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정과 열정사이 - Blu 냉정과 열정 사이
쓰지 히토나리 지음, 양억관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1.


230. 하늘은 늘 변한다. 구름은 늘 자유롭게 모습을 바꾸어 간다. 하늘을 올려다본다는 것은 마음을 바라보는 것과 비슷하다. 그래서 나는 하늘을 그릴 때면 마음이 조용히 가라앉았다. 여러 가지 하늘이 있듯이, 여러 가지 인간이 있다. (...) 낮은 하늘, 높은 하늘 / 넓은 하늘, 좁은 하늘 / 파란 하늘, 시커먼 하늘 / 맑은 하늘, 뿌연 하늘. 어느 하늘도 하늘임에는 변함이 없다. 그것이 머리 위에 있으므로 나는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냉정과 열정사이>의 나. 쥰세이는 여러 가지 하늘이 있듯이, 인간도 여러 가지 성격의 인간이 있음을 털어놓으며, 다양성에 대한 이해를 우리에게 구하고 있다.


204. 나는 아직도 8년 전의 과거를 질질 끌며 살아가고 있다. 인류는 미래에서 희망을 보려 하는 동물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다. 복원사는 직업상 과거를 소중히 간직하며 살아가는 동물인 것이다. 

206. 과거밖에 없는 인생도 있다. 잊을 수 없는 시간만을 소중히 간직한 채 살아가는 것이 서글픈 일이라고만은 생각지 않는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과거를 뒤쫓는 인생이라고 쓸데없는 인생은 아니다. 다들 미래만을 소리 높여 외치지만, 나는 과거를 그냥 물처럼 흘려보낼 수 없다.

이러한 인간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쥰세이의 조금은 남다른 성격에 따르면 쥰세이의 사랑은 틀린 사랑이 아니라 다른 사랑일 뿐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깨달음과 자기 자신의 선택을 정당화하는 그의 독백은 끝내 메미의 자리를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다른 인간이라서 어쩔 수 없다는 일방적인 선고. 이로 인한 메미의 절규와 상실은 쥰세이에게. 그리고 <냉정과 열정사이>라는 소설 자체로서도 매우 아픈 손가락일 것이다.  


167. 나는 나야, 누구도 대신할 수 없어. 절대로 그런 존재가 되고 싶지 않아. (...) 동정받고 싶지 않아. 여자에게 동정만큼 잔혹한 건 없단 말이야. (...) 나는 아오이가 없는 공간을 메워 주려고 쥰세이를 사랑한 게 아냐. 쥰세이가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난 이렇게 살 수 없어. 더 이상 모욕당하기 싫단 말이야.   


2.


쥰세이의 미술 복원사로서의 천성과 재능. 그리고 그의 손에 의하여 작품이 복원되는 과정에서 느끼는 황홀함(186~187)은 사물을 넘어서 인간의 관계에 있어서도 완벽한 복원이 가능하다는 희망으로 바뀐다. 이 희망은 불가능을 받아들일 수 없도록 하는 열정과도 같았다. 과거로의 복원으로 미래를 이어가기를 희망하는 쥰세이의 열정은 할아버지(130. 네게 그림을 권하는 것은, 네가 미래를 똑바로 쳐다보기를 바라서란다.), 인수(223. 인생은 한 번뿐이지만, 몇 번이라도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살아갈 수 있다.), 다카시(155. 이제 흘러간 과거일 뿐이야.)  조언에도 불구하고, 그의 결심을 멈추게 할 수 없었다. 쥰세이는 그들의 충고에 이렇게 답했다. (131. 미안해 (...) 그렇지만 난 결국 복원사로 살아갈 것 같아. 과거를 미래로 이어 주는 일에 자부심을 느껴. 나 같은 사람도 중요하니까. 223. 응, 하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3.
쥰세이와 아오이는 8년의 시간을 건너서 결국, 피렌체의 두오모에서 만나게 되었다. 커다란 아픔을 맞이하기 전에 스쳐가며 했던 기억을 두 사람이 모두 기억했다는 사실은 쥰세이의 열정에 불을 지피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만남은 과거의 연속이 아니었다. 미묘하게 차이가 있었다. 마치 밀란 쿤데라가 '향수'에서 이야기했던 괴리감을 상기시키는 이 문장들.


244. 아오이는 아오이가 아니었다. 245. 1초라도 빨리, 현재를 과거로 물들이고 싶었다. (...) 고작 사흘로, 우리는 8년의 공백을 복원시킬 수 없었다. 두 사람은 같은 그림을 바라보면서도 제각기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을 따름이다. 어느 쪽에도 그림을 복원시킬 만한 열정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움만 간직한 냉정한 동창회와도 같았다,

246. 우리는 8년이란 시간을 한꺼번에 토해냈다. 그러나 그것은 상대에게 전하려는 이야기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그 8년을 납득시키기 위한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 눈앞에 있는 아오이가 8년 전의 아오이와는 다른 사람임을 깨닫는 데 고작 사흘밖에 걸리지 않았다.

249. 열정이 냉정에 떠밀려 가는 것 같았다.

252. 결국 냉정이 이겼다.

 

결국 냉정이 이겼다. 이것으로 쥰세이는 항복을 선언한 것일까? 아오이를 만난 후, 시간의 차이가 빚어내는 두 사람 사이의 이질감과 괴리감. 그리고 허무함을 피부로 느끼면서도 쥰세이는 포기하지 않는다. 이 모든 낯선 감정을 한꺼번에 날려버리고 싶은 마음에 '새로운 백년'으로의 도전이라고 이름 붙인. 쥰세이로서는 매우 도전적인 행동을 예고한다. 이것은 직업병으로서의 복원과정을 의미하는 행동이다.

그의 오기는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어머니의 부재가 낳은. 과거의 그리움을 갈구하는 태생적인 성향과 이 성향이 이끌어온 복원사로서의 직업적인 재능으로 형성되었다. 그렇게 쥰세이는 그를 떠나려는 아오이를 향해 다시 다가간다. 나의 광장을 향하여. 

 

178. 나의 광장. (...) 세상에 녹아들지 못하고 혼자 떠돌며 살아가던 내게 있어 그녀는, 막다른 골목길에서 갑자기 나타난 도시의 광장처럼 시원스런 존재. (...) 그녀의 품에 안겨 있을 때, 나는 자신이 고독하지 않고, 행복한 존재라 생각할 수 있었다. (...) 대학 생활에서 겨우 마음을 쉴 수 있는 광장을 발견했을 때, 나는 그것이 사랑이란 걸 깨달았다. 그래서 온 힘을 기울여 그녀를 사랑하고, 그 때문에 너무 힘이 들어가 사랑이 도를 넘어 버렸다. 서둘지 말라고, 늘 냉정한 그 사람의 말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사랑했다.


이제 Rosso를 읽을 차례다 아오이의 내면은 어떤 하늘의 모양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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