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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닉 -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는 마음
배명훈 지음 / 북하우스 / 2012년 6월
평점 :
마지막 순간이 허무하다. 왜 그는 풀어놓은 고삐를 그토록 급하게 잡아당겼을까? 그렇게 심혈을 기울여 꼼꼼하게 칠했던 회색과 검은 물감 범벅에 찬물세례를 퍼부으니 불투명한 색감이 물의 유혹에 못 이겨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그가 애초에 칠했던 공간이 종이로 이루어진 공간이 아니라 유리판 혹은 투명 아크릴판의 공간이었던 것이다.
나는 악마가 가진 탐욕의 끝을 똑똑히 보고 싶었던 것일까? 악마가 하나, 둘, 셋,넷, 그리고 다섯. 그들이 깨어나는 그 순간. 뇌가 짜릿해지는 그 감각에 중독되어버렸던 것일까? 플라톤이 말했던 인간의 여러 가지 본성 중 파충류의 뇌가 가리키는 영역. 그리고 스티븐슨이 창조한 하이드. 나는 이 세계가 유리가 아닌 한 번 색칠하면 돌이킬 수 없는 종이로 생각했던 것이다.
51. 죽음이란, 순간의 감정이 일일이 반응해서 표정을 짓기보다는 표정이 요구되는 순간들 모두에 대답할 수 있는 단 한 개의 표정만을 짓고 있겠지. 그래서 인상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얼굴이 된 거겠지. 한순간에 그대로 고정되어버린, 더 이상은 생명이 될 수 없는 얼굴. 하지만 시간 자체가 완전히 멈춰버린 건 아니라는 의미를 지닌 복잡한 표지.
130. 은경이의 시간이 나에게 덮어씌워진 듯했다. 에레나의 죽음이, 은경이의 무대가, 그 기괴하게 일그러진 공간이 나를 감쌌다. 세상이 다시 5도쯤 더 기울었다. 호박 속에 갇혀 수천만 년의 시간을 빼앗긴 채 살아 있는 모습 그대로 죽음이 되어버린. 이름을 알 수 없는 무언가의 화석처럼. 나는 그렇게 무언가가 되어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찬욱 감독이 <은닉>을 본 후, ‘거짓’의 백과사전이라는 평을 남긴 것처럼 배명훈 작가가 창조한 모든 것이 불확실한 회색빛 공간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인상적이다. 시간과 공간을 무시한 움직임의 생동감 넘치는 묘사. 묘사와 동시에 체코의 겨울 하늘을 수놓는 하얀 눈과 소설의 모든 부분을 지배하는 색깔인 회색. 그리고 검은색. 그리고 간혹 엿보이는 붉은색과의 대비는 강렬했다.
게다가 체코 겨울 하늘의 눈. 그리고 인간의 신체에 달릴 두 눈. 이 서로 다른 눈이 만들어내는 앙상블은 한국소설만 가능한 일종의 고유 영역이다. 스노우(snow)와 아이즈(eyes)로는 절대 만들어낼 수 없다. 같은 글자임에도 장음의 눈과 단음의 눈이 다른 뜻을 나타내는 한국어가 의식을 지배하는 순간에만 찾아올 수 있는 조합이다.
유념무상님의 서평에 댓글로 남긴 말처럼 이 책 때문에 컬쳐 쇼크를 받았다. 원래 개인적으로 현실성 없는 소설을 상당히 싫어하는 편인데, <은닉>의 현실성 제로 퍼센트의 이야기는 나의 온 감각을 집중하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비현실의 일그러진 시공간 속에서 숨 쉬고 있는 인간의 발가벗은 일면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카노 가즈아키 작가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7월의 소설은 <은닉>이 될 것 같다. <은닉>은 <제노사이드>보다 하나의 관념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문장력과 인간의 의식에 대한 묘사에서 월등한 수준 차이를 보인다. 아 참! 인간 존재에 관한 불완전성의 회색빛은 진실이다. 그 색감을 씻어낼 어떤 계기가 없는 순간 동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