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백마의 기사 ㅣ 대산세계문학총서 43
테오도르 슈토름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11월
평점 :
테오도르 슈토름의 시적 사실주의라는 장르를 맛볼 수 있는 <백마의 기사>는 현재의 시점에서 주인공이 살았던 과거를 회상함으로써 이야기가 시작된다.
우선, 18세기 독일 북부의 한 마을의 제방에 얽힌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 <백마의 기사>에는 제방 감독관이라는 특이한 직업이 등장한다. 쉽게 말해서 소설 속 제방감독관은 홍수나 파도에 대비해 마을의 치수를 조성하고 제방을 관리하는 총 책임자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테오도르 슈토름은 이런 제방감독관에게 감성적인 능력보다는 모든 것을 수학적인 논리에 의거한 객관성으로 판단할 수 있는 이성적인 능력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하우케 하이엔이라는 인물을 통해 보여준다. 어려서부터 관심을 가지고 유클리드 기하학을 공부한 하우케 하이엔은 제방감독관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사내였다.
개인적으로는 <백마의 기사> 하우케 하이엔을 보면서 KBS 드라마 <브레인>의 이강훈과 상당히 비슷하다고 느껴졌다. 이강훈의 환경보다는 나은 것 같지만 그래도 제방감독관이 되기에는 다소 부유하지 못한 환경. 수학적 지식으로 다져진 자신의 능력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모습. 신 제방 건설처럼 가능하다고 생각되는 일을 실현시키려는 추진력. 그의 능력을 질투하면서 그를 시기하는 올레 페터스 같은 인물까지. 그야말로 그의 주변엔 사방이 적이고 싸워서 그들을 굴복시켜야만 쟁취할 수 있도록 그려진다.
그렇지만 하이엔과 이강훈의 조금 다른 점은 성공을 뒷받침해주는 여인. 전 제방감독관의 딸이자 연인. 엘케 폴커츠의 존재였다. 조교수가 되지 못한 이강훈과는 달리 하이엔은 그녀의 적극적인 지지를 통해 제방감독관의 자리를 물려받을 수 있게 된다. 그렇게 감독관이 된 그는 능력을 발휘하여 간척지를 메우고 새로운 제방을 쌓는 거대한 개발 사업을 시작한다.
하이엔의 제방감독관의 일과는 수월하지 않았다. 전 감독관이 소홀히했던 치수정비사업은 주민들의 불만을 야기시켰다. 또한 테오도르 슈토름이 돌려서 말하는 트린 할멈의 고양이와의 싸움, 하이엔이 타고 다니는 백마가 유령이라는 설과 같은 지역사회의 미신들과 하이넨의 비이성적인 추진력이 낳은 부작용은 이제껏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일에 대한 불만을 더욱 증폭시켰으며, 무섭게 불어온 폭풍이 하이엔의 목숨을 앗아가게 만드는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한다.
그러나 이야기가 회상되는 시점인 100년이 지난 후에도 그 자리에 곧게 서있는 신 제방. 하우케 하이넨 제방이 함축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아마도 18세기에 만연했던 모든 사회적인 구조에 대한 비판일 것이다.
한편, 이 책에는 <백마의 기사>외에 <꼭두각시패 폴레>라는 이야기도 함께 묶여져 있는데, 이 소설 역시 과거의 회상으로 시작된다. 이야기의 중심인물 파울젠은 하우케 하이넨과 마찬가지로 장인으로서 필요한 이성적 능력을 지닌 사람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파울젠과 하이넨의 차이점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하이넨이 위를 향하여 사회적인 모순에 저항했던 인물이라면, 파울젠은 아래를 향하여 사회의 모순에 저항한 인물이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사회적으로 천시 받던 유랑객의 딸인 리자이를 사랑했던 파울젠이 사회적인 편견에 맞서서 받아들이게 된다는 사실로 이야기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차이는 너무나 다른 결말을 보여준다. 하이넨이 성공하기 위해 달려간 위쪽 방향에서는 주변 마을 사람들보다 자신의 업적을 위해 계획한 신 제방이 우선시되었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에게서 고립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래 방향으로 달려가 자신을 낮춘 파울젠은 그를 시기하는 무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보다 중요한 마을 사람들의 신뢰를 잃지 않게 되었다.
결국 테오도르 슈토름은 개인적으로 불만을 느낄 정도의 사회적인 모순이 있다면 하이넨의 대처방법보다는 파울젠의 대처방법이 현명하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