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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제국 ㅣ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63년생 김성훈. 67년생 김기영. 이 두 사람은 동일 인물이다. 그는 북한에서 태어나 20세가 되던 해. 남한으로 침투했다. 그리고 그 속에서 67년생 김기영이라는 허물을 덮어쓴 채 북한이 의도한 대로 남한의 대학교에 합격. 대남공작의 기틀을 마련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그는 그 시대를 일컫는 대학생. 386세대와 함께 민주화를 외치는 시위에 참여했다. 그리고 이북의 혁명사상을 공부하는 여인과 결혼까지 한다. 그렇게 그는 사상적으로 조금 위험한 사람이긴 했지만 정석적인 386세대로 위장하면서 한국인으로 살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이후 10년간 의심을 받지 않고 대남공작활동을 실행할 수 있었다. 그가 공산당원으로 해야 했던 임무는 시나리오 작가들처럼 남한으로 내려온 간첩들에게 적절한 배역을 제공해 주는 것이었다. 그가 쥐어주는 배역들에 따라 간첩들은 다양한 직업을 가진 한국 사람으로 변신했다. 그렇게 그는 열심히 시나리오를 써내려갔다.
허나 그의 남한생활 20년 인생에서의 나머지 10년 동안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아무런 활동지침을 받지 못했다. 그렇게 그는 북에서 잊혀져간 사람이 되어갔다. 그러는 사이 그는 남한 속에서 남한의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아내와 딸아이를 위해서 여느 대한민국의 아버지처럼 치열한 삶을 살아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국명 김기영에게 즉시 북으로 귀환하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남한 상륙 20년 만이요. 잊혀 지내 온지 10년 만의 갑작스런 사건이었다. 그는 혼란스러워졌다. 그의 인생은 힘겹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의 기반을 잡아놓은 상태에서 딱 하루의 삶밖에 살 수 없는 시한부 환자의 상태로 변해버렸다.
하루의 삶을 살아야 하는 인물은 김성훈이었다. 그래서 그는 시한부 선고를 받은 여느 환자들처럼 과거를 회상했다. 그리고 지금껏 떨어져 지내던 자신과 함께 내려왔던 동지들을 만난다. 지극히 짧은 하루 동안의 시간. 그는 정리하기로 한다. 왜냐하면 김성훈이라면 결코 거역할 수 없는 위대한 어버이의 명령을 따라야 했기 때문에…….
그러나 그의 앞에는 또 다른 선택지가 놓여 있었다. 그것은 김기영이라는 선택지였다. 그에겐 가족이 있었다. 그는 이미 이곳의 삶에 적응해버렸다. 그는 정말 김기영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그는 평양호텔의 지하 깊숙한 그 곳. 교육 목적으로 만들어진 인공의 서울. 공작원들을 교육시키는 부속품으로 그곳에 갇히게 될 것이 뻔한 미래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인간으로 바뀌어 버렸다.
남한의 사회 속에서 김성훈이라는 선택지에는 하나의 운명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기영이라는 선택지에는 수많은 운명들이 함께하고 있었다. 그가 기영이라는 이름을 가진 채 남한사회에 적응하기 위한 숱한 과정 하나하나에는 그의 부인 장마리가 함께하고 있었다.
장마리라는 이름을 가진 그녀는 어린 시절 매우 똑똑한 학생이었다. 그래서 우수한 대학교에 진학하지만, 어떤 계기로 인간미 없는 서울의 도시 사람들의 모습을 극한으로 경험하게 된다. 그러면서 그녀의 인생은 180도 뒤바뀐다. 비인간적인 사회를 부정하는 여인으로…….
그녀는 김기영과 혼인한다. 그러나 그에게 깊숙하게 접근할 수 없었다. 무엇인가 알 수 없는 거리감이 그녀를 지치고 힘들게 했다. 그녀는 그래도 그를 이해해보려고 노력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부모님을 잃은 상처가 그를 외로움을 지닌 남자로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를 이해하고 사랑받길 원했지만 그는 그녀에게서 점점 더 멀어져만 갔다. 가까이 존재하는 것은 그의 몸뚱이와 체온 뿐 그 이상은 그녀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 또한 이 사회와 그의 남편의 성향 때문에 좌절감을 느끼면서 변화해나간다. 힘겨웠던 나날들이었지만 조금씩 극복하며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곁에 20대의 순수함을 잃어버린 채 이 사회의 어두움에 길들여진 그녀를 원하는 한 남자가 다가온다.
고성욱. 그는 20세의 젊은 법대생이다. 그는 약한 척 도도한척 이것저것 따지기 좋아하는 젊은 여자들보다 모든 악조건을 견뎌낸 강인한 커리어 우먼인 40대의 장마리를 사랑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자기가 원하는 거라면 무엇이든지 가리지 않고 들어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변태적인 성욕을 채우기 위한 행위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장마리에게 있어서 고성욱이란 젊은 남성은 안정되지 못한 삶을 그녀를 비참하게 만들었던 사회에 대한 분노를 풀어낼 열쇠 같은 것이었다. 젊은 남성을 정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 그것은 이 사회의 도덕적 관념을 무너뜨릴 수 있을 만한 것이었다. 그녀를 이렇게 만들어 버린 이유는 여인이라면 한 남자의 아내라면 누구나 꿈꿔왔던 사랑을 받지 못했던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김기영. 그가 과거의 비밀을 지켜나가기 위해서 불안한 나날을 보내야 했던 그 순간부터 그의 주위 사람이 그에 맞추기 위해 변해버렸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인생에서 중요했던 변곡점. 그 한 고비의 선택이 어긋난 순간부터 그것을 바로잡기 위한 노력은 점점 더 흐트러져가는 것을 바로잡기 위한 흐름이 아니라 그저 어그러지는 물속의 잉크 한 방울처럼, 그것에 순응하면서 맞춰나가야 했던 것이다.
오죽했으면 그의 딸인 현미가 자신의 절친 아영이에게 우리 엄마는 계모라는 황당무계한 비밀을 털어놓았을까? 기영이 만들어낸 어두움은 그렇게 그의 딸에게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마리의 딸. 현미에게 그녀는 계모가 아니었다. 그녀는 기영의 딸일 뿐만 아니라 마리의 딸이기도 했다. 허나 현미가 아영에게 털어놓은 “우리엄마는 계모”라는 비밀처럼 한창 사춘기의 나이에 있는 현미는 아버지를 더 좋아하고 아버지를 더 정상인으로 생각하는 딸로 변하고 있었다.
현미가 생각하는 정상인의 개념. 그것은 김기영 = 진국이라는 공식으로 변해버렸다. 딸은 아버지와 같은 남성을 이상형으로 삼는다더니……. 진국이라는 자폐아적인 성격을 가진 한 남자아이가 풍기는 분위기는 다른 또래의 아이들과는 다른 신비로운 존재로 현미에게 다가왔다.
하지만 현미는 기영의 행동에 발맞춰 순응 해나갔던 마리와는 달리 진국이에게 덮여 씌워진 또 다른 하나의 자아에 맞서서 이겨내기를 다짐한다. 현미의 이러한 다짐은 기영과 마리에게 놓인 과거와 현재와는 다른 또 다른 미래를 암시한다.
이 책은 간첩이라는 가장을 둔 특수한 한 가정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었다. 그 속에는 우리의 분단의 비극이 존재하고 있었다. 김기영. 그는 이북의 사상으로부터 벗어난 20년의 세월 동안 정반대의 세상에서 보금자리를 마련했고 그렇게 그는 자본주의의 세상에 길들여져 갔다. 그리고 그가 적응하는 중심에는 가족들이 있었다. 비록 그가 이 세계에서 비밀을 간직한 채 혼자서 싸워 나갔지만 그가 싸움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은 옆에서 묵묵히 이해해주었던 부인이 있었고, 그의 성향을 이상형으로 받드는 그의 딸이 있었다.
그 덕분에 이들의 가정은 정상의 개념에서 한참 떨어진 지점에서 균형을 맞추면서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다소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외설적인 장면들은 아마도 멀어진 균형이 초래하는 비극의 일부를 나타낸 것이리라. 그리고 그 비극을 다시 행복으로 돌리기 위해서는 지금과는 다른 방법이 필요한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리라.
이 책의 제목은 <빛의 제국>이다. 그러나 <빛의 제국>이라는 단어는 이 책 속에 아주 잠깐 동안 등장한다. 인민 김성훈에서 한국인 김기영으로의 삶을 선택했을 때. 사상의 이끌림보다 가족애의 이끌림을 받아들였을 때. 그를 데려가려고 태안반도에 도달한 북한군을 쫒아버리는 등대의 불빛이 바로 빛의 제국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김기영은 자신의 운명을 선택했다. 40년 세월동안 주어진 사명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렇게 이곳에 남기로 한 후에 다른 날처럼 신문을 펼쳐들고 있는 그를 바라보며 전날 그에게 떠나버리라고 소리쳤던, 부인 장마리는 아무런 불만을 표시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상황을 바라보고 있는 현미는 지금까지의 다툼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라는 것을 몸으로 이해한다.
이제 그들 가정에는 행복한 정상으로 돌아가기 위한 즐거운 과정이 남아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 상황을 상상하면서 책장의 마지막을 덮었다. 이 책은 사상의 범주 속에서 가족애를 표현했으나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 중 한 가지는 모든 것을 감내하고 이해만 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메시지였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가족이라면 가족 구성원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방향으로 함께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이 책은 알려주고 있는 것이었다. 밝은 빛이 나아가는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