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구두당
구병모 지음 / 창비 / 2015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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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읽으면서 '아 큰일 났다. 너무 재미가 없다. 어떡하지.'라고 느낀 책이다. 작품을 읽는 행위에 진입하는 순간, 각 단편의 아주 급격한 차이로 인하여 '마치 허공에서 발버둥 치는 기분 같다. 도대체 어디를 딛고 읽어나가야 하나.' 싶은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그래서 어쩔 수없이 부록으로 읽을 수 있는 무료 e-book을 다운로드 받아 이야기의 뿌리가 되는 작품에 관한 간략한 설명을 듣고 나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빨간구두당>의 빨간색의 함의에 대한 빅브라더의 거부와 은밀한 욕망의 힘겨루기. <개구리 왕자 또는 맹목의 하인리히>의 하인의 눈에 보이는 주인이라는 인간의 미숙함과 불안과 당신에 대한 의심과 질투. <기슭과 노수부>의 멈추게 할 수 없는 반복된 새로운 비극. <카이사르의 순무>의 의심. <헤르메스의 붕대>의 정의감에 가려진 미처 깨닫지 못한 한 인간의 질투와 강탈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강탈. <엘제는 녹아 없어지다>의 맨스플레인. <거위지기가 본 것>의 시점 변형. <화갑소녀전>의 성냥팔이 소녀가 21세기 공장노동자가 되어 증사(집)를 얻기 위해서 일을 하다가 흡사 백혈병처럼 병에 걸려서 불타버린 성냥처럼 소멸하는 모습.  


단편마다 강렬한 이미지 한 컷은 떠오르지만, 그것을 얻기 위해서 간결하지 않은 장문을 넘기는 것은 개인적으로는 버거웠고 지루했다. 재미를 포기하더라도 날카로운 통찰을 얻을 수도 있었다면 다행이었을 텐데... 큰 인상은 받지 못했다. 


2.


이런 장치를 빌리지 않더라도 표현할 방법은 많지 않았을까?


문학동네 1월 달력에 적힌 오에 겐자부로의 한마디가 눈에 밟힌다. 

"이야기를 복잡하게 하지 않으려면 '진실'을 말하는 것이 가장 좋다."


빌려온 세상에서 하나의 알레고리로서 세상과 생각을 동시에 표현하기란 그리 녹록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3. 


<빨간 구두당>의 구병모 작가가 쓴 다른 작품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이 2015년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이라고 한다. 구병모 작가 관련 기사를 읽으면서 문득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과 <빨간 구두당>은 각기 다른 작품이 아닌 연속성의 작품이라는 예감이 생긴다. 아마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을 읽게 된다면 <빨간 구두당>을 다시 읽게 되지 않을까 싶다. 


만족스럽지 않았던 이 책의 후기는 이쯤에서 잠시 접어두기로 하자.  


197. "한 포기의 풀도 한 마리의 동물도 한 명의 사람도, 모두 신이 바느질한 한 벌의 옷과 같아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공기 중의 수많은 조각이 모여 우리라는 존재를 이룬 거예요. 그러면 신이 바늘귀에 실을 꿰었을 때 이미 각자의 본성이 결정되지 않았을까요? 결코 양보할 수도 없고 변할 수도 없는 무언가가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았을까요? 풀을 이루는 조각의 일부를 바꾸어 맹금으로 만들 수 있을까요?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성질을 박탈한다는 것은 그 전까지 자신이 존재하던 방식을 포기하고 지금의 자리에서 다른 자리로 조각이 옮겨 간다는 뜻이에요. 신이 만들어 낸 우리가 그렇게 허술하고 가볍고 유동적인 존재일까요? 신은 우리를 완벽한 존재로 만들지 않았지만 그렇게 변덕스럽고 추한 존재로 만들지도 않았어요. 근본적인 변화가 가능하다고 인정한다면 그건 존재의 무게를 부정하는 셈이 되어 버려요. 인간이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최소한의 존엄을 간과하는 것이죠. 그 순간 우리는 완벽하고 깨끗한 한 벌의 옷이 아니라 누더기가 되어 버려요. 신이 세상을 창조할 때 누더기를 기웠을 리도 없을뿐더러 아가씨는 설마 자신이 누더기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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