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해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0
쥘리앵 그린 지음, 김종우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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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4. 하루에도 수백 번씩 짜증스러운 신비로 가득 찬 여러가지 삶이 우리의 인생과 나란히 나아간다. 그러면서도 삶은 우리에게 그 신비 중에서 어떤 것도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니 수수께끼와 비밀이 가득한 자기 자신의 운명에 집착하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불안감을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늦은 밤. 정체모를 남녀가 크게 다투는 소리가 들린다. 경찰을 부르지 않으면 정말 큰일이 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이 장면을 목격한 사람은 필리프. 그가 유일했다.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이 필리프의 몸과 마음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필리프는 신비로운 내일에 온 정신을 쏟는 것 만으로도 삶이 벅차다머 그들을 지나친다. 그는 14페이지의 문장으로 자신의 비겁함을 정당화한다.  


위험에 빠진 여자를 못 본 체 하고 지나간 이 사건은 필리프라는 인간의 내면에 미세한 균열을 만들어낸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것은 회복력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이 미세한 균열은 자신의 삶에서 생겨난 무수히 많은 잘못된 선택과 연결되어 점점 규모가 커지기 시작한다. 그렇게 필리프라는 인간은 한없이 쪼그라든다. 필리프는 자신을 무능한 인간으로 판결내렸다. 


2.


필리프는 앙리에트와 결혼을 했지만, 처형인 엘리안과 한 집에서 살고 있다. 엘리안은 필리프에게 욕망을 느끼고 있으며, 아내인 앙리에트는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인 티스랑과 관계를 맺고 있다. 이런 관계로만 보면 필요 이상으로 자극적인 설정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 모든 원인이 무엇일까? 라는 물음에 접근하면 필리프의 균열을 재차 발견할 수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등장인물 전체의 균열들이라고 할 수 있다. 열등감을 채우기 위한 상대. 이들이 타인을 탐하는 이유는 단지 그 이유밖에 없었다. 


필리프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물려받은 유산이 상당할 뿐만 아니라 대대로 내려오는 회사까지 있는 큰 부자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필리프라는 사람 자체가 인간적인 매력이 없으며, 그렇다고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능력치가 뛰어나지도 않었다. 이것은 필리프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고 인정하며 고백하는 내용이다. 그래서 지금 일어나는 이 비정상적인 가정파탄에 대해서 어렴풋하게 알고 있지만, 어떻게 손을 쓸 방법을 찾지 못했다, 자기 확신이 없기 때문에 말이다. 


3. 


<잔해>의 주인공들은 통속적인 패러다임에 자연스레 녹아있다. 필리프는 어리고 아름다운 여성과 결혼하여 자신에게 없는 인간적인 매력을 채웠다. 앙리에트는 돈많은 남성과의 결혼을 통하여 빈곤한 삶에서 탈출한다. 


현재 시점의 필리프는 법적으로는 부부사이라고는 해도, 둘 사이에 애정은 사라진지 오래되었다. 그렇게 혼자 남겨졌다. 현재 시점의 앙리에트는 안락한 삶을 살게 되자 매력적이지만 가난한 남자 티스랑과 얽히게 된다. 과거의 엘리안은 앙리에트보다 아름답지 못하다는 열등감에 필리프를 앙리에트와 이어주고, 그 대신 먹고 살만큼의 안락한 삶을 제공받았다. 그러나 현재의 엘리안은 앙리에트로부터 버려진 필리프를 차지하여 지금까지 보상받지 못했던 모든 것. 자신의 가치를 새롭게 보상받으려 한다. 


4. 


쥘리양 그린은 <잔해>를 통해 이렇게 얽혀있는 주요 인물의 심리를 천천히 써내려간다. 한밤중의 아주 우연한 사건. 면밀히 따지고 보면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그 사건.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필리프 가정에 잠재되어 있는 복합적인 갈등을 하나씩 들쑤시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등장인물은 물론 책을 읽는 독자들까지 모두가 불편해진다. 알고는 있지만 쉽게 털어놓지 못했던 좌절감은 나비효과처럼 몰아친다.  인간은 이토록 나약한가?라는 물음에 다시금 접근한다.


5.


물론, 가톨릭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라는 수식어처럼 이 소설에는 초월적인 존재가 등장한다. 그 인물은 다름 아닌 필리프의 아들 로베르다. <잔해>의 초반부. 그러니까 자존감이 극도로 하락한 필리프에게 있어서 로베르는 굉장히 이질적인 존재였고 마주치기 싫은 존재였다. 하지만, 로베르와 친밀하게 지내기 시작하는 부분부터 필리프는 로베르를 보면서 과거의 자기 모습을 오버랩하게 된다. 그러니까 좌절감을 맛보지 않은 필리프의 과거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로베르. 이것은 삶의 새로운 가능성을 의미한다. 


300. 어떤 인간 존재가 마침내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이 아이도 자기처럼 겁을 먹은 것이다. 어둠 속에서 입을 열어 소리 없이 길게 웃었다. 그는 안개가 허파 속까지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 아들의 어깨를 잡은 그의 손에 더 힘이 들어갔다. 이토록 커다란 기쁨과 갑작스러운 위안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몇 마디 말만으로도 자신이 더 이상 혼자다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데 충분하단 말인가? 갑자기 어마어마한 삶의 욕망이, 마치 강과도 같은 욕망이, 그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거역할 수 없는 어떤 것이 가슴을 가득 채웠다. 


<잔해>는 노련한 소설이다. 일말의 가능성이 생겼다고 모든 것이 손바닥 뒤집듯 뒤집어지지 않았다. 이 부분은 매우 현실적이라고 느꼈다. 현실에 대한 냉철한 판단과 자신의 능력을 과신했던 오만했던 기억들이 필리프의 내면을 통해 흘러나온다. 그렇게 희망과 좌절은 영원히 전투를 계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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