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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과 열정사이 - Rosso ㅣ 냉정과 열정 사이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1.
5. 아가타 쥰세이는 나의 모든 것이었다. 그 눈동자도, 그 목소리도, 불현듯 고독의 그림자가 어리는 그 웃음진 얼굴도. 만약 어딘가에서 쥰세이가 죽는다면, 나는 아마 알 수 있으리라. 아무리 먼 곳이라도. 두 번 다시 만나는 일이 없어도...
소설이 시작되기도 전. 페이지 한 면을 가득 채운 이 문장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참고로 츠지 히토나리가 쓴 Blu 버전의 첫 문장은 이와 같다.
Blu 5. 사람이란 살아온 날들의 모든 것을 기억할 수는 없지만, 소중한 것은 절대로 잊지 않는다고, 난 믿고 있다. 아오이가 그 날밤의 일을 완전히 잊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다시는 그녀를 만날 수 없을지 모른다 해도...
결론이 무엇이냐면. 이 소설은 아오이는 쥰세이와 떨어져 있긴 하지만. 도저히 불가능함을. 어떤 무엇으로도 떨어질 수 없음을 이야기한다. 내가 본 에로스 중에서도 가장 절대적이고 맹목적인 에로스가 <냉정과 열정사이>에 담겨있다. 마치, 두 사람의 결합이 신이 설계한 하나의 약속으로도 느껴진다. 거기서 우러나는 감정들. 한 남자. 한 여자를 서로 얼마만큼 사랑하느냐에 담긴 숭고한 정신을 나는 존경한다. 마빈에게는 정말 미안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렇다.
2.
미안한 만큼 아쉬움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아오이와 준셰이 간의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전제를 마련해두고, 이 두 사람을 맺어주기로 약속했다면. 마빈이나 메미를 누군가의 빈자리를 대신하기 위해 억지로 채워놓은 희생자. 사랑의 실패자로 만들기보다는 누군가를 순수하게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마빈와 메미의 고민과 매력을 솔직하게 다뤄줬으면 좋지 않았을까 싶은 아쉬움이 생긴다. 이 두 작가는 그럴 능력이 있는 작가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것을 가능하게 하려면 일인칭 시점의 서사를 파괴해야 했을 것이라는 점에서의 불가피함은 인정한다.
3.
3. 마빈은 사람의 마음속까지 파헤치고 들어오거나 모든 것을 알려 들지 않는다. 혼자서 점점 상처받아 흥분한 두더지처럼 몸을 사리지도 않는다. 이 세상이 다 끝난 것처럼 슬픈 얼굴로 내게 말없는 비난을 하지도 않는다. / 비는 내게 도쿄를 생각나게 한다.
마빈은 불쌍하다. 비는 내게 도쿄를 생각나게 한다는 문장은 여태껏 읽은 문장 가운데서도 손꼽을 정도로 잔인한 문장이다. 이것은 blu에서 메미와의 관계 중에 아오이를 외친 준셰이의 경우처럼 화가 치미는 상황이지만, 이 문장에 숨겨진 은밀함은 그것을 훨씬 넘어선다. 게다가 이 문장을 기어코 마지막에 붙여둔 이유는 다분히 고의적이다. 독백이라는 점에서 아오이와 독자만 알고, 마빈만은 절대로 모른다. 아오이는 마빈을 따돌린 채, 이렇게 은밀한 방식으로 쥰세이의 기억과 함께하고 있음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이런 상황에서 아오이로서는 마빈이 이렇게 적당히 머물러주는 걸로 충분했을 것이다. 50 페이지의 '소유는 가장 악질적인 속박인걸요.' 이 말은 더는 당신과의 거리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미이며, 마빈을 향해 건네는 일종의 짧은 경고로 생각할 수도 있다.
44. 나는 이 사람의 어디를 좋아하는 것일까. / 올바른 것. 물론 그렇다. 마빈은 공정하고 명석하다. / 허벅지. 이건 절대적이다. 마빈의 허벅지는 정말 아름답다. / 기지. / 관대함. / 차분한 말투. / 그리고... / (...) 그렇게 땀이 돋은 마빈의 이마를 만지면서, 하나라도 더 많이 생각해 내려 했다. 하나라도 더 많이 세어, 무엇인가를 정당화하려는 것이리라.
엄밀하게 말해서 아오이는 혼자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혼자서 4년을 잘 보냈으니. 그런 와중에 마빈이 아오이를 향해 다가왔고, 아오이는 그저 거절하지 않았을 뿐이다. ' 어쩌면 이것도 괜찮겠지' 이런 생각으로 작품 내내 아오이는 마빈을 사랑하고 있노라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그녀의 말대로 무엇인가를 정당화하려는 몸짓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51. '조용한 생활. 온화하고, 부족함도 과함도 없는, 아주 순조롭게 흘러가는 나날'은 아오이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안정적인 날이고, 이 나날들을 무려 4년이나 지속했다는 사실은 누군가로서는 매우 고통스러운 나날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래서 마빈이 불쌍하다고 느껴졌다. 마빈이 아오이를 사랑한 것은 조용하고 온화하고 부족함도 과함도 없는 순조로운 나날을 보내기 위해서가 아니었을 테니 말이다.
4.
184. 나의 들판 (La mia campagna). / 과거 그렇게 부르며 사랑한 남자가 있었다. 들판처럼 넉넉하고 환한 표정으로 웃는 사람이었다. 들판처럼 섬세하고, 그러면서 마음 어딘가에 야만적인 것을 품고 있는 사람이었다.
당신의 반쪽. 나의 들판을 떠올리는 순간 그녀는 걷잡을 수 없이 쥰세이의 기억 속으로 빠져든다. 이미 예정된 일이라는 듯이. 아오이의 감성은 폭발적으로 터져 나온다. 이제 마빈과 함께한 시간은 사라져버렸고, 이 책을 읽고 있는 우리도 역시 사라져버렸다. 아오이의 의식 안에는 쥰세이밖에 보이지 않았다.
194. 아주 조금 주저하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불렀다. 그 목소리의 온도를 좋아했다. / 쥰세이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지금 당장 듣고 싶었다. 세월 따위 아무 소용없었다. / 지금이라면 좀 더 제대로 말할 수 있을까. 그건 네 잘못이 아니라고. 무서웠다고. 나도 너무 어렸다고. 당신을 잃고 싶지 않았다고. 외로웠다고. 도쿄는 밀라노의 일본인 학교 속 일본과는 전혀 달랐다고. 외톨이였다고. 오직 쥰세이만이 그런 나를 알아주었다고. 한시도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았다고. 사실 내내 붙어 다녔고, 오누이처럼 어디든 함께였고, 모든 일이 즐거웠다고. 행복했다고. 그리고, 그런 식으로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고.
잠깐 쥰세이의 시점(blu)으로 돌아와서 이야기를 해보자면. 쥰셰이가 아오이를 그리워하는 것은 그럴듯한 논리적 체계가 있었다. 쥰세이는 과거를 회복하여 미래와 이어주는 복원사라는 직업에 매력을 느끼도록 그런 천성을 지니고 태어났기 때문에 그의 가장 아름다웠던 과거를 공유했던 아오이와의 재회를 통해 그의 인생을 복원하려는 의지 역시 논리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203. 나는 돌아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른다. 돌아갈 장소. 줄곧 그런 장소를 찾고 있는 듯한 기분도 들지만, 한 번도 없었다. / 쥰세이가 보고 싶었다. / 기묘한 열정으로, 그냥 그렇게 생각한다. 만났다고 해서 뭐가 어떻게 되지 않는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다만 쥰세이와 얘기하고 싶었다. 내 말이 통하는 사람은 쥰세이밖에 없었다.
211. 나는 생각한다. 나는 누구의 가슴속에 있는 것일까. 그리고 내 가슴속에는 누가 있는 것일까. 누가, 있는 걸일까. / 쥰세이가 보고 싶다, 고 생각했다. 쥰세이를 만나 얘기하고 싶다. 다만 그뿐이었다.
233. 쥰세이와 얘기를 하고 싶다. 이런 식으로 살아왔다는 것을, 쥰세이는 이해해 줄 것이다. 설명하지 않아도. 단순하게. 그러리란 확신이 있었다. 과거에 그랬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데, 이 문장을 읽어보면 아오이가 쥰세이를 원하는 이유가 본능적인 끌림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자유와 예속의 선언과도 다를 바 없는 그녀의 진심. 더하지도 빼지도 않은 이 순수한 문장이 매우 아름답게 느껴진다. 물론, 아이러니하게도 마빈을 기억에서 지워버려야 가능하다. 이제 책을 읽는 우리들도 선택해야 순간이 왔다. 이 선택은 아오이의 거친 열정으로 강요된다. 마빈이 계속 눈에 밟히면 이 소설이 마냥 아름다운 소설이 될 수 없다. 하지만 마빈을 떠나보내면 이 소설은 완전히 아름다운 소설이 된다.
5.
237. 내 안에, 이만한 의지가 있었다니, 놀랍다. / 아무런 주저도 없었다. 그 때 이미 마음이 정해져 있었다. 알베르토의 공방에서, 아침 햇살 속에서, 나는 그저 인정하기만 하면 되었다. 피렌체에 간다는 것을. 두오모에 오른다는 것을. 쥰세이와 나눈 약속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는 것을
5페이지의 복선이 드디어 현실로 이뤄지는 순간이다. 그녀는 쥰세이와의 장밋빛 미래를 꿈꾸며 정상에 올랐다. 그리고 약속대로 두 사람은 만났다. 그 순간의 묘사. 에쿠니 가오리 작가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기대했던 대로 아름다운 문장으로 우리 앞에 나타났다. 이토록 열정적인 독백을 이제껏 읽어본 적이 없다. 시대를 초월한 작가들의 명문장을 읽으면서 요즘 들어 '신'은 어디 멀리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신'은 가까이에 있다. 아오이가 쥰세이를 바라보는 것 또한 인간이 신을 바라보고 이야기하는 듯하다.
248. 비현실감. / 그건 말 그대로 비현실감이었다. 빛 속에서, 믿을 수 없을 만큼 행복하고, 하지만 그것이 환상이 빚어 내는 빛의 숭고함이란 것을 우리는 둘 다 알고 있었고, 알면서도 고집스럽게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환상이 빚어 내는 빛. 그것은 일몰 같은 숭고함으로, 우리의 온몸을 구석구석 채웠다. / 아가타 쥰세이 / 나는 눈앞에 있는 남자를, 완벽한 신뢰감으로 바라보았다. 그 풍요롭고 부드러운 검은 머리칼과, 놀람과 기쁨에 일일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눈동자, 때로 겸연쩍게 미소 짓는 엷은 색 입술, 곱상하게 자랐음을 드러내는 목덜미./ 알고 있다. 과거 나는 그 하나하나를 사랑하였고, 지금도 여전히, 이렇게 사랑하고 있다.
<열정과 냉정사이 Rosso>는 두 사람이 정확이 50 : 50의 관계로 만나지만, 하나로 합쳐지지 않는다. 쥰세이를 사랑하는 마음과 그것을 표현하는 것에는 적극적이었지만, 쥰세이를 완전히 잡아채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쥰세이는 자신보다 더 크게 느껴질만큼 소중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오이로서는 차마 쥰세이를 자신의 의지대로 붙들어둘 수 없었던 것이다. 그저 쥰세이가 그녀를 붙잡아주길 바라고 기다릴 수밖에 없는 한없이 사랑에 약한 존재였고, 쥰세이로부터 아무런 말이 없었으니 아오이로서는 또다시 버려졌다는 생각이 들 수 있겠다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