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든
헨리 데이빗 소로우 지음, 강승영 옮김 / 이레 / 200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월든> 이라는 책과 그것을 쓴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라는 인물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법정스님의 책을 통해서였다. 법정 스님의 저서 중에 <아름다운 마무리>에서 스님께서는 소로우의 <월든>을 소개시켜주는 동시에 자신의 의견을 덧붙여서 우리들에게 남의 이목을 신경 쓰지 말고, 자신만의 삶을 살라고 충고해주셨다.


내 인생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책 중의 한권이었던 무소유. 그 무소유 정신을 나에게 전수해 주신 분의 추천을 받은 책이라 나는 덮어놓고 먼저 구매버튼을 클릭했지만, 집에 도착한 책의 띠지를 벗기면 더욱 부각되는 고리타분한 느낌의 표지와 빽빽하게 담겨있는 글씨들은 나의 손에서 책을 뿌리치는데 일등공신의 역할을 했다.


그랬던 <월든>을 요즘 MB정부의 4대강 정비 사업을 지켜보면서 그것에 대한 분노의 표출창구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읽기 시작했다. MB정부가 4대강 정비사업의 효과로 내세우는 것을 보면서 나는 정부의 '인간의 힘으로 자연을 회복할 수 있다는 안일한 생각'과 '4대강을 인간의 식수부족의 해결로 이용하겠다는 이기적인 생각'에 어처구니가 없을 따름이었다.


그는 정말로 인간에 의해서 개발되어, 인간의 의해서 깔끔하게 정돈된 모습들(강의 곳곳에 관문을 설치하고, 강의 주변에 콘크리트로 인간의 편의시설들을 만드는 것)로서 인간 생활의 편의만을 도모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래서 나는 월든을 집어 들었다. 해결책을 찾고자 하는 바램과 동시에 이 책에 담긴 자연의 정취를 잔뜩 느끼기 위해서…….  


그런데 이 책……. 이상했다. 그는 분명히 자기가 살던 생활을 그대로를 그려냈을 터인데, 그것을 바라보는 나로서는 전혀 상상이 가지 않는 신비로운 모습들이 많았다. 뿐만 아니라 그가 이야기하는 나무들의 이름, 물고기들의 이름, 식물들의 이름, 동물들의 이름들에서 나는 그 어떤 이미지도 생산해 낼 수 없었다. 나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이것은 그야말로 내가 태어나고 자라왔던 도시. 그곳에세의 생활 때문에 빚어진 비극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다. 나에게 <월든>은 몽환적인 자연ㆍ사상 에세이에서 신기하고 독특한 SF에세이로 변해버렸다. 나는 이 책을 통해서 설악산이나 더 나아가서 백두산에서 느껴지는 자연의 정취를 맡아보고자 했지만, 그가 이야기하는 월든 호수와 그 주변의 정취는 현존하는 그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을 만큼 탄성을 자아내게 할 만한 것들이 되고야 말았다.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사각상자에서 매일 아침 눈을 뜨고, 밖을 나서게 될 때마다 시꺼먼 아스팔트와 인사를 나누는 우리네들의 모습. 그 모습에 익숙함을 느끼고 평생을 살아왔던 나에게는 이 책의 아름다움이 낯설게 느껴졌으며, 책장을 넘기기가 어려웠으며, 이런 나를 바라보면서 씁쓸함을 느꼈다. 


<월든>의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는 그 시대에 유행하고 있는 물리적인 개척정신의 끝을 예감하고, 스스로 자연의 한낱 미물이 되는 것이 오히려 살아남는 방법이라는 것을 인지했으며, 그는 자연과의 끊임없는 대화와 그것에 대한 고뇌 섞인 성찰로서 자아의 개척과 완성을 이룰 수 있었다고 자랑섞인 말투로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우리에게 묻는다. 너무 외적인 것에 의존하고 있지는 않은가? 겉을 꾸미면 전부를 이루었다고 생각하는가? 그래서 자연 따위는 손보면 볼수록 인간에게 만족스러운 결과를 안겨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는 자연을 통해서 인간도 역시 그것들과 똑같은 존재라는 것을 몸소 체험한다. 그는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고,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는 것이 반복되는 일상. 그것에서 만물들이 꿈틀거리면서 자라나는 것을 관찰하면서 인간의 성장도 그것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인간은 지금보다 더 아름다워지기 위해 머리를 하고, 화장을 하고, 옷을 입고, 신발을 신는 것을 자랑으로 여긴다. 그것에 부족해서 아예 얼굴을 고치기까지 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월든>을 통해서 깨닫게 될 것이다. 더 나아가서 4대강 정비 사업이라는 것이 인간의 얼굴 뜯어고치기와 같은 행위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자연보호와 식수부족의 문제는 그것들을 새로 고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인간들 스스로가 개발을 멈추고 동ㆍ식물들을 보살피고, 인간에게 주어진 과분한 것들을 절약하는 생활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월든>을 통해서 MB정부가 내세우는 정책인 갖다 붙이기로 만들어낸 단어라고 하는 ‘녹색 뉴딜정책’을 버렸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인상깊은 구절

여론, 즉 대중의 평가는 우리 자신에 의한 자체 평가에 비교해보면 대단한 폭군이 되지 못한다. 자기가 자신에게 내리는 평가가 곧 그의 생애를 결정하든지, 아니면 최소한 그것에 대한 지표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너무나도 철저하게 현재의 생활을 신봉하고 살면서 변화의 가능성을 부인하고 있다. "이 길 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어."하고 우리는 말한다. 그러나 원의 중심에서 몇 개라도 반경을 그을 수 있듯이 길은 얼마든지 있다. 생각해보면 모든 변화는 기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 기적은 시시각각으로 일어나고 있다. 

집을 마련하고 나서 농부는 그 집 때문에 더 부자가 된 것이 아니라 실은 더 가난하게 되었는지 모르며, 그가 집을 소유한 것이 아니라 깁이 그를 소유하게 되었는지 모른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육체노동을 할 만큼은 깨어 있다. 하지만 백만 명 중 한 사람만이 효과적인 지적 활동을 할 만큼 깨어 있으며, 1억 명중 한 사람만이 시적인 또는 신적인 삶을 살 수 있을 만큼 깨어 있다. 깨어 있다는 것은 살아 있는 것을 의미한다. 

각자는 육체라고 불리는 신전의 건축가이다. 이 신전은 자기 나름대로의 양식에 의거해 건축되며 자기가 숭배하는 신에게 바쳐진다. 이 육체 대신 대리석 신전을 지음으로써 빠져나갈 수는 없다. 우리는 모두 조각가인 동시에 화가이며, 우리 자신은 피와 살과 뼈를 작품의 재료로 쓴다. 어떤 사람의 내적 고귀성은 즉각적으로 그의 겉모습을 정교하게 만들기 시작하며, 비열함이나 관능은 그를 짐승처럼 추하게 보이도록 한다. 

자연은 아무런 질문을 하지 않으며 우리 인간이 묻는 질문에도 대답을 하지 않는다. 자연은 이미 오래 전에 그렇게 하기로 결심을 했던 것이다. 

인간이란 것이 얼었다가 녹고 있는 진흙의 덩어리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우리가 항상 현재에서 살면서 자신의 몸 위에 떨어진 한 방울의 작은 이슬도 놓치지 않고 받아들여 커가는 풀잎처럼 우리에게 생기는 모든 일을 최대한 으로 이용할 수 있다면, 그리하여 과거의 잃어버린 기회에 대해 애통해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면 우리는 정말 복 받은 존재가 될 것이다. 

땅의 표면은 부드러워서 사람의 발에 의해 표가 나도록 되어 있다. 마음의 길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어떤 사물에 부여하는 어떠한 표면도 진신만큼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는 못한다. 오직 진실만이 모든 것을 견디어 낸다. 

샐비어 같은 약초를 가꾸듯 가난을 가꾸어라. 옷이 친구이든 새로운 것을 얻으려고 너무 애쓰지 마라. 헌 옷은 뒤집어서 다시 짓고 옛 친구들에게로 돌아가라. 사물은 변하지 않는다. 변하는 것은 우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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