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무렵에 면도하기 - 첫번째 무라카미 라디오 무라카미 라디오 1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오하시 아유미 그림 / 비채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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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처 깨닫지 못했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좋지 않은 독서 버릇을 하나 발견했다. 그 버릇이 무엇이냐면. 나라는 사람은 도무지 단순하게 접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진지 열매를 먹은 것도 아닌데 말이다. 무언가를 얻어가는 것에서 만족하지 않고, 탐색하고 캐내는데 시간을 너무 많이 소비한다. 

 

<저녁 무렵에 면도하기> 같은 책처럼 소소한 재미. 그것만으로도 큰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데도 그랬다. (나중에 글로 남길 수 없는 느낌이나 감성 같은 무형의 것은 충분히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문제이긴 하다. 그래서 그것을 어떻게 할 것 인가라는 고민에 많은 시간을 소비했다.)

 

2. 하루키 에세이의 가장 큰 장점이자 대체로 에세이라는 장르가 가진 장점은 낯선 관점을 엿보는 행위는 그 자체만으로도 시야가 확장되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하루키의 관점에서 하루키 특유의 유머 감각을 접하면 그 순간 쓰는 나의 글도 평소 때보다 조금 더 유머러스해지고, 센스가 넘치는 착각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은 나 혼자만의 자뻑일까? 아닐까? 둘째 단락은 좀 그런 의도를 염두에 두면서 쓴 것 같지만 안 웃기면 할 수 없는 노릇이다. 

 

3. 수염이 올라와서 저녁 무렵에도 면도를 한다라….  전현무 아나운서 같은 사람처럼 수염이 엄청나게 빨리 자라는 사람은 비단 저녁 무렵뿐 아니라 수시로 면도를 해야겠지만, 얼굴에 수염이 적은 편인 나로서는 아침에 한 번 면도하면 그날은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얼굴에 신경을 좀처럼 쓰지 않는다. 

 

이것은 귀차니즘을 분신인 양 껴안고 살아가는 나에게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그만큼 얼굴에 신경을 쓰는 횟수가 줄어드니 그만큼 외모에 더 무관심해질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도 든다. 그렇지만 저녁에 면도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살아있다는 느낌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10. "인간이란 본디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별로 달라지지 않는 것 같다. 어떤 계기로, '자, 오늘부터 달라지자!' 하고 굳게 결심하지만, 그 어떤 것이 없어져버리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부분의 경우 마치 형상기억합금처럼, 혹은 뒷걸음질쳐서 구멍 속으로 숨어버리는 거북이처럼 어물어물 원래 스타일로 돌아가버린다. 결심 따위는 어차피 인생의 에너지 낭비에 지나지 않는다.~ 반대로 '딱히 달라지지 않아도 돼'라고 생각하고 있으면, 희한하게 사람은 달라진다."

 

4. 10페이지의 말에는 절반 정도 동의한다. 확실히 인간은 달라지지 않는 것 같긴 하다. 귀차니즘이 쉬이 사라질 생각을 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억지로라도 어떤 계기를 만들려고 한다. 그것을 가장 싼 값에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자기계발서를 읽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 과연 이런 몸부림을 에너지 낭비라고 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은 있다. 고수의 깨달음을 이해하기에는 아직 수행이 부족한 듯 싶다. 

 

5. 그 외. <저녁 무렵에 면도하기>에는 대체적으로 반려동물, 음식, 여행, 음악 같은 식도락과 풍류를 다룬 내용이 많다. 이 글을 음미하고 있으면, 하루키의 모던스러운 풍미가 느껴진다.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미친사랑>에서는 그러한 모더니즘이 맹목적으로 서양 것을 우월하게 보는 문화사대주의로 변질되었지만, 하루키의 모더니즘은 적절히 균형을 이룬다. 유럽의 문화라고 무턱대고 찬미하지 않는다. 깔건 제대로 깐다. 

 

9. 이탈리아란 나라는 제대로 갖춰입지 않으면 레스토랑에 가도 좋은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다. 오로지 차림새로 사람을 판단하는 나라로, 인격이고 능력이고 그런 건 일상에서 거의 소용없다. 


54. 이탈리아인 드라이버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뭔가 불만이 있으면 이내 창문을 열고 소리를 지르는 것이다. 동시에 손도 마구 휘두른다. 운전하면서 그러는 통에 옆에서 보고 있으면 꽤 공포스럽다. 서툰 운전자에게 관용을 베풀지 못하는 것도 이탈리아 운전자들의 또 하나의 특징이다. 


그 외 공감 가는 문장들...


39. 귀로 들리는 음성적인 말의 모든 관계성과 의미가 커다란 형광등 아래처럼 구석구석까지 명확해져버린다면, 그건 그것대로 뭔가 싱겁지 않을까, 인생에는 어느 정도 터무니없는 수수께끼가 필요하다. 


44."점프하는 자체는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어려움은 착지를 하려는 순간부터 시작되죠."

 

기세 좋게 점프만 하는 것이라면 건강이 허락하는 한 누구든 할 것이다. 그러나 착지를 잘못하면 살아 돌아오지 못한다. 


75. 인생은 남의 사정과는 상관없이 멋대로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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