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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면하는 벽
조정래 지음 / 해냄 / 2012년 4월
평점 :
올해 최고의 작품을 만났다. 1977에서 1978년 사이의 작품들 가운데 8작품을 선별하여 재출간 한 작품집이지만 말이다. 단편·중편 모두 총 8편 모두 인상적이어서 딱히 어떤 작품이 인상적이었고,그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말하면 다른 작품은 별로라고 생각할까봐 구구절절 이유를 늘어놓기 귀찮을 따름이다. 그냥 최고다.
<외면하는 벽>의 작품들에서는 인간의 내면, 문장력, 줄거리, 인물 간의 자연스러운 시점변화, 사회 비판적인 시각 처럼 대표적으로 느낀 다섯 가지의 훌륭함이 함량을 달리하여 혼재되어 있었다.이것은 각각의 작품의 글 스타일에 살짝 다른 느낌을 부여해 주었고, 각 작품을 읽으면서 나는 대체적으로 다섯 가지 중에서 어느 한 부분에 집중하면서 읽었던 것 같다.
어느 작품을 읽으면서는 카프카의 <소송>을 떠올렸고, 어느 작품에서는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가 떠올랐고, 어떤 작품은 헤르만 헤세의 <요양객>을 생각나게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조정래의 직품이 세계문학을 어느 정도 뛰어넘는 수준을 이뤄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비둘기>는 소송, 그 후를 다룬 것 같은 인상이고, <진화론>은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의 탄생을 만들어낸 사회인식에 비할 바가 아닌 산업화한 사회 차원에서 동호의 사연을 나열하고 있었으며, <외면하는 벽>은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음을 <요양객>과 <망자>라는 완전히 비교 불가능한 차원의 아픔을 다룬다.
17. 말은 말 앞에서 말일 수 있는 것이지 소리 앞에서는 부질없는 소리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말을 소리로 전락시키는 것만큼 비열하고 치사한 짓이 또 있을 수 있는가.
올해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찰스 부코스키의 <우체국>이 인간이 입은 상처를 날것처럼 보여주는 작품이고, 기존에 읽었던 문학이 얼마나 아픈지 토로하고 있는 작품들이라면, 조정래의 작품들은 인간이 어떻게 해서 아프게 되었나를 아주 제대로 파헤치고 있는 작품이라고 말하고 싶다.
조정래 작가는 ‘어떻게’를 이야기하면서도 문장에서 심적으로 불안하고 불쾌한 느낌보다는 냉정하며 적확한 느낌을 더 강하게 받았고, 격한 어조로 그것을 비난하지는 않지만, 그가 독자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비인간적이면서 비이성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지했던 1970년대 후반의 군상들이 만들어가는 대한민국을 충분히 공감할 수 있게끔 잘 보여준다.
123. 시골 인심은 뭐 좋았나. 뒤에서 수군대고 손가락질해 가며 업신여긴, 뱀 대가리 같은 것들뿐이었는데. 아는 얼굴들이면서 그 짓들을 한 인심이 더 더럽지. 서울에서는 그 일로 구경거리는 안 된다. 그것만으로도 시골보단 훨씬 낫다.
이런 군상들의 부조리는 딱히 근대화된 도시에서만 볼 수 있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도시나 시골이나 할 것 없이 대한민국 전반에 들어찬 병폐였다. 지금도 전혀 나아진 것이 없는 아니 솔직히 말해서 아주 약간 나아졌으나 아직도 한참 모자른 2012년. 현시점에서 한국사회를 들여다보면 부조리의 진리를 깨달았던 소수가 다수의 무리에 의해 침묵 당해야만 했을 과거의 슬픈 날을 짐작해볼 수 있다.
우리는 지금 또 다시 과거와 같은 문제를 고민 중이다. 그리고 여전히 소수의 상위층이 누리는 편리함에 의해. 단편 <마술의 손>에서처럼 TV 속에서 꾸준히 소수들의 지배력을 정당화시키는 논리를 만들어내고, 그로부터의 열광에 의해 침묵해야만 한다. 그리고 아마도 미래에도 똑같은 문제를 고민할 것이다.
242. 아낙네들은 이제 퀴퀴하고 질척질척한 느낌의 생활 속의 이야기들을 거의 잊어버리고 있었다. 누가 누구보다 미남 탤런트고, 어느 가수가 누구보다 더 노래를 잘 부른다고 우김질하는 것이 한결 재미가 고소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