼치고 있을 때, 그 책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사람을 바랄 것이다. 그 책 읽는 나를 알아주기를 바랄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그것이 불확실성이다.
5.
<행복한 걸인 사무엘>에서 나는 '나'를 보았다. 갈팡질팡 이럴 줄 알았다면서 다시 고꾸라지는 나를 발견했다. 나는 부자도 아니고 능력도 없다. 그런데 나는 지구력 강한 사람들이 내 주변에 있었다는 것을 무딘 감각을 탓하면서 잊고 있었다. 나는 부자가 아니고, 젊지도 않다. 이제 '도를 믿으십니까' 하며 다가오던 사람들도 내게 가까이 오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안다. '행복'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마침표는 언제라도 찍을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내가 걸인이다. 행복한 걸인이다.
6.
이 책 읽으면 먼저 도서관에 가고 싶어진다. 그리고 누군가를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설렌다. 이미 내가 만난 그들이라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를 남발하고 싶어서 속이 간지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