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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서아 가비 - 사랑보다 지독하다
김탁환 지음 / 살림 / 2009년 7월
평점 :
품절
많은 사람들이 소설가는 머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손입니다. 발자크처럼 손으로 쉴 새 없이 집필하는 것. 과잉으로 소설 세계에 빠지는 것만이 뛰어난 소설가가 되는 길입니다. -252p-
김탁환이라는 작가를 처음 알게 된 것은 <뒤적뒤적 끼적끼적>이라는 그의 독서록을 구입하면서 부터였다. 여러 방향으로의 글쓰기를 고민하고 있을 때, 이 책은 격식 없는 자유로운 감상을 먼저 해보라고 말해주었다. 이 책 덕분에 토마스 만과 폴 오스터를 읽게 되었고, 독서록에 있는 책을 만날 기회가 읽을 때마다, 그의 해석을 곁에 두고 느낀 점을 토론해보고 싶은 책 중 하나이다.
이 검은 액체가 전하의 혀끝에 닿는 순간을 상상하며 내 모든 감각을 깨우고 또 깨웠다. 사랑보다도 더 짙은…… 어떤 '지극함'을 배우고 익히는 나날이었다. -131p-
영화 <가비>가 개봉했고, 어떤 내용일까 궁금증이 동하여 <가비>의 원작소설 <노서아 가비>의 책장을 천천히 넘겼다. “악마처럼 검고, 사랑처럼 달콤하다.” 이것은 커피를 묘사하는 문장이지만, 소설 <노서아 가비>를 묘사하는 문장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이 책은 커피 같은 소설이다. 책 속 황제가 즐겨 마시는 음료가 노서아 커피라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책을 구입한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이런 스릴있는 싸움이 전개될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이반과 따냐의 전투. 영화 <미스터 미세스 스미스>의 격한 부부싸움이 <범죄의 재구성>과 같은 상상을 뛰어넘는 트릭과 잘 어우러져 겉으로 보이기에는 아주 달콤한 캬라멜 마끼야또 같지만, 속에 감춰져 있는 어둠은 칠흑 같은 아메리카노 같은 맛이 느껴진다.
종이와 현실은 다르다.
종이 위에서는 단숨에 천하를 품고 수천 명의 적군을 한꺼번에 몰살시키지만, 현실은 한 움큼의 돈도 얻기 어렵고 단 한 명의 적을 죽이려다가 큰 상처를 입기도 한다. 사기꾼들을 상대로 사기를 치는 건 더더욱 어렵다. 피를 나눈 형제나 살을 섞은 배우자까지 의심하는 것이 바로 사기꾼이라는 족속이다. -46~47p-
사기꾼은 진실해선 아니 되고 정직해선 아니 되고 일이 끝난 후 같은 곳에 머물러서도 아니 된다. 삶의 원칙을 바꾸면 큰 낭패를 보는 법이다. -192p-
이 책은 두 명의 사기꾼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따라서 사기꾼의 탐욕을 얼마나 적절하게 표현해내는지가 관건인데, <노서아 가비>는 속도감 있는 전개에도 충분히 잘 그려낸다. 오히려 속도가 붙어서 훨씬 더 몰입할 수 있게 한다. 그 옛날 봉이 김선달이 평양 대동강 물을 팔았던 것처럼, 이반과 따냐는 러시아의 숲을 팔아치우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사기꾼 애인이다. 따냐는 사기꾼이면서도 조선인 바리스타이기도 하다.
어떤 사건을 계기로 따냐와 멀리 떨어진 이반은 그의 탐욕을 근육처럼 불려서 조선을 압박한다. 조선을 팔아치우려는 음모를 꾸미는 이반과 사랑했기 때문에 약속을 잊지 않고 러시아에서 조선으로 건너온 따냐의 갈등과 흐름은 인과응보적 결론으로 귀결된다.
역설적이게도, 그가 나를 버리고 조선으로 들어갔듯이 나도 그를 한 번쯤은 보란 듯이 버리고 싶었다. 다만 그 기회와 실익이 문제였다. -193p-
궁금한 것은 정말 그녀는 봉투 속에 든 이익을 위해서 그랬을까? 아니면 황제를 위해서 그랬을까? 아마도 아버지를 위해서 그러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어찌 됐건 그녀는 일거삼득의 효과를 거둔 훌륭한 사기꾼임은 틀림없다. 하지만, “아기는 아기고 사기는 사기”라는 그녀의 마지막 대답이 왠지 슬프게 들리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