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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람스를 좋아하세요...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9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평점 :
1.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서 우리는 시몽의 저돌적인 사랑고백과 그것을 받아준 폴의 불꽃같은 한달가량의 시간을 읽을 수는 있다. 하지만, 폴과 로제의 오년간의 부대낌. 64. 기쁨과 회의와 온정과 고통으로 뒤범벅된 그 오년을 읽을 수는 없었다. 근데 이 소설의 아이러니는 우리가 읽어낼 수 없는 폴과 로제의 오년이 이 소설의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점이었다.
139. 어쩌면 자신이 그들의 사랑을 위해 육 년 전부터 기울여 온 노력, 그 고통스러운 끊임없는 노력이 행복보다 더 소중해졌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을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옸고, 바로 그 자존심이 그녀 안에서 시련을 양식으로 삼아,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로제를 자신의 주인으로 선택하고 인정하기에 이르렀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로제는 그녀에게서 언제나 빠져나갔다. 이 애매한 싸움이야말로 그녀의 존재 이유였다.
사막여우가 어린왕자에게 말한 것과 같은 의미로서, 폴이 로제에게 길들여지기에 오년이라는 시간은 충분한 시간이었다. 139페이지의 방식이 폴이 로제와 세상에 길들여져 머무르는 방식이다. 이것과 180도로 달랐던 시몽과의 한달가량의 연애는 비록 그녀를 잠시나마 행복하게 하긴했지만, 행복보다는 갑작스러웠고, 불편했다는 감정이 더 크게 그녀를 괴롭혔다.
131. 모든 것이 망가지고 말았다. 드레스는 그녀의 나이에 어울리지 않았고, 시몽의 외모는 너무 눈에 띄었으며, 그녀의 삶은 지나치게 비상식적이었다.
2.
그녀는 확신없는 미래보다는 현상 유지를 택함으로써 시몽을 밀어낸다. 그것의 의미는 도전이 아닌 체념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녀를 비난할 수는 없다. 어쩌면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는 점이 우리 앞의 진리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104. 언젠가 자신이 저지를지도 모르는 잘못으로부터 미리 그녀를 보호하려는 듯 그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면서 과거의 어리석은 사건들과 그 자신의 비겁함과 두려움과 갑작스러운 관태감과 냐약함에 맞서 그녀를 지키기 위해 보초를 섰다. 그녀를 행복하개 해 주고 그 자신도 행복해지리라.
132. "삶은 여성지 같은 것도 아니고 낡은 경험 더미도 아니야. 당신은 나보다 열 네 해를 더 살았지만, 나는 현재 당신을 사랑하고 있고, 앞으로도 아주 오랫동안 당신을 사랑할 거야. 그뿐이야. 나는 당신이 자신을 천박한 수준, 이를테면 그 심술쟁이 할망구들의 수준으로 비하시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어. 지금 우리의 문제는 로제뿐이야. 다른 건 문제되지 않아."
폴을 영원히 사랑하겠다는 약속과 함께 희망을 노래하는 시몽의 당돌함.
확신에 가득 찬 그의 목소리는 오히려 폴의 거북함과 불편함이 주는 두려움만 한층 더 가중시켰을 뿐이었다.
138. 시몽은 그 자신이 그녀의 주인이라는 느낌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는 자신에게 오히려 손해라는 것도 모르고 무의식적으로 연극적인 동작을 동원해 의존적인 태도를 취했다. 시몽은 그녀에게 보호라도 청하는 것처럼 그녀의 어깨를 베고 잠이 들었고, 이른 아침 일어나 아침 식사를 준비 했으며, 모든 것에 대해 충고를 구했다. 폴은 그런 태도가 감동적이었지만, 왠지 비상식적인 것을 대할 때처럼 거북하고 불편했다.
이 두려움의 정체는 변심에 대한 두려움일 것이다. 앞서 읽은 은희경의 그것처럼 말이다. 과연 시몽은 처음에 다짐했던 마음을 12년이 지난 뒤에도 유지할 수 있을까? 폴은 그것을 확신할 수 없었다.
35. 나하고 살면 인생이 바뀔 것 같아요? 그래. 왜요? 너는 내가 사랑하는 여자니까. 그럼 12년 전에는 사랑하지 않는 여자하고 결혼했던 거예요? 물론 그때는 사랑한다고 생각했으니까 결혼을 했겠지. 당신이 나하고 결혼한다고 해요. 그러면 12년 뒤에 똑같은 말을 하지 않을 것 같아요? 그때 어떤 기힉 오면 당신은 또 이번이 진짜 사랑이고 진짜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면서 나를 떠나겠죠. <은희경 - 명백히 부도덕한 사랑>
3.
35. 마음을 정하고 나니까 그래. 이렇게는 하루도 더 못 살겠어. 내년이면 나도 사십인데 지금 못바꾸면 평생 이렇게 살고 말거야. 네가 내 인생의 마지막 기회라구, 알아? <은희경 - 명백히 부도덕한 사랑>
사강이 폴의 나이를 하필 서른아홉으로 설정한 것에 주목해볼만하다. 은희경의 소설에서는 무언가를 새로 시작해야만 할 것 같은 나이가 서른 아홉이었다. 반면에.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서는 무언가를 시작하고 싶어도 시작하기에는 늦었다는 것을 암시하기 위한 나이로 서른아홉을 정의한다.
폴이 시간이라는 것의 진정한 정체를 피부로 체감하고 있음을 소설의 첫 페이지부터 찾을 수 있었다.
9. 그녀가 이렇게 거울 앞에 앉은 것은 시간을 죽이기 위해서였으나, 정작 깨달은 것은 사랑스러웠던 자신의 모습을 공격해 시나브로 죽여 온 것이 다름 아닌 시간이라는 사실이었다.
4.
이런 복잡한 폴의 내면 속 인과관계를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담아내고 있다. 이로 인하여 시몽의 연애사에 스크래치가 하나 더 생길텐데. 과연 시몽은 폴이 그를 거절한 진짜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까?
139. 자신이 불가피하게 상처 입히지 않을 수 없는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데에서 오는 그녀의 끔찍한 쾌감은 어떤 모습으로 그녀에게 다가올까? "어째서 당신은 나보다 로제를 더 좋아하는 거지? 그 무심한 사내의 무엇이 내가 당신에게 매일 바치는 이 열렬한 사랑보다 낫다는거지?"
일말의 죄책감을 품은 채 뇌리속에 떠도는 폴의 상상. 그것과 같은 형태로서 시몽이 그녀의 선택을 비난하고 다그치게될까? 이후의 결말이 어떻게 되든 간에 그건 큰 영향을 끼치지는 않을 것 같다. 이미 폴의 마음은 닫혀버렸으니 말이다. 소설의 마지막 두 문장은 완벽한 확인사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