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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스트가 사랑한 작가들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가는 열 갈래의 길
유예진 지음 / 현암사 / 2012년 10월
평점 :
난이도 : ★★
1. 비의도적 책 읽기?
내가 봄에 얼굴만 타는 것이 아니라 마음도 시꺼멓게 타나보다. 두 분의 이웃에게 '사랑'이 붙은 책이 내가 생각한 로맨스가 아니었다며 별점 테러를 했다는 하소연을 했다. 그러면서도 또 '사랑'이 들어간 책을 잡았다. 봄을 타는 게 확실한 건지. 아니면 누군가의 의도적인 음모에 휘말려 비의도적인 책을 읽고 있는 건지... 결론은 "요즘 뜬금없이 제목에 '사랑'이 붙은 책이 나를 부른다."는 것이다.
'사랑'이 들어간 이 책은 썬크림처럼 하얗고, 마시멜로처럼 달달함을 음미하는 그런 책은 아니다. 오히려 자그맣게 적혀있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가는 열 갈래 길'이라는 부제가 이 책의 정체성에 대해서 사실적으로 설명하는 듯하다. 그런데 사실적이라는 단어는 <프루스트가 사랑한 작가들>에서는 내려놔도 좋은 개념이다. 아.. 그래서 제목이 <프루스트가 사랑한 작가들>이 된건가?
(글 전체가 갈팡질팡하는 이유는 인상주의를 추구하는 프루스트 형님께 여쭈어 보면 알 수 있을듯...
38. 원인부터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지각이 받아들인 순서대로 표현하는 것.
34. 마르셀은 형식, 즉 감정을 표현하는 그녀 고유의 필치에 감탄. 프루스트가 강조한 문체의 중요성. '인상주의적 필치' )
2. 실존 작가들
세비녜 부인, 장 라신, 오노레 드 발자크, 조르주 상드, 귀스타브 플로베르, 공쿠르 형제, 스테판 말라르메, 앙드레 지드. 이 작가들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작가와 이름은 같지만 엄연히 작가와 분리되는 마르셀이라는 시점 속에서 다시금 구성되는 작가의 면면이다. 동시에 책의 저자 유예진 누님께선 프루스트의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위에서 언급한 작가들의 문체나 형식을 오마주하듯이 차용하는 것들의 사례를 밝혀줌으로써 쉬운 독서로 안내해주는 역할을 담당한다.
프루스트는 작가와 주인공. 더 나아가서 작가와 작품은 될 수 있으면 완벽한 상태로 구분되어야 함을 주장하지만, 마르셀 프루스트의 내면 속에서도 이 작가들은 재구성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프루스트의 흥미로운 취미. 즉, 이들의 문체를 모방하는 행위를 통해 자신의 문체를 찾아냈다고 고백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의 마르셀에게도 위의 작가들은 좋든 싫든 간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
3. 가상의 작가
프루스트가 창조한 가상의 작가가 이 책에 등장한다. 프루스트는 가상의 작가 베르고트를 등장시켜서 프루스트의 문학론과 작가론을 상징하는 인물로 그려진다고 유예진 누님께서 친절히 설명해주신다.
결국, 프루스트는 "183. 베르고트는 프루스트가 뛰어난 예술가가 되기 위해 필수적이라고 명한 조건, 즉 자기만의 특색을 가지고 있는 소설가다."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 또한 유예진 누님께서 친절하게 설명해주시는 내용들이다.
90. 프루스트에게 문체(=특색)는 "작가의 모든 것"이라 할 만큼 소설의 내용이나 형식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는 "화가에게는 책, 작곡가에게는 음조, 소설가에게는 문제"가 모든 것을 결정짓는다고 생각.
91. 문체란 작가의 생각에 의해 변형된 현실
127. 프루스트에게 은유란 "문체에 유일하게 시간을 초월하는 아름다움을 부여할 수 있는 것"
4. 프루스트를 사랑한 바르트
마지막으로 롤랑 바르트와 프루스트의 특수한 관계가 남았다. 이 두 사람의 관계는 본래 제목과 아주 잘 어울린다. 그들의 동행이 '사랑'인지 '숭배'인지 헷갈릴 정도이긴 하지만 말이다.
바르트가 읽은 프루스트는 전기, 후기로 나눌 수 있다. 전기 구조주의에서의 프루스트의 소설은 226페이지와 227페이지에서 언급한대로 일정한 패턴을 가진 소설로 설명되었다.
226. 바르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3막으로 된 한 편의 극으로 이해.
1막은 쓰고자 하는 욕망의 발견에 관한 것. (1권 스완네 집 쪽에서)
2막은 쓸 수 없는 무기력, 무능력의 깨달음(2권~6권)
3막은 비의도적 기억의 작용으로 되찾게 된 글쓰기에 관한 소명(7권. 되찾은 시간)
바르트는 '욕망','좌절','부활'이라는 세 단계를 마르셀이 거친 것과 마찬가지로 프루스트 또한 이 단계를 거쳤을 거라고 믿었다.
227. 프루스트 소설의 구조에서 일정한 원칙과 체계를 발견하려고 노력한다.'반전의 법칙'에 의해 지배된다고 분석.
인물의 겉모습을 보았을 때 자연스럽게 떠올리는 그 인물의 특성이 실재와는 상반되는 것을 종종 발견. 이런 반전의 요소는 몇몇 등장인물에게만 한정되지 않고 소설의 근본적인 구조와 직접 즉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인물, 상황의 관찰 -> 가정, 추론 -> 반대 사실 확인'이라는 과정을 반복한다고 한다.
하지만 후기 구조주의로 넘어가면서 바르트는 스스로 이 분석들을 깨뜨리고, 각각의 독자와 작가의 텍스트의 만남을 성사시킨다.
229. 1970년대 바르트의 후기 구조주의적 관점
<텍스트의 기쁨>은 제목이 말해 주듯 감정이라는 지극히 주관적인 요소를 끌어들이면서 새로운 비평을 시도. 바르트는 이제 프루스트를 지배하는 일정한 법칙을 발견하려고 하기보다는 자신과 프루스트와의 관계, 더 정확히 말하면 자신의 삶에 프루스트가 어떻게 연관되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논하는데 그것을 쓴 소설가가 아닌 그것을 읽는 독자의 개인적인 삶이 개입하는 셈.
독자의 경험과 관점을 통해 프루스트에 대한 우호도가 나누어질 것이고, 우호도가 극에 달하면 바르트처럼 프루스트와 바르트가 동일시되는 경지에까지 오를 수 있을 것이다. 동일시 된다 말의 의미는 프루스트가 시간을 되찾기 위해서 자신의 소명을 발견하는 그 과정 전체를 의미한다.
5. 보너스 : 사진에 관한 생각들.
235. <오브비와 옵투스>(1982) 사후출간
바르트에게 사진은 과거의 모습을 재현함과 동시에 무슨 수를 써도 당시의 모습을 되찾을 수 없다는 모순을 안고 있다.
237. 바르트가 인용하는 프루스트는 사진에 대해서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 프루스트에게 사진은 기억을 돕는 것이 아니라 방해하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던 인물들의 과거의 사진들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 사람의 과거를 마주하거나, 알고 있거나 기억하고 있는 그 사람과는 다른 모습을 마주했을 때 낯섦을 느끼기 때문이다. 우리가 기억하는 사랑하는 사람은 기계가 담은 객관적인 모습이 아니라 나의 주관적이며 파편적인 인상의 총체이기 때문이다.
멋진 해석이다.
6. 그냥 또 다른 생각.
어렴풋하게 내가 소설을 쓴다면 이렇게 쓸 것이다. 아니면 이런 소설을 편집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소개하자면
1. 인간의 불완전함을 자각하지 못한 어떤 인간이 평생 그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며 살아가는 과정. 그리고 그것이 밝혀졌을 때의 충격을 완충제 없이 그린 작품.
2. 프루스트는 메시지나 내용과 상관없이 문체만 훌륭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개인적으로는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 사회 현실을 우월한 문체로 써내려간 (사실주의적이 아닌 인상주의적으로) 작품.
3. 반전이 있는 캐릭터들. (도스토예프스키의 인물들은 엘스티르의 그림에서 볼 수 있는 바다인지 하늘인지 혼동시키는 풍경처럼 독자를 당황시킨다. 교활한 것처럼 묘사된 인물이 본질적으로는 선한 사람임이 밝혀질 때혹은 그 반대일 때 독자는 놀란다.)
프루스트의 소설은 이 조건의 많은 부분을 만족시켜줄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그리고 내가 블로그를 통해 나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공개하려 하지 않는 이유를 프루스트도 공감하고 있었다. 아니지. 프루스트의 견해와 통했다는 것이 맞는 건가?
39. 예술가로서의 '나'는 사적인 '나'와 엄밀히 구분되어야 하며, 예술 작품의 진정한 가치를 판단할 때 유일한 기준이 되어야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작품 그 자체이며 작가의 삶이나 성격 등을 기준으로 삼는 전기적 비평은 마땅히 피해야 하는 함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