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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진 들녘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3년 8월
평점 :
절판
난이도 : ★★
1. 과오, 돌이킬 수 없는...
비가 내리고 번개가 치는 그 날. 그 순간. 윤영재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혈기왕성한 사나이었기 때문에 생긴. 어쩌면 자연스러운 충동이었다. 하지만 영재가 순간의 욕구를 참지 못해 저지른 일에 대한 대가는 상상 그 이상이었다.
유마님이 추천해주신 소설. 할레드 호세이니의 <연을 쫓는 아이>의 아미르도 영재와 비슷한 잘못를 저지른다. 영재의 경우와는 조금은 다른 이유 (비겁함과 배신 그리고 침묵) 때문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자신이 목격한 장면을 숨김으로써 하산은 그들의 괴롭힘에 시달리다가 훗날 탈레반이 된 그에게 목숨을 잃고, 하산이 남긴 아들의 삶까지 탈레반에 의해 핍박받는다. 영재의 외사촌누이 주실도 이와 같은 구조를 형성하며 고초를 겪는다.
아미르는 오랜 시간이 흘러 자신의 저질렀던 잘못을 반성하고, 동시에 늦게나마 만회하고자 혈혈단신 하산의 아들 소랍이 있는 나라로 떠난다. 아미르는 탈레반에게 학대당하던 하산의 아들을 우여곡절 끝에 미국으로 구출해냄으로써 희망의 미소를 되찾는다.
2. 합리화
<노을진 들녘>의 영재의 경우에도 잘못을 저지른 후, 아미르처럼 그곳에서 도망친다. 그리고 합리화를 선택한다. 요즘 말로 하면 정신승리라고나 할까?
합리화에 사용된 개념은 <달과 6펜스>의 스트릭랜드의 무책임함과 분위기가 비슷하고, <젊은 예술가의 초상>의 다짐에 맞닿아 있다. 간단히 말해서, 그는 욕망에 솔직한 자유로운 영혼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성격은 그런 무모함과 뻔뻔함을 받쳐줄 만한 타고난 능력이 없었고, 가장 중요한 요소인 그것을 희생함으로써 열정을 바칠만한 숭고한 목표가 없었다. 그것은 단지 현실을 회피하기 위한 구차한 변명에 불과했다. 더불어 그를 둘러싸고 흘러가는 공기는 점점 그에게 선택을 강요했다. 결국, 자신이 저지른 실수에 얽매여 내면에서 고통받던 영재는 아미르처럼 실수를 바로잡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간다.
3. 잘못보다 더 큰 잘못
이 작품들의 주인공이 저지른 가장 큰 실책은 잘못된 행동을 했다는 것이 아니라 잘못을 하고도 그것을 인정하고, 빨리 수습하려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솔직히 말해서,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재와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나 역시 내가 훗날 저지를 심각한 사고에 직면하여 영재와 다른 선택을 할 것이라고 자신 있게 장담할 수 없다. 영재의 생각처럼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든 해결될 문제일 것이기 때문에 도둑이 제 발 저리듯이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자고 생각했을 것 같다.
이것이 본심이긴 하다.
그것은 어쩌면 막대한 피해를 초래하게 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노을진 들녘> 같은 소설을 읽고, 그들의 삶을 짚어보면서 스스로 이러한 비겁함을 반성할 시간을 가지는 것이다.
4. 아직 못다한 이야기
이 이야기는 <노을진 들녘>의 극히 좁은 범위만을 다룬 것이다. 이 소설은 여러 부분으로 읽을 수 있다.
4-1. 신분제 사회의 잔재로 인한 성삼이와 영재의 신분 차. 그러한 갈등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고, 부르주아에 대한 거부감(자격지심)과 부르주아가 되고자 하는 욕망을 동시에 지닌 인물(<연을 쫓는 아이>에서 탈레반으로 성장한 아세프). 성삼이가 악의 중심이다.
4-2. 또한, 송노인 (영재의 외할아버지)의 안타까움에도 공감할 수 있다. 대학까지 보낸 하나뿐인 아들을 이데올로기 싸움과 전쟁으로 잃었고, 그래서 손녀는 세상의 더러움과 마주치지 않게 하려고 손녀를 시골에서 키웠던 노력과 그것이 남성의 욕망에 의해서 물거품이 되는 이야기.
4-3. 성삼이가 주실을 사랑(?)하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 또한, 영재의 여인들(아름답고 자유분방한 미술학도 일혜, 기품있고 우아한 의학도 수명)과의 연애와 사랑과 육체적인 쾌락 간의 갈등. 그 순간의 심리적인 묘사가 두드러지는 걸출한 연애소설로도 읽을 수 있다.
4-4. 영재의 절친한 친구. 동섭과 상호. 그들의 인생도 살필 수 있다.
4-5. 권력에 붙어서 영재를 길러왔던 아버지와 새어머니. 그리고 이복동생의 인생도 엿볼 수 있다.
4-6. 4.19
다시 읽을 날을 위해서 이쯤에서 접어둔다.
- 합리화의 다양한 방식들
202.
"의무고 우정이고 합법이고 개똥이고 없단 말이야! 아무것도 없단 말이야. 나의 죄악은, 나의 욕정은, 젊었기 때문에 아름답기조차 한 거야. 나는 젊어. 내 힘은 넘쳐흐르는 강물이야. 아무도, 그 누구도 넘쳐흘러가는 물을 막을 수 없어. 그것은 자연의 섭리야. 어리석게도 인간이 그것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흥! 위대한 힘이군그래. 그야말로 초인이다."
"그럼. 누구나 자기 혼자의 세계에선 초인이다. 특히 젊은 놈들에게 있어선 그렇다! 나는 그 힘을 주체할 수가 없어. 폭탄을 안고 적진에 뛰어들든지, 아니면 온갖 것을 때려 부수고 백주 대로에서 내가 나를 고발하고 내가 인간을 고발하고... 아아, 그러나 나는 그 여자를 가지고 말 테다!."
246.
"아내가 살아 있었다 하더래도 아마 저는 홍 선생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죄가 되겠습니까? 죄가 되겠죠. 그러나 애정이란 죄악을 초월한 것이 아닐까요? 죄의식 때문에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면 그것은 얼마나 하찮은 인생이 되겠습니까. 비겁한 짓이죠. 애정이란 순전히 정신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니 누가 그것을 심판하겠습니까?" - “내가 믿지 않게 된 것은, 그것이 나의 가정이든 나의 조국이든 나의 교회든 결코 섬기지 않겠어. 그리고 나는 어떤 삶이나 예술 양식을 빌려 내 자신을 가능한 한 자유로이, 가능한 한 완전하게, 표현하고자 노력할 것이며, 내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내가 스스로에게 허용할 수 있는 무기인 침묵, 유배 및 간계를 이용하도록 하겠어.” 젊은 예술가의 초상 -379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