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팻 캐바나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난이도 : ★★☆

11(첫 문단). 이제껏 하나인 적이 없었던 두 가지를 하나로 합쳐보라. 그러면 세상은 변한다. 사람들이 그 순간을 미처 깨닫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럼에도 세상은 달라졌기 때문이다.
 
1. 느닷없다고 해야 맞는 표현일 듯 싶다. 이 문단 밑으로 왜 19세기 말 즈음의 최초의 비행과 기구(벌룬)와 관련된 인물이 등장하는지. 그 인물과 예사롭지 않은 첫 문단과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특히, 첫 장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행위의 의도는 드러내지 않아 의미가 불명확하다고 느꼈고, 인물이 살았던 시점을 고의로 나열만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형님은 앞서 읽은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에서도 그랬지만 까칠하다. 그러나 그의 에세이. <깊이의 상실>(이 책은 비상의 죄, 평지에서, 깊이의 상실로 구성되어 있다.)에서 모든 것은 밝혀진다. 

2. 원서의 제목은 <Levels of Life>다. 하지만 재치있는 우리의 번역자 누님께서 앞서 출간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처럼 라임을 주셨다. <틀리지 않는다>의 후속편 <끝나지 않는다>로... 이 번역된 제목 역시 이 책의 핵심을 정말 제대로 파악한 후에 담아낸 글이라는 점에서 이분께서 번역한 책을 앞으로도 관심을 갖고 찾아볼 것 같다.

'삶의 수준들(?)'이라는 원서의 제목을 통해서 비로소 첫 문단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인류가 살아온 '수준'은 과거와 비교했을 때 분명 매우 큰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책은 그러한 '수준들'. 즉, '단계'에 관한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기 때문이다. 

내가 이 책을 통해서 엿본 '수준의 변화'는 편리해진 일상 속에서의 변화가 아니라 아내를 떠나보낸 이가 깨달은 '작별 의식의 시대적 변화'다. 자세하게 말하자면 사별에 직면한 사람들은 어떻게. 즉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떻게 그 슬픔을 극복하는가에 관한 변화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3. 결과적으로 삶은 편해졌겠지만, 슬픔의 극복은 과거보다 어려워졌다. 

4. 인간이 신에게 도전하는 것을 암시하는 제목(비상의 죄)을 통해 반스 형님은 우리가 기계론적 세계관을 받아들인 점에 대한 대가를 지적한다, 자연을 마음대로 사용함으로써 편리하고 풍요로운 삶을 얻는 대신 미신과 종교의 해체가 이루어졌다고 이야기한다.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이 여기에도 존재하는 것이다.  

무신론자가 말하기를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허수아비라고 불평할지라도 과거에는 신이라는 존재를 통해서 위로받고, 치유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세상은 그것이 제거되었다. 고통을 감해주었던 은유는 상실되었고, 우리에게 남아있는 것은 벌거벗은 인간의 몸뚱아리 그 자체가 되었다. 인간이 자발적으로 독립을 선택한 후 맞이한 아이러니한 결과가 아닐 수 없다. 

반스 형님은 이와 같은 낭떠러지에서 대안적 요소를 발견한다. 그것은 인간의 꿈과 기억이다. 

148. 아내가 어떤 식으로든 살아 있는 한, 그녀는 내 기억 속에 살아 있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물론 아내는 다른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도 생생히 살아 있다. 그러나 나는 아내를 기억하는 가장 주된 사람이다. 만약 그녀가 어디엔가 존재한다면, 그녀는 내 안에서 내면화되어 존재한다. 

이런 대안은 기존의 기계적 유물론에 물든 인간은 죽었다 깨어나도 만들 수 없다고 본다. 휴머니즘에 바탕을 두어야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온전히 내면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5.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반스 형님께서는 전작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에서 슬픔을 극복하게 해 줄 도구인 기억의 불완전함에 대해서 이야기한 적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서도 그러한 부분을 다시금 인정한다. 

181 ~182. 우리는 꿈속으로 내려가고, 또 기억 속으로 내려간다. 

 

(중략)

 

'우리'는 씻겨가고 이제 '나'만 남았다. 쌍안경의 기억은 단안경이 되었다. 똑같은 하나의 일화에 관한 두 가지의 불확실한 기억을 삼각측량과 항공 탐사의 과정을 거쳐서 더 확실한, 단일한 기억으로 응집할 가능성은 이제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그 기억은 바야흐로 일인칭 단독 시점하에 변질된다. 그 일화를 사진으로 남긴 것만도 못한 기억이 되고 만다. 

 

높이도, 정확함도, 초점도 잃어버린 이즈음, 우리는 예전처럼 사진을 신뢰해도 되는지 확신할 수 없다. 지금보다 행복했던 시절을 담은 친숙한 옛 스냅 사진들은 예전만큼 각별하지 않고, 인생 자체를 찍은 사진처럼 다가오지 않으며, 그저 사진을 찍은 사진인 것 같은 느낌 뿐이다.

 

(중략)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그토록 뚜렷하고, 그토록 확실하지만, 결국 이런저런 연유로, 지구가 움직이고, 구름이 흩어지고 태양이 각도를 바꾸기 때문에, 그 이미지는 영영 잃어버리게 되고, 오직 기억 속에서만 살아 후일담으로 변해버린다. 

 

변화된 기억. 뭐랄까... 과거가 아름다워진다고 할까... 흔히 우리가 자신이 존경하는 누군가가 죽음을 맞이하면 그를 우상화하는 것과 같다고 할까. 

신을 불러오는 대신 그에 대한 좋은 기억을 불러오는 것이다. 그렇게 좋은 기억으로 그를 추억하고, 그와 함께했음을 기쁨으로 치환하여 슬픔의 자리에 대입하는 것일까? 아니면 죽음을 맞은 지인을 아직 떠나보내지 않고, 그의 꿈과 기억에 붙잡아두고 여전히 함께 생활함으로써 극복하는 것일까? 그렇기에 그를 향한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는 것일까? 

194. 우리는 우리가 그 아픔과 싸웠고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슬픔을 극복했고, 우리의 영혼에서 녹을 긁어냈다고 생각하지만, 그 모든 일이 일어난 때는 비탄이 다른 곳으로 떠났을 때, 자신의 관심사를 다른 곳으로 돌린 때이다. 우리 쪽에서 먼저 구름을 불러들인 것이 아니며, 우리에겐 구름을 흩어지게 할 힘도 없다. 

6. 그렇게 생활하다가 자연스럽게 자신의 상실을 무의식적으로 인지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순간. 자신이 슬픔을 극복한 것이 아니라. 슬픔이 자신을 두고 어디론가 갔다는 것을 알아 달라고 말하는 듯하다.

170. 외부인들이란 정의상, 비탄을 경험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다. 내가 아내를 쉽고 자연스럽게 밖으로 드러낼 수 있는 건 지금까지 그녀를 내 안에 품어왔기 때문이다. 이는 비탄의 역설이다. 만약 내가 이제껏 4년 동안 아내의 부재를 견뎌내왔다면, 그건 4년 동안 그녀의 실재를 품어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내가 활발하게 머물러 있다는 점은 내가 초반에 염세적으로 단언했던 것을 반증한다. 

 

결국, 비탄 또한 어떤 면에서는 도덕적인 공간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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