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빌리 엘리어트
멜빈 버지스 지음, 정해영 옮김 / 프로메테우스 / 2012년 7월
평점 :
원작의 영화를 소설화한 특이한 케이스다. <빌리 엘리어트>. 소설가의 눈에는 앞에 놓여있는 빈 곳에 대한 어떤 아쉬움이 이 영화를 관람한 이후에도 떠나지 않았나 보다. 이처럼 훌륭한 이야기를 카메라 앵글로 완벽히 담아낼 수 없었던 것은 카메라만으로는 가슴 속 깊은 내부의 꿈틀거림을 해부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는 부족한 2%를 메우기 시작했다. 자신이 소설, 글, 말로 덧붙여야 할 부분. 좀 더 완벽한 작품을 위해 그에게 맡겨진 몫은 아버지의 마음. 형의 마음. 동생의 마음. 상충하는 내면 속. 목소리의 울림을 증폭시키는 것이었다.
다중일인칭 시점. 이것이 울림의 시각화를 위한 선택이다. 사라질 위기에 놓인 탄광촌을 평생직장으로 여겼기에 데모를 벌였던 치열한 환경에서 아버지와 큰아들이 빌리의 허무맹랑한 꿈에 대해서 반대의견을 제시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타당하다.
한편, 빌리는 내가 왜 발레에 빠져드는지. 나에게 어떤 재능이 있었는지. 발레를 할 때마다 느끼는 익숙한 감정의 정체는 무엇인지. 내가 빠져드는 무아지경의 감정은 어떠한지 서술한다.
124."빌리 사람이 죽으면……. 일단 죽으면, 그걸로 끝이야. 하지만 나는 그냥 이렇게 상상하고 싶어. 잘 들어와. 넌 엄마를 다시 살리는 춤을 추는 거야. 그리고 춤 마지막에 최고로 크로, 빠르고, 높게 회전하는 거야. 그때 부웅 하고 몸을 띄우는 거야. 흥분한 엄마가 박수를 치며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는 모습이 곁눈으로 보일 만큼 빠른 속도로 말이야. 방금 네가 보여 준 것 처럼. 어때?"
246. "시작할 때는 약간 몸이 뻣뻣해지지만……. 막상 춤추기 시작하면 내가 뭘 하고 있는지 하나도 안 느껴지고……. 그래요. 마치 내가 공중 속으로 사라지는 기분이에요. 내 몸 안에 불길이 치솟고 난 거기서 날아가요. 마치 새처럼요. 마치 전기처럼요……. 그래요. 그건 전기 같아요."
우리는 빌리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빌리를 이해할 수 있고, 다른 이들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다른 이들을 이해할 수 있다. 저자가 개별적인 일인칭으로 나눠둔 이유의 전부는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상호작용을 위한 것이었다. 이로서 인물 간의 역지사지는 가능해진다.
책을 읽다 보면 화자가 천천히 고백하는 각자의 사정을 자기화하는 어느 순간이 반드시 찾아올 것이다. 이 순간이 바로 작가가 덫은 쳐둔 그 장소다. 이 덫에 몸을 맡기면 우리는 이 상황에서 누가 잘못하고 있구나와 같은 책임 소재를 캐내려는 공허한 마음을 버리게 된다.
게다가 이 가족은 빌리의 꿈을 돕는 방향으로 온 마음을 모으기 때문에 읽을수록 마음이 따뜻해짐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이 가족의 이야기가 부정적인 결말에 직면했으면 어떨까 상상해봐도 우리는 온전히 <빌리 엘리어트>의 모든 순간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가짐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따라서 나는 <빌리 엘리어트>를 보면서 빌리가 꿈을 이룰 수 있는 환경이 무사히 조성되었던 사실도 기뻤지만. 그보다 더 기쁜 사실은 가족 구성원이 서로 무사히 이해하기를 마쳤던 그 과정의 모든 순간이 기쁨으로 다가왔다. 이런 성장 소설이라면 무조건 환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