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한 연구 - 상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11
박상륭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2004년 7월 27일 읽고 쓰다

 

옴마니밧메훔(Hail to the jewel in the lotus! hum)

나는 언제부터인지 너무 많은 자유와는 살 수 없이 된 것이었다. 그 자유를 나는 어떻게 운용할 지를 모르게 되어버린 것이었다. 나는 결국, 고빠와 재갈을 택해 버린 것이었다. ..고삐와 재갈에 의해서라야만 나는, 고삐와 재갈을 끊어버리고 뛰쳐나간, 힘센 황소, 고아분스러이 달리는 들말의 꿈을 꿀 수 있게 된 것이다. 내가 네 발로 돌아온 형장은 그래서 드디어 그것의 의미를 획득하기 시작했다. 나는 내가 슬펐다. (119p)

유리는 죽어버린 것이다. 내게서 떠나버린 것이다. 나는 그것을 묻어주어 버렸으며, 그런 뒤 우리 사이에는 단절이 와버린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이 순간에 이르러 내가 명상해야 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나를 어떤 방향으로라도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그것 뿐인 듯하기는 하다. 죽는다더라도, 살기가 싫기 때문에 죽어서는 안된다는 것을......현재로서 그러나 나는 내가 살고 싶은지 어떤 지를 모르듯이, 죽고 싶은 지 어떤 지도 모르고만 있을 뿐이다. 아마도 나는 피곤한 것이다. (491p)

죽음과 재생이라는 인간 존재의 궁극의 신비에 대한 정신적 탐색을 불교와 기독교의 종교적 담화, 그리고 연금술의 감화를 토대로 삼아 소설적 논리로 구성하고 있는 작품 (문학평론가 김명수曰)

----------------------------------------------------------
읽기는 처음으로 도전했던 것은 햇살 좋은 봄이었고, 채 몇 십페이지도 넘기지 못하고 포기하고 있다가, 한국을 떠나기에 앞서 우리말을 잘 쓰는 작가라고 칭송받는 이 사람의 글에 다시 한 번 재도전 해보고 싶었다.
한 문장이 열 줄이 넘을정도로 길고, 중간중간 어찌나 쉼표는 많아서 헷갈리는지. 게다가 수많은 한자와 모르는 단어. 국어인데도 국어가 아닌듯한. 계속 국어사전을 옆에 끼고 읽었다.
잔인함과 광폭함이 그것이 아닌듯이 가려졌고, 야함이 야함으로 나타나지도 아니하였으며, 그러나, 처참했다.
나는 줄곧, 그런 기분이었다.

내가 요즘 [파,연]의 박신양을 좋아해서 그 사람 프로필을 살펴보다가 데뷔작이 [유리]라는 걸 봤는데, 내용을 살펴보니 이 [죽음의 한 연구]를 영화화한 것같았다. 이런 1인칭 주인공시점(맞나?)같은 소설을, 게다가 이토록 난해한 소설을-중간에 주인공이 읍내 장로의 집에서 강연하는 내용은 정말 모르겠다. 타원형까지는 이해했는데 기독교와 불교의 맞물림과 그 도면은 정말....-어떻게 영상으로 옮기려 했는지..영화는 평론가들의 혹평을 받았다고 한다. 도무지 무슨 내용인지 알 수가 없어서. 어쨌든, 시간나면 꼭 볼거다.

죽음에 대한 인간의 인식을 다룬, 소설이라고 하는데 솔직히 그렇게 무엇을 무엇이다라고 판단할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 어려운 소설이었었다. 음미는 둘째치더라도, 읽는 것 자체가 우리말인데 이해하는 게 참 힘이 들었다.

솔직히는 잘 모르겠다. 주인공 스님이 그런 구도적인 살인을 한 것과 유리의 수도부를 사랑한 것과(?) 촛불스님과 읍내의 장로와 장로의 손녀딸.
아..어렵다.

이러면서도 박상륭의 또다른 책을 또 골랐다...에휴
그래도 분명, 매력적이기는 하다는 사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 구본형의 변화 이야기 - 10년마다 자신의 삶을 결산하는 자아경영 프로젝트
구본형 지음 / 휴머니스트 / 200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2004년 7월 5일 읽고 쓰다

 

제목이 길기도 하다.
좋아하는 변화경영 전문가 구본형님의 신간(?).

하지만, 예전에 읽었던 [사자같이 젊은 놈들]이 더 좋았음.

모,,,책의 모든 부분이 마음에 들기를 바라는 건 무리겠지.
부분부분에서 느껴지는 무언가가 있다면,
그건 작가에게도, 독자에게도 감동이 될려나?
약간 지루한 감에 없진 않았지만,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들게하는 책이다.
특히, 니체에 대해 쉽게 설명해 준 짤막한 글이 제일 인상적.

하지만, 이제 50대에 들어서는 길목에서 이렇게
10년마다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책을 낸다는 것.
사람들이 흔히 생각할 수 있는 일도 아닐 뿐더러
그걸 직접 실천에 옮긴 이 사람, 너무 멋져 보인다.

'아직 밟아보지 못한 1천 개의 작은 길이 있다.
1천개의 숨겨진 삶의 섬들이 있다.'

'삶의 방식을 바꾸기 전에는 병이 낫지 않는다.'
-니체

'진정으로 사랑했던 마음은 결코 그 사랑을 잊지 않는다.'
-토마스 무어
(이 문구 읽고 울뻔 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허삼관 매혈기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푸른숲 / 200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2004년 5월 23일 읽고 쓰다

 

우습고도 부끄럽지만 나는 이 '허삼관매혈기'라는 소설이
우리나라의 고전소설인 줄만 알았다..
허허참..
어렴풋이 누군가가 하는 이야기를 들어서일까?
가난한 하층민이 자기 피를 팔아서
자식들을 먹여살리는 이 서글픈 이야기가
조선 후기의 소설일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했었다.

허삼관이라는 사람이 우연히 피를 팔아서 돈을 버는 사람들을 만나
그들과 함께 피를 팔고, 그걸로 아내를 얻고 살다가
힘든 일이 있을때마다 피를 판 돈으로 사는 이야기.
그 중간중간 인민공사 문제나 문화대혁명같은 시대의 격동기에서
끈질기게 살아남고, 또 그 와중에 자식들에게 고기 한점을 먹이고파서
혹은 자식이 병에 걸려 큰 돈이 필요할 때
피를 팔아서 그 문제들을 해결한다.

그와 처음에 피를 같이 팔던 사람들은 다 죽고
그는 자식들이 다 성장해서 노인이 되었을때
우연히 고기가 먹고파서 피를 팔러가지만, 병원에서는 그가
노인이라며 피를 사주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운다. 그 자신이 쓸모가 없어진 것같아서.
길거리에서 우는 그를 잡고 그의 아내와 자식들은 가게로 들어가
고기를 사주고, 그는 생애 처음으로 가장 맛있는 고기를 포식한다.

이 소설은 연극으로도 개작됐었다. 보러갈 걸 그랬다.
어쩌면 비극적이라고 느껴지는 이 인물의 희극적인 끝맺음.
이 아이러니 앞에서 웃지도 울을 수도 없는 상황이다.

단순한 전래동화(?)같은 이야기 속에
참 굵은 뼈가 숨어 있는 소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랑비 속의 외침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푸른숲 / 2004년 1월
평점 :
절판


2004년 5월 23일 읽고 쓰다

 

중국어를 공부했음에도 난,
중국 문학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편이다.
지난번 [사람아...] 이후에 두번째로 접하는 중국 소설.

우연히 신간소설 코너에 꽂혀있어서 집어들었다.
피곤한 오후길에 읽었음.

자전적 소설의 형식을 띤 이 책은
은근하게 사람을 끌여들인다.

그리 슬프지도 애처롭지도 않은 조용한 어조로
서글픈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음.

그래서 더 애틋한 마음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정말, 가랑비 속의 외침이었다.
문득 비 속에 파묻힌 그 소리가 어렴풋이 들리면
나는 뒤를 돌아보겠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공지영 지음 / 문예마당 / 1993년 2월
평점 :
절판


2004년 5월 18이 읽고 쓰다

 

유명한 소설인데 공지영이 쓴 건지는 몰랐었다.
"공지영" 이름이 주는 동글동글하고 부드러운 이미지탓일까?
나는 그녀의 책을 읽어본 적이없다. 아마 처음 손에 접한 책은
[수도원기행]이었던 듯한데 몇 장 읽다 말았던 듯.

예전 생각이 났다.
내가 중국에 어학연수를 가는 문제로 그 사람과 다툴때,
내가 하고 싶었지만 생각으로 정리되어 나오지 않던 수많은 말들.
그 말이 생각이 나서 울고 싶어졌다.

나의 결정이었다는 것.
둘의 문제였지만, 이해시킬 수 없는 나의 문제로만 귀결되었다는 것.
결국 깨졌고 어정쩡한 상태로 만남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
좋은 친구(really?)에는 분명하지만
의견의 폭은 좁힐 수가 없다.

이 땅에서 여자로 살아간다는 것.
물론 여자라서 얻는 혜택들로 무시하진 못하겠지만
오랜 역사가 뿌리깊게 정신에 심어놓은 여성성의 이미지는
그냥 쉽게 지나칠 수 없다.

늘 부담을 안고 산다.
착한 딸, 좋은 아내, 좋은 엄마, 그리고 능력있는 직장인.
접합점을 찾는 좋은 방법은 남편의 이해와 도움이겠지?

근데 솔직히 왠 이해(理解)?
서로 똑같이 사회생활하는 데 엄마라는, 아내라는 이유로
그게 죄스러워야 할 필요가 있나?
아이를 내가 잘 돌보지 못한다는 것이 나만의 문제는 아닐텐데.

고로, 내가 내 일을 찾아 열심히 사는 건 옳다고 본다.
다시, 두 달후면 또 떠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