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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 : 사랑의 시작을 위한 서른아홉 개의 판타지 - 이제하 판타스틱 미니픽션집
이제하 지음 / 달봄 / 2012년 10월
평점 :
품절
1. 정리하지 않았다. 정리하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39가지의 단편을 차례대로 읽어나갈 뿐이었다. 그렇게 읽어내려간 대부분 작품에서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에 대한 뚜렷한 개성을 발견했다. 세련된 것처럼 느껴지지만, 한편으로는 낡은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스펙트럼이 넓은 개성이었다.
2. <코>에 실린 작품 중에서 상당수는. 초혼의 나이가 늦어지고 있는 사회.독신의 자유가 낭만으로 받아들여지는 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 어쩌면 그래서 이 책의 부제를 '사랑의 시작을 위한 서른아홉 개의 판타지'로 정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가 하면 어느 작품에서는 끝을 의미하는 죽음의 감성을 들춰내기도 한다.
어떤 작품에는 빌어먹을 ‘서울’의 황폐한 인심을 폭로하기도 한다. 그리고 갑자기 오물투성이 ‘정치’를 비난하기도 한다. 그리고 ‘코’ 때문에 결혼한 커플의 파국을 그려내기도 한다. 또한, 도무지 알 수 없는 무언가를 이야기하기도 한다.
마치, 삶에서의 사건. 또는 사물을 축약시켜 저장해둔 기억을 다시금 끄집어내어. 빈 공간에 짧은 글과 그림을 함께 남겨놓은 듯한 인상이었다. 그래서 아마 실제에 환상이 그토록 쉽게 끼어들 수 있었을 것이다.
3. 그렇지만, 개인적으로 굉장히 안타까웠던 것은 이러한 노력. 즉, 베테랑의 노트에 쌓아둔 상상력으로서 가공한 창조물로도 지독히도 재미없는 이 세상을 흥미롭게 바라보게 하는 데는 역부족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어쩌면 작가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렇다면 소설집 <코>는 그의 성장통을 기록한 일기장일 것이다. 아픔일 것이다. 한 영혼이 벗어던진 세상이라는 이름의 껍데기일 것이다.
4. 그런 의미에서 '마술적 리얼리즘'에서 리얼리즘을 더 많이 제거한 마지막 작품. <신시>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왜냐하면, 앞의 38가지 작품이 유령과 환상이라는 비현실적인 도구를 현실이라는 한도 내에서 사용하였다면, <신시>는 환상을 좀 더 사실적으로 만들고, 현실을 환상적으로 만드는 작업을 진행했기 때문이다.
인터넷이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얻은 깨달음이 현실적 리얼리즘에 대한 제약을 해방시키는데 많은 도움이 된 듯한 <신시>는 기존의 사회 틀을 완전히 부순 후에 건설한 ‘새로운 사회’를 보여주는데, 이 작품에 함축된 메시지를 캐내는 것보다 <신시>가 중요한 이유는 이 작품이 이제하라는 작가의 완성에 다가가고 있음을 스스로 고백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