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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약국의 딸들 - 박경리 장편소설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3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1.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고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이마에 손을 얹고, 머리카락 한가닥을 잡고 아래로 끌어당겼다. 눈동자를 위로 치켜떴다. 혹여나 머리카락이 하얗게 새어버리지는 않았을까 염려가 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은 검은색의 머리카락이었으나 은빛 가닥이 새어나는 것 같은 심정이었다.
2. <김약국의 딸들>은 제목 그대로 딸 부잣집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이다. 일제강점기. 억압의 시대였지만, 그럼에도 미약하게 태동하는 신여성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김탁환 작가의 소설 <뱅크>의 박인향처럼 높은 경지의 주도적인 신여성의 면모를 보이진 않았지만, 김약국의 딸 중. 둘째 딸 용빈과 다섯째 딸 용혜의 이야기가 완전히 마무리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인향의 역할을 그녀들에게 기대해봄직하다.
3. <토지>와 비교했을 때, <김약국의 딸>은 상대적으로 지주 가문에 가진 적의와 자본에 대한 탐욕을 드러내는 측면에서 다소 온건한 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의 쇠락은 누군가의 음모 때문이 아니라, 변화에 대처하지 못한 탓이 크다고 여겨진다.
김약국의 대처 방식을 안줏거리로 삼으면서 틀렸다고 말할 사람들은 지금이야 즐비하게 많겠지만, 그때 당시에는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시대적 관행과 전통의 기준에 따라 널리 통용되었던 가장 합리적인 선택은 그녀들의 삶을 강제했다. 만약, 그 관행과 전통이 여전히 유효한 상태로 계속 이어져 내려왔다면, 김약국의 가문은 그 정도까지 풍비박산 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김약국의 대처는 잘못된 선택이 되고야 말았다. 김약국 가문의 몰락은 '집안의 터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라는 풍문이나 미신 따위로 해석될 문제가 아니었다. 몰락과 실패는 지금껏 정상적으로 굴러가던 사회에 균열이 생겼음을 증명하는 가장 뚜렷한 표식으로 해석할 수 있고, 따라서 그들이 현명했더라면 서둘러 낡은 전통에게 작별인사를 건네야 했다.
이렇게 나름대로 결론을 내리고 있지만 그러한 작별인사를 이후에 벌어질. 이웃들의 뒷말을 무심하게 견뎌낼 수 있을지 섣불리 자신할 수가 없다.
4. <김약국의 딸들>은 앞서 읽은 <수레바퀴 아래서>와 같은 종류의 문학이다. 실패의 문학이면서 동시에 자양분의 문학이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의 의식은 지금 이 상황이 잘못 흘러가고 있음을 감지한다. 그리고 김약국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울타리 밖에 있는 사람들까지 모두 상황을 인지하고 나름대로 살기 위한 포지션을 선택한다. 그 사람들의 깊은 곳의 목소리를 들으면 올바른 방향이 무엇인지 자연스럽게 알 수 있다.
5. 우리는 그들의 실패를 보면서 '실패'는 '변화를 요구하는 가장 절실한 목소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